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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전생-178화 (178/275)

제178화

자박자박.

어둠 사이로 송하가 등을 돌린 채 걸었고, 황보운룡은 그녀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정말로 송운과 평서란이 자리를 피해 준 탓에 단둘만이 남아 있게 된 덕이다.

얼마나 걸었는지 제법 깊은 밤이 되어 연회를 즐기던 자들도 대다수 술에 곯아떨어져 연회장도 서서히 소음이 잦아들고 있었다.

‘이 정도 걸었으면 그냥 가지 왜 아직도 안 가고 있는 거야?’

송하가 참다 참다 안 되겠는지 그를 향해 외쳤다.

“그쪽은 정말 안 갈 거예요? 지금 몇 시진째 이러고 있는 줄 알아요?”

“풍 소저가 먼저 가시면…….”

또다시 그의 입에서 나온 풍이라는 이름에, 송하가 또박또박 말을 읊었다.

“이봐요! 내 이름은 풍이 아니라 송하예요. 알겠어요?”

“이제야 직접 본명을 말해 주시는군요. 제 이름은 ‘이봐요’가 아니라 황보운룡입니다.”

휙-

송하의 본명을 듣기 무섭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선 황보운룡은 자리에서 사라졌다.

분명 반나절도 안 되는 시간이었으나, 한참 동안 뒤를 쫓아다니던 이가 사라지고 나니 괜스레 뒤가 공허해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 송하다.

“……뭐야 가란다고 진짜 그냥 가 버리…… 합! 내가 지금 뭐라는 거야? 오히려 잘됐지.”

혼잣말을 계속 반복하던 송하는 그가 사라진 방향의 정반대 쪽으로 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 * *

똑똑.

“들어오너라.”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오늘도 여전히 서재에 파묻혀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양조광의 모습이 위강의 눈에 비쳤다.

어느덧 송운이 헌현현을 떠난 지 일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하나, 송운이 자리를 비웠음에도 불구하고 송하와 함께 위강은 끊임없이 무공 수련에 매진했다.

죽을 것같이 힘겨워도 극한의 수련법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몸의 한계까지 극한으로 밀어붙인 뒤, 잠시 쉬어 주고 또 그것을 반복하는 식이었다.

부서질 듯 부서지지 않는 육체는 점점 단단해져 가고 있었다.

하루하루가 둘에겐 지옥이었다.

위강이 모르는 것은 송하가 이끌어 주었으며, 더불어 본인의 것에 충실했다.

누구 하나 보는 이도 없고, 알아주는 이도 없다.

송운이 있었다면 이 수련법을 만류했을 터나, 이 둘의 목적이 너무도 닮아 있었기에 서로 의지하며 버텨 낼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 결과 이제는 외관도 양조광이 처음 만났던 위강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훌쩍 자라 있었다.

“강이 네가 올해로 열세 살이던가?”

“네. 그러합니다, 단주님.”

“정말 믿기지 않는구나. 무공을 익혔다고 하여 사람이 이토록 단시간 내에 몸이 성장할 수 있다니……!”

양조광은 정말 놀랍다는 듯 위강을 바라보았다.

하나 위강도 딱히 싫지만은 않았는지 그의 말에 넉살을 떤다.

“아이고, 단주님. 또 그 말씀이십니까? 그날 이후로 하루에 한 번은 듣는 것 같네요.”

실상 열세 살이라는 나이에 벌써 약 오 척에 다다른 이는 그다지 보기 쉽지 않다.

저잣거리에 나가 둘러보아도 아이들과는 이제 어울릴 수 없을 만큼 자란 것이다.

길거리에서 생활하며 나약하고 자그맣던 위강은 이제 없었다.

“그래그래, 내가 주책이 좀 심했구나. 하하. 가끔은 네가 성인이 되었다고 착각이 들 정도니…… 미안하다. 이번 물자 운반은 잘 진행되고 있는 것이냐?”

“네. 아주 완벽히 잘되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도 그걸 보고드리러 온 것인데, 우리 단주님 참 이럴 땐 성격이 급하십니다.”

양조광의 말에 위강의 얼굴에 즐거움이 서렸다.

양조광의 말대로 이번 무림맹에서 열린 천하 무림대회의 물자 공급 선이 닿으면서 그 일을 위강이 절반 정도 담당하고 있었다.

나이는 어리지만 무엇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척척 잘 해내는 위강은 어느새 상단 내에서도 제법 촉망받는 인재였다.

이미 초반에 양조광을 따라 세워 놓은 전적을 인정받아 누구 하나 불만을 토해내는 이도 없었다.

당금 위강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정말 감탄을 금치 못 할 일인 것이다.

“아무래도 이러다 표국까지 하나 세워야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음…… 역시 가는 길이 역시 좀 험난하겠지?”

그 말에 양조광이 정숙해지자 위강 역시 엄숙해지며 고개를 주억였다.

“네. 말도 못 하죠. 가는 길이 오죽 멉니까? 그래도 상단에 표사 일을 하던 이들을 고용해서 다행이에요. 계속해서 상단이 커지고 있지만, 그만큼 빠르게 안정되고 있으니 단주님께선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상단이 커지면서 양조광이 가장 먼저 해낸 일은 표사를 늘리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직접 물건을 운반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표국을 차리는 것은 무리일지라도 당장에 표사가 필요하다고 느낀 탓이 컸다.

이미 하북성에서 가장 큰 상단으로 자리매김한 것도 한몫했다.

많은 표사들이 점점 커지는 운양상단에 자원해 왔기 때문이다.

“천하 무림 대회의 마지막 연회가 언제라고 하였지?”

“돌아오는 그믐날이요.”

“그날에 맞춰서 도착할 수 있도록 일정을 좀 짜야겠구나. 아무래도 송 공자님께서 바쁘시니 직접 무림맹에 감사의 인사도 전할 겸, 송 공자님을 뵈러 가야겠다.”

양조광의 말에 위강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낸다.

“엇, 괜찮으시겠어요? 가는 길에 산은 없지만, 제법 먼 거리인데…….”

“그래도 이렇게 앉아서 받아먹기만 하는 것이 예의는 아니지 않겠느냐? 더불어 이제 어느 정도 상단이 자리도 잡아가니 세상 돌아가는 모습도 좀 둘러보고 싶구나.”

양조광의 말에 위강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그렇게 맞출 수 있도록 준비해 두겠습니다.”

* * *

준비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애당초 이미 무림맹으로 가려고 준비해 두었던 상행이기에, 그저 그 자리에 양조광의 자리를 마련하기만 하면 됐으니 말이다.

단지 잠시 중단된 연유가 있는데, 양조광이 가는 길에 위강이 꼭 함께해야 한다며 우겼기 때문이다.

“제가 가지 않으면 안 돼요.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데 단주님 혼자 달랑 보내요?”

“강아…….”

“자리는 곽 총관님께 맡겨 두면 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이것 역시 제 일 아닙니까?”

“하하…… 강아, 이미 많은 호위무사들이 함께하지 않느냐.”

“안 됩니다! 이것만은 절대 양보 못 해요! 안 합니다!”

이미 양조광의 키를 훌쩍 따라잡은 위강은 연신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니까요? 이제 단주님의 목숨을 노리는 타 상단들이 엄청나게 많아졌단 말입니다! 아직도 실감이 안 나세요?”

위강의 말이 옳기는 옳았다.

상단이 커지면서 적도 늘어난 것이 사실이니 말이다.

“내 도중에 혹여 큰일이 생기거든 곧바로 서신을 날릴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자리를 비운 동안 네가 운양상단을 지켜 주었으면 한다.”

말을 마친 양조광이 자신의 품에서 무언가를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천향신조(天香神鳥)에서 그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는 천향신폭(天香神爆)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은 양조광의 안전을 위해 예전에 송운이 직접 구해다 준 세상에 몇 없는 아주 진귀한 물건이었다.

천리향과는 다르나 비슷한 효과를 낸다.

대충 천리향의 한 단계 아래의 물건이라 볼 수 있다.

“이걸 터뜨리면 멀리까지 향이 퍼질 테니, 만에 하나 내게 일이 생기거든 이것을 터뜨리도록 하마.”

“…….”

잠시 말을 잃은 위강이 한층 풀이 죽은 모습으로 양조광을 바라보았다.

“정말…… 위험하시면 꼭 터뜨리셔야 해요?! 사용법도 잘 숙지해 가셔야 합니다!”

위강이 두 눈에 걱정을 한가득 담고선 양조광을 향해 말했다.

“이걸 터뜨릴 만큼 큰일은 없을 게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운양상단을 잘 부탁하마.”

“후우…… 알겠어요. 대신 정말 정말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혹여 이번 상행에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두 번 다시 혼자 보내지 않을 거예요.”

그 후로도 양조광이 몇 번이고 다짐하고 나서야 위강이 한 발짝 물러났다.

“출발하라!”

“예이!”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난 상태였기에 위강이 고집을 꺾기 무섭게 출발의 신호를 알렸다.

* * *

“하아…… 하아…….”

“단주님, 많이 힘드십니까? 아무래도 마차에 올라타시는 것이 좋지 않으시겠습니까?”

표사 한 명이 힘들어하는 양조광의 모습에 조심스레 상단의 마차를 권했다.

아무래도 그의 체력이 약하다 보니 벌써부터 한계를 보인 것이다.

이미 양조광의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었다.

자신의 체력이 뒤떨어진다는 것을 느낀 이후로, 많이 닦아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그것은 학사들의 기준일 뿐이었다.

늘 짐을 꾸려 상행하러 다니는 이들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인 것이다.

더욱이 하늘에서는 오전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으니, 발걸음이 더 무거워졌다. 젖지 않도록 천을 씌워 두었으나, 이대로 가다간 상품이 상할지도 모른다.

양조광은 빠른 결정을 내렸다.

“후우…… 비도 오는 데다 땅거미가 내려앉았으니,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서 묵고 내일 출발하는 것이 좋겠구나.”

잠시 숨을 고른 양조광이 말을 이었다.

초반엔 자신이 고용한 이들에게 말을 편히 하지 못하고 어색해했으나, 이제는 제법 든든한 단주의 모습을 갖춘 그였다.

“모두 행렬을 멈추어라! 단주님의 말씀대로 오늘은 이곳에서 묵고 간다!”

그들을 이끄는 행수(行首)의 목소리에 물건을 끌고 가던 쟁자수(爭子手)들의 발걸음이 동시에 우뚝, 멈춰 섰다.

그들의 행렬이 멈춘 곳은 하진현(河津縣) 부근에 위치한 허름한 마을이었다.

“오늘 이곳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짐을 지킬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눈을 붙인 다음, 내일 새벽 묘시 초에 다시 출발하는 것으로 하세.”

“그리 이르도록 하겠습니다, 단주님.”

제법 오랜 시간 걸은 탓에, 쟁자수들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각자 짐을 풀고 하나둘씩 방으로 향했다.

오랜 경험상 지금 쉬지 않으면 또 언제 쉴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들의 동작은 빨랐다.

* * *

그날 밤.

사삭-

척-!

검은 복면을 두르고 온몸을 검은색 옷으로 감싼 약 열 명의 흑의인이 운양상단이 머물고 있는 주변을 서성거렸다.

누가 보아도 수상한 자들이었으나, 조용하고 날쌘 걸음에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했다.

‘저쪽으로.’

‘하나, 둘, 셋!’

스르륵!

눈짓으로 의사를 주고받은 이들이 양조광의 방 앞까지 진입한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들의 앞을 막아선 양조광의 호위무사들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주변에 위험을 알리기 위함이었다.

“누구냐!”

“침입자다! 단주님을 지켜라!”

촤라락-

동시에 열 명의 호위무사들이 양조광을 둘러쌌다.

“단주님, 이곳은 저희가 맡을 터이니 백리풍(百里風)을 따라 몸을 피하십시오.”

“……알겠네. 자네들도 몸조심하게.”

꿀꺽.

순식간에 요란해진 주변에 잠에서 깬 양조광이 품 안으로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그사이, 흑의인들의 수장으로 보이는 이가 차갑게 눈을 빛내며 말했다.

“……최대한 빠르게 떨거지들을 정리하고 목표만 데리고 자리를 뜬다.”

“예.”

오랜만에 느껴 보는 무인들의 살기가 양조광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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