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화
순식간에 조용해진 방 안에는 송운과 위강, 그리고 양조광만이 남았다.
기감을 끌어올린 송운이 재차 주변을 확인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납치당한 이후로는 기억이 전혀 없는 거야?”
“네. 계속해서 눈이 뜰만 하면 잠들고, 또 잠들고를 반복했습니다. 그저 어두운 곳이었다는 것만 기억합니다.”
양조광이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갑자기 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단주님! 많이 아프세요?”
“아니다. 괜찮다. 너무 호들갑 떨지 않아도 된다. 너무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던 탓인 것 같구나.”
“윽, 이놈의 자식들! 분명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을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산서성의 대상가가 나섰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뭐, 그 상대는 말하지 않아도 대충 감이 오는 것 같고요.”
위강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만, 이번 일로 인해서 우리가 얻어 온 것이 있어.”
“얻어 온 것이요?”
순간 송운의 말에 위강의 두 귀가 쫑긋 세워졌다.
아니, 위강뿐만이 아닌 양조광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걸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고도 하지. 조광이를 구하면서 일석이조로 챙긴 것이 있거든.”
“그게 무어랍니까?”
전화위복에 일석이조라니!
화로 가득했던 위강의 두 눈은 어느새 초롱초롱하게 변해 있었다.
송운이 잠시 뜸을 들이나 싶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산서성 전체 거래권의 절반.”
“……예?”
“예에?! 헙!”
양조광과 위강이 순간 기겁하며 목소리를 키웠다. 어찌나 놀랐는지 스스로의 목소리에 놀란 위강이 서둘러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산서성 전체 거래권의 절반이 뉘 집 개 이름이던가?
충분히 놀라고도 남을 만했다.
“방산과 태원, 양천을 기점으로 아래 남부의 거래권은 모두 우리가 가지게 되었다. 내가 먼저 협상을 걸었고, 이번 사건을 묻어 두는 대신 얻어 온 대가야.”
부스럭.
송운이 품 안에 고이 모셔두었던 증서(證書)를 꺼내 들었다.
“받아.”
건네준 그것을 받아 펼쳐 본 양조광의 두 눈에 이채가 번쩍인다.
현 시간부로 방산, 태원, 양천 지방 아래, 남부의 모든 거래권을 운양상단에 넘긴다.
-태원상가 가주 오사달-
태원상가의 가주의 지문이 정확하게 박힌, 진짜 증서였다.
“과연 송 공자님이십니다! 대가를 톡톡히 받아오셨군요! 이것도 물론 부족하지만…….”
그것을 본 위강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방방 뛰었다. 하나 그런 그의 반응과는 달리 송운은 멋쩍은 듯 양조광을 직접 바라보지 못하였다.
“그게…… 아무래도 어쩌다 보니 조광이를 인질 삼아 얻어 온 거라, 뭔가 좀 미안한 감도 있긴 한데…… 그래도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나 싶어서. 표면적으로는 그들이 우리에게 먼저 고개를 숙이고 들어왔다고 입을 맞추었으니, 그리 알고 있으면 될 거 같아.”
양조광이 멈칫거리는 송운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아닙니다. 그런 생각 하지 마세요. 분명 운양상단에 큰 힘이 될 겁니다. 운 공자님, 저야말로 이렇게 늘 폐만 끼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평생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숨어만 살아야 할, 혹은 언제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던 저를 이 정도로 도와주시고, 구제해 주신 스승님과 운 공자님이십니다. 역적의 자식이라는 연유로 늘 공부를 하면서도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는 몸, 무엇하러 학문에 매달리는지 허망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어, 방황하던 저입니다. 그런 제게 이렇게 살아갈 길과 연유까지 쥐여 주신 분이 아니십니까?”
말을 잇는 양조광의 눈가에 어딘지 모르게 촉촉이 젖어 갔다.
“조광아…….”
그의 입으로는 단 한 번도 말해 본 적 없던 속내였다.
억울하게 반역죄를 뒤집어쓴 이의 자식임은 이미 오래전 송악에게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처음 듣는 그의 본심은 송운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가 말을 꺼낼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탓도 있었다.
“어찌 늘 제겐 미안해하지 말라 하시면서 운 공자님께서는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것으로 제발 미안해하지 마세요.”
오랫동안 가슴 깊숙이 꾹꾹 눌러 담아 온, 그 누구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양조광의 진심이었다.
“아…… 저도 아무것도 하는 게 없이 늘 두 분께 받기만 하니 송구합니다.”
뜻밖의 사연을 모두 들어 버린 위강이 덩달아 풀이 죽은 모습에 양조광이 그의 어깨를 다독였다.
“아니다, 강아. 내가 없는 동안 빈자리를 맡아 주어 정말 고맙구나. 네 도움이 참으로 컸다. 그렇지 않았다면 일정에 큰 차질이 빚어졌을 테고, 운 공자님께서 어렵게 튼 무림맹과의 거래가 무산될 뻔하지 않았더냐. 다행히 모든 일이 잘 해결되었으니, 네 덕이 크다.”
“그, 그럴까요?”
“그렇고말고.”
하나 언제 그랬냐는 듯 양조광의 칭찬에 금세 표정이 펴지는 위강이다.
둘의 모습에 송운이 속으로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겉으로는 어른인 척해도, 아직 아이는 아이로구나. 서로 의지가 되니 더더욱 다행이기도 하고…….’
그때, 양조광이 입을 열었다.
“자! 이렇게 되면 앞으로 운양상단이 더욱 몸집을 불리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산서성 남부 거래권을 쥐게 되었으니, 그쪽을 지나다니는 것도 한층 수월해져 무림맹에 물품을 조달하는 상행의 형편도 나아질 겁니다.”
문서를 쥐어 든 양조광의 목소리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생기 있게 변했다.
“그래, 이래야 우리 조광이지. 너만 믿는다, 조광아.”
“네. 운 공자님.”
그가 고개를 주억였다.
‘결코 더 이상 실망시켜드리지 않을 겁니다.’
각자의 마음에 새로운 마음을 품은 셋의 얼굴에 희망의 미소가 번져 나갔다.
第三章. 다시 무림맹으로
“그럼 곧바로 무림맹으로 가시는 겁니까?”
아침 식사를 마친 양조광이 송운에게 먼저 물어 왔다.
잠시 고민에 빠진 송운이 고개를 내젓는다.
“……아니, 아무래도 아버지를 뵙고 가야겠어.”
“그리하신다면 아마 스승님께서도 몹시 기뻐하실 겁니다.”
양조광이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송운의 말에 동조했다.
원래 무림맹으로 가려던 송운은 헌현현까지 오게 된 이상 북경에 들르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얼굴을 찾아뵙지 못한 것이 어언 일 년이 넘었다.
서신조차도 자주 드리지 못해, 겉으로 티도 내지 못하고, 애만 끓이고 계실 부모님을 생각하니 송운의 가슴 한편이 아려 왔다.
게다가 지금이 아니라면 또 언제 아버지와 어머니의 얼굴을 뵐 수 있을지 장담하지 못한다.
천하 무림 대회가 열리는 사이, 송운에게 황제의 새 황명이 내려온 것이다.
한동안은 평서란과 함께 무림맹에 머물라는 명이었다.
지금 시기를 놓치면 또 언제 다시 북경에 들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어머니, 아버지를 뵌 후, 돌아가는 길에는 아무래도 이곳에 들르지 못할 것 같아.”
송운이 미안한 얼굴로 말을 하니 양조광이 괜찮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이리 얼굴을 뵈었으니 괜찮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보다 더 중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는 길 항시 조심하십시오.”
“그럼, 다녀올게.”
그렇게 양조광을 비롯하여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남긴 송운이 곧장 발걸음을 틀었다.
* * *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가는 몸과 마음이 몹시도 가벼웠다.
송운이 속력을 내기 시작하니 북경의 집까지는 도착하는데 금방이었다.
간만에 마주 보는 집 문은 반갑기 그지없었다.
‘아아, 음.’
잠시 속으로 마음을 가다듬은 송운이 거대한 문을 두드렸다.
똑똑.
“……누구십니까?”
그러자,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가의 문지기로서 벌써 그가 일한 지 수십 년이 흘렀으니, 송운에게는 너무도 익숙할 수밖에 없는 목소리였다.
벌써부터 송운의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이에 송운이 크게 외쳤다.
“아저씨, 접니다! 송운이요.”
“크, 큰 공자님이십니까?!”
끼익-!
일전의 무황비고 사태 때와는 달리 이번엔 거대한 문이 단숨에 열렸다.
“오랜만입니다, 아저씨.”
거침없이 문을 열고서는 진짜 송운임을 확인한 문지기의 안면엔 경악과 반가움이 동시에 물들었다.
그러곤 호들갑스럽게, 집 안쪽을 향해 외쳤다.
“헉, 마, 마님! 주인 어르신! 큰 공자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 * *
오동나무로 잘 다듬어진 탁자를 중심으로 송운과 홍예령, 그리고 송악과 송후가 나란히 앉았다.
모두의 얼굴에는 기쁨과 반가움이 가득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더 자주 연락을 드렸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우린 잘 지내고 있었단다. 우리 운이 어디 아픈 데는 없는 거니?”
홍예령이 송운의 옆에서 팔을 붙잡고선 얼굴을 매만졌다.
“예, 어머니. 전 정말 괜찮습니다. 오히려 더욱 건강해진 기분입니다. 두 분은 어디 아프신 곳은 없으십니까?”
그 말에 어쩐지 울컥한 감정에 홍예령이 고개를 돌린다.
“어, 어머, 나일 먹으니 주책만 느는구나. 미안하다, 아가.”
그때, 순간적으로 고개가 돌아가면서 보인 홍예령의 눈가에 조금의 주름이 잡혀 있었다.
예전에는 그저 곱기만 하던 그녀의 얼굴에도 어느새 세월의 흔적이 새겨진 것이다.
그때, 송악이 먼저 송운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더니 네 모습을 보니 그간 잘 지낸 듯하구나. 한데, 송하는 함께 있는 것이 아니었더냐?”
놀란 마음에 고개를 든 송운의 눈에 스치듯 송악의 머릿속 흰머리 가닥도 보였다.
‘아……!’
송운이 새삼스레 속으로 탄식을 하고 말았다.
자신의 기억 속에는 전생에도, 현생에서도 늘 젊기만 하셨던 부모님의 모습이 이제는 조금씩 나이를 먹어 가고 계신 것이다.
그만큼 세월이 흐르고 있다는 증거였다.
늘 젊으신 모습만 기억했기에, 당연히 부모님께선 늙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樹欲靜而風不止(수욕정이풍부지) 子欲養而親不待(자욕양이친부대).
몇 해 전 송운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글귀가 다시 한번 송운의 심장을 울렸다.
막연히 다시 돌아와 효도를 해야겠다는 생각만 했지, 세월이 흘러 부모님이 나이를 드시고 계신다는 사실은 잠시 잊고 있었다.
송운이 간신히 목울대까지 차고 오른 눈물을 삼키고선 말을 이었다.
“……송하는 현재 무림맹에 있습니다. 란 매와 함께 있으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만 혼자 일이 생겨 잠시 북경 주변에 왔는데, 오랜만에 두 분의 얼굴은 뵙고 가야 할 것 같아 들렀습니다.”
“그래, 별일 없다면 되었다.”
여전히 무뚝뚝한 듯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송악의 음성에는 부드러움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막연히 걱정했던 마음이 송운의 얼굴을 보니 녹아내린 것이다.
그때, 곁에 있던 송후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야기가 끝나길 기다린 것이다.
“운이 형님, 이렇게 오랜만에 형님의 얼굴을 뵈어 기분이 좋습니다.”
“올해로 네가 스물한 살이던가?”
“예. 형님.”
마냥 수줍어하던 어린 동생 송후가 벌써 약관을 넘어섰다.
같은 동생들이지만, 송하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어머, 그러고 보니 운이는 몰랐겠구나. 우리 송후가 요즘 아버지를 따라 황궁의 한림원(翰林院)에서 종칠품 검토(檢討)로 일하고 있단다. 호호.”
“어, 어머니.”
홍예령이 송운에게 자랑하듯 말하자 송후가 간만에 얼굴을 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