제183화
홍예령과 송후의 모습을 지켜보던 송악의 표정엔 어느덧 인자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무튼, 늦었지만 축하한다. 송후야, 혹시 갖고 싶은 것이 있거든 말하거라.”
송운의 말에 송후가 기겁하며 손을 내저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형님!”
“하하! 오랜만에 이리 가족들과 함께하니 정말 행복하네요. 송하도 같이 왔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송운이 아쉬운 듯 표정을 흘렸다.
“언젠간 또 온가족이 모두 모일 날이 올 거야. 이렇게 운이 네가 왔듯이 말이야.”
홍예령이 송운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하면 언제 다시 무림맹으로 떠날 예정이냐?”
송악이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선 송운에게 물었다.
이에 송운이 잠시 바깥을 쳐다보더니, 답했다.
“아무래도 오늘 저녁쯤엔 출발해야 할 듯싶습니다. 지금도 시간이 제법 많이 지체돼서요.”
그의 말에 송악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다.
그건 아쉬움이었다.
하나 이는 금세 허공으로 흩어졌다.
자신의 표정을 읽는다면 송운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무거워질 것이고, 그리된다면 송악 역시 마음이 편치 않을 테니까.
아들이 가야 할 길을 막고 싶지 않았다.
“크흠, 그래. 저녁은 든든히 먹고 가야지. 그래야 네 어머니가 마음이 편할 게다.”
송운이 송악의 말에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지 않아도 어머니가 해 주시는 집밥이 꼭 먹고 싶었습니다.”
“후후, 맛있게 해 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렴. 네가 올 거라는 걸 알았다면 장이라도 새로 봐 두었을 텐데 미안하구나.”
“괜찮습니다. 소식 한 통 없이 갑작스럽게 들른 제 탓인걸요.”
잠시 후.
홍예령이 직접 솜씨를 발휘한 음식들이 식탁 위에 올라왔다.
갓 지은 밥에서 솟는 연기가 모락모락 송운의 콧속으로 향한다.
꼬르륵-
고슬고슬한 밥의 내음은 송운의 빈 뱃속을 자극했고, 동파육과 봉양양두부(鳳陽釀豆腐)도 두 눈을 호사스럽게 만들었다.
이중 봉양양두부가 정말 일품이었다.
명나라 개국황제인 주원장(朱元璋)이 가장 좋아하는 요리이기도 했는데, 그만큼 맛이 좋고 향도 뛰어났다.
꿀꺽.
송운뿐만이 아니라, 송악과 송후도 절로 군침이 넘어가고 있었다.
“봉양양두부는 정말 오랜만에 만들어 본 거라 간이 맞을지 모르겠네.”
홍예령이 조금 미안한 얼굴로 송악과 두 아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송악이 묵묵히 숟가락을 먼저 들었다.
“잘 먹겠소.”
송악이 먼저 숟가락을 드니 차례대로 송운, 송후가 말했다.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건데 맛이 없으면 어떠합니까?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송운이 한 입을 떠 넣자마자,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와…… 역시 어머니 솜씨는 끝내주네요.”
송운이 마지막 말을 남긴 채, 모두가 말없이 식사하는 데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홍예령이었다.
입가에 호선을 그린 그녀가 인자한 목소리로 말했다.
“체하겠다. 천천히 먹으렴. 모자라면 더 줄 테니까, 알겠지?”
따스한 가족의 맛이었다.
* * *
행복감이 포만감만큼 쌓인 식사가 끝이 나고, 쌓인 접시들이 치워진 뒤, 그 자리를 찻잔이 대신할 무렵.
송운은 송악과 송후, 그리고 홍예령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앞으로 얼마 동안이나 더 못 볼지 모르는 얼굴들이다.
한 번이라도 더 보고, 마음속에 각인시켜 두고 싶었다.
달그락.
찻잔에 차를 붓는 송악의 손이 평소보다 더 느렸다.
이제 곧 송운이 떠나야 할 때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 사이에 알 수 없는 묘한 기류가 흘렀다.
침묵을 지키던 틈에 송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는 대로 곧장 집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래,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명이니 잘 이행하고, 새아가와 송하까지 모두 몸 조심히 돌아오너라.”
“기다리고 있으마, 운아.”
말을 잇는 홍예령의 눈가에 맑은 무언가가 맺혔다.
“형님, 몸조심하셔야 합니다.”
지금까진 서로 모른 척했으나, 황제의 최측근으로 일하는 송악이기에 어느 정도 사정을 알고 있었다.
당금의 사태가 결코 심상치 않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어쩌면 그 최전방에 나서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 또한 말이다.
“송하는 안전하게 먼저 돌려보내겠습니다. 황궁 소속도 아니니 먼저 돌아간다고 해서 막을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무리하지 말거라. 우린 언제나 너를 믿는단다, 아들아.”
송운의 찻잔에 고였던 차가 밑바닥을 보였고, 그 순간 송악과 송운의 두 눈이 서로 마주쳤다.
자리에서 일어난 송운이 부모에게 절을 올렸다.
“그럼, 몸 조심히 다녀오겠습니다.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송후야, 어머니, 아버지를 잘 부탁한다.”
또다시 이별이었다.
집을 떠나오는 송운의 발걸음은 마치 두 발에 돌이라도 매단 듯, 무거움이 가득했다.
* * *
지난번보다 무공이 상승한 송운은, 돌아오는 길도 빨랐다.
먹고 자는 시간까지 아껴 가며 달려오니 정말 도착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미 제법 오랜 시간을 소비했기에 최대한 빨리 돌아오려는 그의 의지였다.
송운은 도착하기 무섭게 송하가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녀를 돌려보내기 위함이었다.
“싫어.”
“두 분이 네 걱정에 잠도 못 이루고 계신다고 하질 않느냐.”
송운은 조용히 송하를 타이르려 했으나, 예상대로 송하는 요지부동이다.
“오빠도 안 가는데 내가 왜 가야 돼?”
“나는 폐하의 명을 받았기에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너라도…….”
“이대로 집에 돌아가면 또 한동안 집에 갇혀서 살아야 해. 혹은 혼인하라고 주변에서 압박이 들어오거나……. 이미 넓은 세상을 알아 버린 나에게 그건 너무 잔혹하잖아.”
송하의 말을 듣고 있던 송운이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말이 맞았다.
이미 무인의 길을 걷기 시작한 송하에게 평범한 여인으로 사는 삶은 감옥이고, 독일지도 모른다.
하나, 송운은 송하가 조금 더 안전한 곳에 있기를 바랐다.
아직 그녀가 돌아다니기에는 너무도 험난한 강호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약과도 같은 곳이다.
또한 부모님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은 자신 하나만으로도 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곳은 너무 위험해. 아무리 네가 무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는 하나, 지금 우리가 상대하려는 이들은 아직 너에게는 너무 버겁다. 나조차도 그들과의 싸움이 두려운데, 오라비로서 너를 어찌 이곳에 둔단 말이냐?”
“그럼 오빠도 위험한 거잖아.”
송하가 단숨에 그의 말을 잘라 냈다.
설득하는 것을 포기한 송운이 이번에는 그녀를 달래 봤다.
“송하 네가, 부모님 곁에서 부모님을 지켜드리면 되지 않느냐. 북경에 아무리 폐하께서 계신다고 한들, 무조건 안전한 것도 아니니, 네가 나를 대신해 부모님을 지켜 드릴 순 없겠느냐?”
여태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던 송하도, 부모님의 안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 두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송하야.”
“……그럼 오빠도 약속해. 절대로 다치지 않을 거라고.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올 거라고.”
그녀의 두 눈에 단호함이 깃들었다.
약속이라도 하라고.
그리하지 않으면 절대 돌아가지 않겠노라고.
송운이 송하의 눈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아마도 송하는 자신이 늘 다쳐서 돌아왔던 기억이 상처로 남은 듯했다.
그때, 곁에서 잠자코 말을 듣고만 있었던 평서란이 처음으로 송운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리하겠다고 얼른 약조하세요.’라고 말하는 듯했다.
이에 송운이 알았다며 살짝 고개를 주억이더니 말했다.
“이번엔 결코 다치지 않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마. 내가 약속한 것은 꼭 지켰지 않았니?”
송운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졌다.
송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알겠어. 먼저 집으로 돌아갈게. 가서 부모님은 내가 꼭 지켜 드릴 테니까…… 그러니까 오빠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야 해. 알았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연락해야 해!”
송하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젖어 들었고, 그녀의 고개가 숙여졌다.
그런 송하를 향해 송운이 고개를 주억였다.
“알겠다. 이 오라비가 꼭 약조하마. 오늘은 이미 밤이 늦었으니 하룻밤 더 머물고, 동행할 사람을 붙여 줄 테니 내일 동이 트거든 함께 출발하도록 해라.”
“알겠어…… 서란 언니도 부디 몸조심해야 해요. 서신 자주 하고요. 알겠죠?”
송하가 평서란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 주기 위해 평서란이 얼굴에 빙긋 미소를 띠웠다.
“네, 아가씨. 여기는 걱정하지 마시고, 집까지 무탈하게 돌아가 계세요.”
“응…… 알겠어요.”
그제야 송하가 고개를 주억였다.
* * *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으세요?”
계속해서 뒤척이는 그의 모습에 평서란이 말을 걸었다.
“음, 그러하구려.”
“아가씨를 북경으로 돌려보내기로 한 결정은 잘하신 거예요.”
“역시…… 그러하겠지?”
송운이 얼굴에 가득 고심을 담은 채, 답했다.
“그럼요. 이곳에 아가씨를 두기엔 너무 위험해요. 아직 우리도 완벽하게 적의 동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잖아요. 만일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면 이곳부터 타격대를 보내올 거예요. 더군다나 운 가가도 여기 있는데, 아가씨까지 같이 계시면 아버님과 어머님께서 더 걱정하실 테고요.”
“하아…… 그럼 되었소. 가기 싫은 애를 억지로 보내는 것 같아 그건 그것대로 마음이 쓰이던 참이오. 혹여나 가는 길에 또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을지도 걱정되고…… 때마침 운양상단이 도착했다고 하니, 돌아가는 길에 같이 가 달라 부탁하겠지만 어쩌면 보내는 것이 더 불안할 것 같기도 하던 참이었소.”
아무래도 다른 이도 아닌, 동생의 일이다 보니 이래저래 머리가 아픈 송운이었다.
막상 돌려보내려고 마음을 먹으니 이제는 가는 길조차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이렇게 되니 혈교의 꼬리조차 제대로 잡지 못한 자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런 송운의 마음을 알아챈 것일까?
평서란이 송운의 양손을 꼭 잡았다.
“운양상단도 이번 양 단주님 사건 이후로 고용한 표사들의 무공 수위를 한 단계 더 높였으니, 큰 위험은 없을 거예요. 더구나 대오 님께서 함께 가 주신다고 하니, 더더욱 안전할 거고요. 너무 걱정 마세요, 운 가가.”
“하아…… 부디 그러하길 바라오.”
그때였다.
쿵쿵!
“운 소협, 계십니까?!”
누군가 다급한 목소리로 송운이 묵는 방의 문을 두드렸다.
“있습니다. 들어오세요.”
벌컥-!
송운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활짝 열렸다.
“무슨 일입니까?”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이는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아무래도 감숙성(甘肅省) 환현현(環縣縣) 부근에 혈교로 추정되는 무리가 들이닥친 것 같습니다. 한데 하필이면 맹의 주요 부대가 타지역으로 파견을 나간 탓에 인원이 부족하여…… 맹주님께서 급히 도와 달라 청하십니다!”
“허, 한동안 잠잠하던 녀석들이 왜 하필 이때…….”
왠지 모를 불안감은 이 때문이었을까.
그동안 워낙 암암리에 일을 벌이던 놈들인지라 송운의 마음이 더욱 급박해졌다.
“금세 준비를 마칠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송 소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