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177화 (177/275)

제177화

최종 우승자가 가려지고 난 후, 무림맹에서 큰 연회를 열었다.

이 연회는 우승자를 비롯한 본선 경기에 출전했던, 애쓴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사상 유례없는 인파 속에 무림맹에서 가장 큰 대연회장을 열었으나, 그것으로도 부족하여 안뜰까지도 전부 사용해야 했다.

그만큼 대인원이었으나, 음식의 양은 모자라지 않았다. 음식이야 끊임없이 들어오는 식자재들로, 숙수들이 만들어 내면 되니까.

또한, 경기 내내 혹시 모를 사건에 대비해 입가에 대지도 못했던 술들이 방출됐다.

간만에 무인들 모두가 긴장을 잊고 떠들썩하게 먹고 즐기고 있을 무렵, 중앙에 놓인 단상(壇上) 위에 하얀 백발의 사내가 올라왔다.

소소한 무복을 입고 있음에도, 어딘지 모르게 그의 풍채에서는 당당함과 근엄한 분위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크흠.”

조그맣게 내뱉은 헛기침은 이곳에 모인 무인들의 시선을 하나둘 사로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앞에 선 이의 위치가 자그마치 무림맹의 중심인 무림맹주, 백능이기 때문이다.

생전에 무림맹주를 보는 일이 쉽지 않은 일인데다, 현재 중원 무림인들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는 그다.

한데, 이곳에서 백능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신명 나게 음식을 먹던 모두의 시선이 중앙으로 모이고 있었다.

크고 작은 소음이 완전히 사라진 이곳에서, 백능이 무겁게 닫혔던 입을 열었다.

“우선 이러한 시기에 천하 무림 대회를 참가해 주신 모든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백능이 목소리에 은은하게 내공을 싣자, 멀리 있는 이들까지 모두 들을 수 있을 만큼의 소리가 일파만파 울려 퍼진다.

그러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이자, 모두가 절로 고개를 숙이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당금 전 중원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하나, 협을 아는 무인끼리 힘을 뭉쳐 그들을 대적한다면 우리가 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러하였고, 현재에도 그러할 것임을 무림맹주로서 약조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혹여라도 일이 터진다면 우리 무림맹을 믿고, 함께 힘을 합치는 것에 주력해 주십시오.”

“와아아-!”

짝짝짝!

말을 마친 백능이 단상에서 내려갔다.

백능을 바라보던 무인들의 눈에는 조금 전과는 미묘하게 다른 생기가 차오른다.

그의 말은 짧지만 굵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낮지만 큰 힘이 담겨 있다.

이것이 바로 높은 자리에 서 있는 자의 말이 지닌 힘이다.

순식간에, 한동안 땅에 떨어져 있던 무인들의 사기가 하늘을 뚫고 솟아오르는 듯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백능이 곁에서 자신을 지켜보던 여러 장로들을 향해 낮게 읊조렸다.

“반드시, 우리는 평화를 지켜 내야 하네.”

* * *

“송하 아가씨.”

송하의 고개가 뒤로 돌아가기 무섭게, 송하는 자신의 본명이 불린 것보다 앞에 놓인 존재에 대해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너무도 잘 아는 이였기 때문이다.

부드럽게 잡은 손은, 평서란의 것이었다.

“아…… 딸꾹! 서란 언…… 딸꾹! 니.”

엉겁결에 튀어 나간 대답은 부정할 새도 없이 제멋대로였으나, 그와는 대조적으로, 목소리는 오랜 시간 사내의 목소리에 익숙해진 탓인지, 낮은 음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게다가, 어찌나 놀랐는지 딸꾹질까지 반복되는 탓에, 목소리는 더더욱 이상해져 있었다.

하나 송하를 잘 아는 이라면, 충분히 그녀의 것이라 알아들을 만큼은 충분했다.

“많이 놀라셨다면 미안해요. 우선 여기부터 빠져나가요.”

누가 봐도 화들짝 놀란 그녀의 눈동자에 평서란이 서둘러 사과를 건넸다.

앞선 이들에게는 갈 걸음을 재촉하는 인파가 있는가 하면, 송하와 평서란의 모습에도 제법 시선이 쏠려 있었다.

평서란은 잠시 멍하던 송하의 손목을 잡았고, 주변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하늘로 날아올랐다.

파밧-!

탁.

순식간에 지붕 위로 올라온 송하가 평서란에게 먼저 빠르게 질의를 던졌다.

“오빠도 알…… 딸꾹! 고 있죠?”

아마 맞을 터다.

하나 그럼에도 사람이란 바람이라는 것이 있는 법.

‘제발, 제발, 제발.’

송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아니길 간절히 바랐으나, 하늘도 무심하다. 이내 돌아온 대답은 일말의, 남은 눈곱만큼 작은 기대마저도 모두 깨뜨려 버릴 만큼 확고했다.

“네, 알고 있죠.”

“휴우…… 이럴 줄…… 딸꾹! 알았어. 내가, 딸꾹! 어쩐지 안 들킨다 했어.”

송하의 작고 귀여운 입이 뾰로통하게 나오더니, 한숨이 길게 새어 나온다. 결국 오빠 본인은 마지막 결승전에 나갔으니, 자신이 도망가기 전 미리 평서란에게 부탁한 것이리라.

송하가 고개를 들어 평서란을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보는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분명 웃고 있지만, 어딘지 모를 난처함이 힐끗힐끗 비치고 있다.

‘그래, 언니가 무슨 잘못이야.’

휙휙-

잠시 고개를 돌려 사방팔방 둘러본 송하가, 이내 고개를 아래로 숙인 채로 손을 꼼지락거리기 시작한다.

“아? 아가씨?”

어느새 딸꾹질이 멈춘 송하가 입가에 호선을 그린다.

어딘지 모르게 장난기가 배어 있는 송하의 미소는 낯이 익은 듯한 모습이다.

“걱정 마요, 언니. 어차피 다 들킨 거, 도망은 안 가요. 단지 가기 전에 이 답답한 것부터 뜯어 버리려고요.”

찌직, 직.

찌이익-!

얼마 되지 않아 그녀의 안면을 뒤덮고 있던 인피면구가 시원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나갔다. 조금의 끈적거림이 얼굴에 남아 있긴 했으나, 마저 다 뜯어낸 송하가 숨을 크게 내뱉었다.

“후아, 개운하다! 그렇지 않아도 이것 때문에 답답해 죽을 뻔했는데, 오빠 덕분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벗을 수 있게 돼서 다행이에요. 이제 가요, 언니! 큰오빠한테.”

평서란에게 말하며 왼쪽 허리춤에 손을 올린 송하가 허공을 향해 오른손을 내뻗는다.

동시에 그녀의 발음 속엔 유독 오빠라는 단어가 강조되고 있었으나, 동생이 없는 평서란에겐 이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그저 귀여워 보일 뿐이다.

두 여자 사이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심상치 않다.

평서란이 슬며시 웃으며 말했고, 이내 송하가 그녀의 팔에 팔짱을 끼워 넣었다.

“후훗. 그럼 가 볼까요?”

* * *

백능이 다녀간 후, 더더욱 시끌벅적해진 연회장 안뜰 가장 구석진 곳에 세 명의 사람이 서 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둘 그리고 한 명으로 나누어진 채, 그 사이가 묘하게 갈라져 있는 듯 보이는 상황이다.

송운과 평서란. 그리고 송하였다.

“……그러니까,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거지?”

송하의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난 듯한 목소리가 송운을 다그쳤고, 송운이 이에 고개를 주억인다.

“음, 아무래도 그러하다고 보아야겠지?”

“……너무해. 큰오빠 정말 너무해! 차라리 이럴 거면 애초부터 알아봤으면 좋았잖아. 치.”

송하는 입이 대발 튀어나온 채, 송운에게 툴툴거린다.

그랬다면 차라리 애초부터 이렇게 힘들게 장옷을 걸치고, 인피면구를 쓰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물론 그 대가로 자유를 박탈당했을 테지만.

더구나, 잠시나마 정말 자신을 못 알아봤을 수도 있겠다는 헛된 상상을 품었던 자신이 민망해, 있다면 쥐구멍으로라도 숨어들고 싶을 지경이다.

그 탓에 송하의 귀가 새빨개져 있었다.

“하하! 우리 송하, 화가 많이 났나 보구나.”

송운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당황하지 않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선 송하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아무리 화를 내도 송운에겐 그저 아직 어린 동생의 귀여운 투정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 말이다.

“그…… 합!”

송하가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 송운이 그녀의 입에 당과를 쏙 집어넣었다. 그러자 송하의 입이 동그랗게 변하면서 자연스레 말문이 막혔다. 아니, 물론 뱉어낼 수도 있었지만 송하도 송운의 행동에 굳이 더는 반발하려 들지 않았다.

곧 달달한 당과가 송하의 입안을 맴돌며 서서히 녹아들자, 달콤함에 저도 모르게 송하의 입이 오므라진다.

오물오물.

처음부터 들켰다는 사실이 멋쩍어서, 민망해서 잠시 부린 투정일 뿐. 오랜만에 보는 오빠의 모습에 더 이상 짜증을 내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를 먼저 송운이 잘 알아서 끊어 준 것이다.

그윽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송운의 눈길에 송하가 입 안 가득 당과를 문 채 말했다.

“겨, 겨코 당과 때무은 아이야.”

그 모습조차 사랑스러운 송운이 고개를 주억였고, 화두를 돌린다.

“한데, 못 보던 새에 또다시 성장했더구나. 더 도와주었어야 했는데 그러하지 못하니 미안하구나.”

“뭐…… 큰오빠는 늘 바쁘니까.”

어느새 당과 하나를 다 녹여 먹은 송하가 똑바른 발음으로 답했다.

“오빠도 그동안 잘 지냈나 보네. 서란 언니랑도 여전히 좋아 보이고. ……뭐, 어, 어디 다친 곳은 없는…… 거지?”

송하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송운이 미소로 답했다.

“그럼. 이 오빠가 어디 가서 다치고 다닐 사람은 아니지 않느냐.”

“거짓말. 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제법 되거든? 언니, 오빠 말 다 믿지 마요. 알죠?”

“후후, 그럼요. 알다마다요.”

평서란마저 송하의 편을 들어 주니, 송운이 어색한 웃음을 흘린다. 하나 이 또한 송하의 인사법일 터. 이미 목소리엔 화는커녕, 걱정이 한 다발이다.

“하하, 이거…… 내가 양쪽 다 신의를 잃은 것 같구나. 아무래도 더 노력해야겠어.”

“알면 됐어. 제발 밖에서 다치고 다니지 마. 엄마 아빠가 얼마나 걱정하시는데.”

훈훈한 이야기가 서로 오갈 무렵, 송운이 자신의 머리 위를 향해 말했다.

“그만큼 몰래 들었으면 이제 나올 때가 되지 않았소?”

“……저도 들킨 겁니까?”

타닥.

어두운 음영 속에서 튀어나온 건, 모두에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화, 황보운룡?”

가장 놀란 것은 송하였다.

송하가 고개를 돌려 보니, 이미 평서란 역시도 알고 있는 눈치다.

당혹스러운 듯 양쪽으로 시선을 돌리던 송하에게 이번엔 황보운룡이 먼저 말을 걸었다.

“처음부터 엿들으려 한 것은 아닙니다. 실례가 되었다면 용서 바랍니다.”

정중히 사과를 건네는 그의 목소리엔 진심이 담긴 것 같았지만, 계속해서 웃고 있는 눈이 송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자꾸만 그가 신경이 쓰인 탓이다.

“다 알았네, 다 알았어. 그래요. 뭐 이미 오빠한테도 들킨 마당에, 그 쪽한테 들킨다고 해서 뭐 달라질 것도 없어요. 어디 가서 떠들고 다니시던지, 마시든지 알아서 하세요.”

심기 불편해진 듯한 표정으로 송하가 휙, 고개를 돌렸다.

“제가 그런다고 해서 딱히 얻을 만한 이득은 없습니다. 그러니 맘 놓으시죠, 풍 소저. 아까 손은 정말 죄송했습니다. 사실 아까 그 일 다시 사과드리고 싶어서 온 것인데, 일이 이리되었군요.”

“그런 건 일일이 사과하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무인 대 무인으로 붙은 정정당당한 대진이었으니까.”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에, 송운과 평서란의 두 눈에 자그마한 호선이 그려진다.

“아무래도 우리가 자리를 피해 주는 게 좋을 듯싶은데…….”

짓궂은 송운의 말에 송하가 당황하며 말을 더듬는다.

“오, 오빠 대체 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 저 사람이랑 아무 관계도 아니거든?!”

“그럼 둘이서 시간 따로 갖도록 도와 드릴까요?”

덩달아 맞장구쳐 주는 평서란이 오늘따라 이렇게 미울 수가 없는 송하다.

이에 송하의 눈이 있는 힘껏 황보운룡을 흘겨보았다.

“사과는 충분히 받았으니까 얼른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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