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181화 (181/275)

제181화

하나 그의 노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어허, 차 총관! 가만히 있게. 결국 우리의 잘못이 아닌가.”

“하오나, 가주님……!”

오사달의 말에 그의 오갈 데 없어진 분노는, 쉽게 사그라질 것 같지 않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차 총관의 주먹 사이로 피가 고여 흘러내렸다.

뚝. 뚝.

그렇게 차 총관을 가다듬는 듯싶던 오사달이 깊은 고민을 끝냈다는 듯 송운을 향해 바라보았다.

“송운이라고 하였던가? 상단주는 아니라고 하니…… 이 늙은이가 부르기엔 송 공자가 적절한 호칭이겠구먼. 큼…… 이번 일은 분명 중대한 사항이지. 하나, 아직 철모르는 아이가 저지른 일이네. 필요하다면 돈으로도 얼마든지 보상을…… 쿨럭, 하겠네. 그러니 날 보아서라도 자네가 조금만 더 자비를 베푸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말을 잇는 그의 얼굴에는 그 어떠한 때보다 더 깊은 주름이 파여 있었다.

더불어 그의 눈빛에는 주름보다 더 깊은 자식을 향한 슬픔이 묻어 나왔다.

오랜 시간 거래의 주도권을 쥐어 왔던 오사달이 이번 거래에서는 사람이라면 느낄 수 있는 감정이라는 패를 내민 것이다.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와 겹쳐 바라보게끔 하여 연민을 끌어내고 있었다.

절반의 거래권.

절반의 절반이라도 지킬 수 있다면, 오사달이 내밀 수 있는 가장 최선의 패였다.

‘노련하군. 다른 누구도 아닌 장사꾼이, 이런 중대한 사항에서 이성이 아닌 사람의 감정을 건드릴 줄이야.’

이를 먼저 알아챈 송운은 두 눈을 감았다.

전쟁터도 아니며 창과 칼도 아닌, 말이 오갈 뿐인데도 주변 분위기는 숨이 턱턱 막히게 팽팽해지고 있었다.

지켜보던 차 총관이 혀를 내두를 만큼.

“더 이상 협상의 여지는 드리지 않습니다. 이건 엄밀히 따지면 정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겁니다.”

조용히 눈을 뜨며 고개를 내저은 송운이 입을 열었다.

감정은 감정이고, 거래는 거래다.

이를 알면서도 그 패를 꺼내든 오사달은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다.

하나, 이번 일이 흐지부지 넘어가게 되면, 훗날 태원상가와의 거래에서 우위를 쥘 수 있는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진다.

더불어 양조광의 생명을 가지고 농락했던 이들과의 거래인데, 이번 일만큼은 송운도 조금이라도 양보해 줄 생각이 없었다.

“……정녕 아니 되겠는가?”

“어르신, 이는 단지 한 사람을 납치하고 살인을 저지른 일로만 끝나지 않을 겁니다. 태원상가 정도 되는 곳의 가주 될 사람이, 벌써부터 암살자를 고용하여 일을 처리한다는 소문이 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겠지요. 더불어, 어르신께서 그토록 자제분을 사랑하신다면 이번 사건에서 큰 패를 잃어 보아야 더는 실수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오사달의 감정적 호소에 송운은 똑같이 감정적으로 답해 주었다.

송운이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호의였다.

“……차 총관, 거래권을 내오게.”

“가, 가주님?!”

이미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오사달을 바라보는 차 총관의 두 눈이 붉어졌다.

“송 공자의 말이 맞아. 내 아직도 못난 자식놈을 감싸고 있었구먼. 참으로 부끄러울 따름이야. 이번 일로 사총이 녀석도 배우는 것이 하나라도 있지 않겠는가. 어서 가져오게.”

“하…… 알겠습니다.”

오사달의 말에 결국 고개를 떨어뜨린 차 총관이 몸을 돌렸다.

차 총관이 방을 나간 후, 오사달이 말을 이었다.

“부디 이번 일은 없던 것으로 눈감아 주길 바라네. 우리 역시 대내외적으로 차라리 먼저 숙이고 들어갔다고 말하는 편이 조금이나마 서로가 덜 손해를 보는 것일 테니.”

“그리하도록 하죠.”

송운이 고개를 주억였다.

머지않아 차총관이 돌아왔고, 서로 검지에 인주를 묻혀 거래를 끝마친 송운이 양조광을 둘러멘 채 밖으로 향했다.

방을 내주겠다며 하루 묵고 가라는 오사달의 권유에 이곳에 오래 있어 봤자 좋은 꼴을 보기 힘들 거라며 송운은 단호히 거절했다.

어찌 되었건 양조광을 해하려 한 자들의 본거지다.

그러한 곳에 조금이라도 더 양조광을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우연히 오사총을 마주치게 된다면 기껏 가라앉힌 화가 다시 치밀어 오를 것 같았다.

밖으로 나온 송운은 양조광을 깨우는 것보다, 차라리 이대로 헌현현까지 가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파밧!

결정은 빨랐고, 곧 둘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쾅!

“부단주님…… 허억…… 부단주님!”

“아침부터 이리 무슨 소란입니까? 단주님이 무사히 돌아오실 때까지 조용히 있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부리나케 달려온 이의 눈에 비친 위강의 모습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요 며칠 사이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한 그의 두 눈 밑은 퀭했고,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얬다.

잠만 자지 못한 것이 아니라, 잠시라도 걱정을 잊기 위해 수많은 서류들을 다 살폈던 위강이기에, 틈틈이 운기조식이라도 하지 않았더라면 진즉에 쓰러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 그게……! 아니, 그러니까!”

“……그러다 숨넘어가겠습니다. 천천히 말해 보세요.”

숨이 차서 헉헉대는 그에게 위강이 말했다.

“……허억…… 그 운 공자님과 함께 단주님이 돌아오셨습니다!”

단주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위강이 몸을 일으켰다.

벌떡!

“당장 갑시다! 뭐해요? 앞장서세요!”

“바, 바로…… 헉헉, 요?”

“예! 바로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천천히 말해 보라던 친절한 위강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저 양조광의 소식에 정신이 팔린 그만 남았을 뿐.

* * *

“단주님! 단주님!”

한달음에 달려 나간 위강의 두 눈에는 송운보다 등에 업힌 양조광이 먼저 들어왔다.

“송 공자님! 다, 단주님께서 왜 정신을 못 차리시는 겁니까? 설마……!”

그의 동공이 지진을 일으키자, 바라보고 있던 송운의 입가에 슬며시 장난기가 맴돌았다.

잠시 장난을 쳐 볼까 했으나, 양조광에 대한 특별한 위강의 마음을 모르지 않기에 송운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만일 양조광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당장 그가 태원상가로 달려갈지도 모르니.

“아무 일 없다. 단지 이곳까지 한시라도 빠르게 오기 위해서 잠시 혈을 짚어 둔 것뿐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디 특별히 다친 곳도 없어. 다만 몹시 놀랐을 테니, 미음을 준비하고, 따뜻하게 덥힌 방으로 모셔라.”

“예, 알겠습니다, 운 공자님.”

곁에서 양조광을 조심스레 받아 든 시녀들이 고개를 숙이곤 양조광을 들것에 올린 시종들과 함께 사라졌다.

털썩!

송운의 말에 한시름 덜었다는 듯 위강이 제자리에서 철퍼덕 주저앉는다.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송 공자님. 늘 이리 은혜만 받습니다.”

말을 잇는 그의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다. 오히려 조광이 곁을 지켜 주니 내가 늘 고맙지. 이만 일어나거라, 강아.”

“예. 그래야죠. 여러분은 서둘러 송 공자님께서 씻으실 물도 좀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부단주님.”

* * *

첨벙.

“하아…….”

시녀들의 안내를 받아 목욕물 속으로 들어오자마자 송운의 입에서도 긴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서신을 받고 난 후부터 내내 잔뜩 긴장하고 날카롭게 날이 서 있었던 송운이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 굳게 믿었지만, 한편으로는 양조광을 잃을까 두려웠던 탓일까?

무사히 양조광을 구해 운양상단으로 돌아오고 나니 온몸의 긴장이 풀린 듯했다.

“어찌 되었건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군.”

송운은 오사달과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산서성에서 태원을 중심으로 선을 긋고, 남쪽 방향의 거래권을 모두 가져왔다.

아무래도 헌현현이 하북성에서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니, 그것까지 전부 고려한 것이다.

‘하북성과 산서성으로 나뉘어 있다고 해도, 위쪽 지방보다야 아래쪽 지방을 통해 왕래하는 것이 더 편하겠지.’

방산(方山)과 태원, 양천(陽泉)이 그 선이었다.

“아무래도 더 자세한 것은 조광이가 깨어나면 이야기를 나눠 봐야겠군.”

아무리 송운이 머리를 잘 굴린다고 할지언정, 직접 운양 상단을 운영한 지 오래된 양조광이 이런 계산은 더 정확할 것이다.

“내일쯤이면 깨어나겠지.”

그렇게, 정신없었던 하루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쥐죽은 듯 잠을 청하던 양조광이 드디어 눈을 떴다.

그의 곁에 송운과 위강, 그리고 곽 총관이 서 있었다.

“단주님, 정신이 드세요?”

“아…… 여기는……?”

오랜만에 맞이하는 햇볕이 눈이 부신지 양조광이 손으로 눈을 가렸고, 그의 물음에 가장 먼저 들려온 건 위강의 목소리였다.

“운양 상단입니다.”

“……강이로구나.”

익숙한 목소리에 양조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네. 대체 어찌 되신 겁니까? 어디 편찮으신 곳은 없으세요?”

“그래, 나는 괜찮다. 한데 내가 대체 어찌 이곳에……?”

이번에도 양조광의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위강의 대답이 더 빨랐다.

“습격이 있던 날, 호위단장께서…… 천향신폭을 터뜨리고 숨을 거두신 듯합니다. 안타깝게도 호위단은 모두 전멸…… 했습니다.”

설명하던 위강도 목이 메는지,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곧바로 말을 이어 나갔다.

“하나, 그분들의 희생 덕분에 빠르게 소식이 전해졌고, 송 공자님께서 직접 나서셔서 단주님을 찾으셨어요. 어젯밤에 이곳에 도착하셨고요.”

“결국 그리되었구나…….”

목소리가 다시 가라앉은 양조광이 이번엔 힘겹게 고개를 틀어 송운이 있는 곳을 바라본다.

“공자님…….”

“미안하다, 죄송하다, 폐를 끼쳤다 등등의 모든 말들은 듣지 않을 거다. 우리 사이에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야. 그리고 이미 천하 무림 대회는 끝이 난 후였어.”

이미 양조광의 걱정을 눈치챈 송운은 양조광이 무어라 말할 새도 없이 먼저 선수를 쳤다.

거기에 합세하듯 위강도 한입 거들었다.

“다행히 곧바로 제가 상단을 다시 꾸려 보냈으니, 그것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 그의 모습에 그제야 양조광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감사…… 합니다. 그리고 강아 고맙구나. 그래도 이 정도 인사는 드려도 되지 않습니까.”

양조광이 말하자 송운 역시도 피식 웃음을 흘린다.

“정말이지…… 널 잃는 줄 알았다. 앞으론 어떤 상행이건 강이랑 꼭 함께하도록 해.”

송운이 자신의 이름을 거론하자 때는 이때다 싶었는지 위강이 침을 튀겨 가며 말했다.

“맞습니다, 단주님! 앞으로 절대로 혼자 보내지 않을 겁니다. 이 위강이 꼭 따라붙을 거라고요!”

“허, 알겠다, 알겠어. 앞으로는 꼭 너와 함께하마. 한데, 운 공자님. 제가 있던 곳이 어디였습니까……? 잡혀간 뒤로는 계속해서 기절해 있었던 탓에 기억이 전혀 나질 않습니다.”

양조광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이에 송운도 웃음기를 지우고 입을 열었다.

“강아.”

송운의 눈빛에 위강이 눈치 빠르게 움직였다.

“곽 총관님, 주변을 모두 물려 주세요. 필요한 일이 생기거든 그때 다시 부르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말씀 편히 나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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