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대체 뭐야, 이 녀석?’
하나 속마음과는 달리 송하도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어차피 곧 대회장에서 검을 맞댈 사이다.
미리 기운 뺄 필요는 없었다.
“뭐, 그럽…… 딸꾹! 시다.”
그렇게 얼떨결에 둘이 서로의 손을 주고받았다.
* * *
준준결승전의 대진이 정해지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진 다음, 대회가 재개됐다.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커다란 긴장감이 감돌았고, 대회장엔 침묵만이 맴돌았다.
데엥-!
시작을 알리는 징이 침묵으로 가득 찬 대회장을 한 바퀴 휘돌았다.
마치 꽁꽁 얼어 있던 얼음이 깨지듯 또다시 우렁찬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와아아아아아!”
첫 번째 대진은 창을 든 무인과 검을 든 무인이었다.
꿀꺽-
기 싸움이 팽배해질 무렵.
창을 든 무인이 상대방을 향해 검지로 까딱였다.
“더 볼 것 없다. 오너라.”
“이…… 으랴아아!”
채재쟁-!
격장지계인 것을 알면서도 순간, 그 행동과 말에 눈이 뒤집힌 것이다.
몇 번의 손속이 오갔을까.
촤아악!
“크억……!”
“끝! 조철중(曺鐵中) 승!”
곧 검을 든 무인의 왼쪽 허벅지에 붉은 선혈이 흘러내리며 중심을 잃고 쓰러졌고, 빠르게 심판관이 경기를 중단시켰다.
더 이상 대진을 진행할 수 없는 상황임을 판단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이보시오! 나, 난 아직 더 싸울 수 있소!”
단호한 심판의 말에 목구멍으로 차오르는 신음을 억누르고 다급히 소리쳤으나, 이미 허벅지의 절반이 베인 상태였다.
자칫 목숨이 오가는 싸움으로 변질될 수도 있어, 심판관의 노련함이 필요했다.
특히나 이번 경기에서는 더욱더 그 기준을 높게 세우라는 백능의 특별 전언이 있었기에 심판은 더욱이 단칼과도 같았다.
“전담반!”
“예!”
그의 부름에 곁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들이 들것에 실어 빠르게 대회장을 빠져나갔다.
일반인들의 육안으로는 확인이 어렵기에, 그저 눈치만 보고 있던 관객들의 입에서 그제야 탄식과 승리를 축하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두 번째 대결은 검과 검의 싸움이었다.
병장기의 꽃이라 불리는 검인 만큼 다루는 무인의 숫자도 가장 많았다.
그래서일까?
첫 번째 대진에 비해 더욱 치열하고 쟁쟁했다.
‘저 녀석, 제법인데? 아까는 역시 힘을 비축해 둔 거였군.’
날카로운 눈으로 참가자들의 검 끝을 좇던 송하가 속으로 쾌재를 외쳤다.
그래, 바로 이처럼 뜨거운 현장!
그녀가 얼마나 고대하던 것들이던가?
늘 봐 왔던 약속된 대련이 아닌, 진정한 무인들의 생생한 싸움을 직접 바라보는 송하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고, 흥분에 가득 차 있었다.
비록 이 대회 역시도 진짜 싸움만큼 살기가 오가는 것은 아니나, 그때 이후로는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검이 움직이는 모습, 그들의 동작 하나하나가 작금 송하에게는 모두 살아 있는 지식이 되는 것이다.
흥분했음에도 송하의 두 눈이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바쁘게 움직였다.
그렇게 두 번째 대진은 치열한 접전 끝에 판가름 났다.
“이어서 세 번째 대결은 추운행(秋雲行), 그리고 송운!”
송하의 귓가에 오랜 기다림 끝에 고대하던 이름이 들려왔다.
‘드디어 오빠다.’
꿀꺽.
마른침이 절로 삼켜진다.
송운이 직접적으로 다른 이랑 대련을 하거나 손속을 나누는 것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녀다.
송하의 시선은 어느덧 기대가 잔뜩 담긴 눈빛으로 송운을 향했다.
추운행이라 이름이 불린 사내와는 달리 송운에게선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이미 송운에 대한 소문은 파다하게 퍼진 상태기에, 바짝 긴장한 모습이다.
추운행이 자신의 도를 쥔 손에 꽉 힘을 줬다.
하나, 그런 그의 행동이 머쓱해질 만큼 시작을 알리는 소리와 동시에 승패는 결정되었다.
파밧-!
퍼벅!
찰그랑!
“…….”
순간, 대회장은 침묵으로 물들었다.
송운이 검조차 뽑지 않고 단 한 번의 주먹질로 상대방을 기절시킨 탓이다.
워낙 손속이 빨랐기에 반응이 더뎠다.
“……송운 승!”
이내 심판관이 승을 외쳤고, 송운은 자연스럽게 손을 털고선 관객석을 향해 포권지례를 취한 뒤 대회장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우오오오오오!”
“송운! 송운!”
휘이익-!
사방에서 송운의 모습에 환호성과 구적(口笛)소리가 대회장에 울려 퍼진다.
다른 반응도 심심찮게 보였다.
“이런 제기랄! 어떻게 한 방에 뻗을 수가 있냐! 내 돈 물어내라!”
“그러게 내 뭐랬나? 그 소문이 진짜라니까! 아이고, 속 터져…… 넘어간 내가 X신이지!”
앞선 경기가 빠르게 끝이 나니, 그제야 송하의 머릿속에 자신의 경기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아, 맞다. 이제 내 차례지?!’
화들짝 정신을 차린 송하의 귓가에 이번엔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네 번째 대결은 풍! 그리고 황보운룡!”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마자 송하가 재빠르게 대회장 정 중앙으로 튀어 올라갔다.
“와아아아!”
“거 고만고만한 놈들끼리 붙었구먼!”
이런 말이 나올 만한 것이 송하의 키가 여인치고는 절대 작지 않은 탓도 있었으나, 황보운룡의 키가 크지 않은 것도 한몫했다.
“거 얕보면 큰일 날 텐데!”
휘이익!
“잘해 봐라, 풍!”
첫날 비웃던 목소리들과는 달리, 어느새 송하를 응원하는 소리가 관객석에서 흘러나왔다.
송하는 괜히 어깨를 으쓱였다.
부우우-!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송하는 곧바로 자세를 취했다.
반면에 황보운룡은 여전히 미소가 입가에서 떠나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재수 없게 웃기는. 칫, 주 무기는 나와 같은 검인데 왼손잡이라 이거지?’
황보운룡은 송하에게 다가올 듯 말 듯 자신의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초조해 할 것은 없었다.
그녀 역시도 아직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 준 적이 없으니, 황보운룡이 함부로 나서진 못할 테니까.
어쩌면 탐색전이 더 길어질지도 모른다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쌔애액-!
거리를 계속 재고 있던 황보운룡의 검이 순식간에 송하의 품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더 빠른 호흡으로 선수를 친 셈이다.
‘어딜!’
이를 눈치챈 송하가 재빠르게 몸을 비틀었다.
카가각-!
그와 동시에 아슬아슬하게 송하의 검이 황보운룡의 검을 쳐 냈다. 두 검과 검이 맞닿는 소리가 날카롭게 대회장을 울린다.
채재쟁!
타닥!
서로의 검을 밀쳐 낸 둘은 허공에 몸을 띄운 상태로 두 초를 더 나눈 뒤에야 바닥에 착지했다.
착지와 동시에 두 사람의 양어깨가 일직선을 그리며 처음과 같이 거리가 벌어졌다.
‘큭……! 제법이네.’
송하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겉으로는 둘 모두 멀쩡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달랐다.
황보운룡보다 송하 쪽의 피해가 더 컸다.
황보운룡의 검이 묘하게 그녀의 검을 베어 내듯 쳐 내면서 송하의 어깨 근육을 건드린 것이다.
* * *
공방을 지켜보고 있던 평서란의 두 눈이 솔방울만 하게 커졌다. 송운 역시 묘한 눈빛으로 그 둘을 바라보았다.
“……봐주고 있군.”
“아무래도…… 그런 거 같죠?”
평서란의 조심스러운 말에 송운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러곤 황보운룡 쪽을 더욱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공간감이 뛰어난 자로군.’
허공에 몸을 띄웠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어 거리를 잃지 않았다.
상대방에게 공격을 함과 동시에 방어까지 완벽하게 해낸 것이다. 송운 역시도 이를 늘 염두에 두기에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이거…… 아무래도 송하가 지겠구나.’
송하는 아직 전투 의지를 잃지 않아 보였으나, 송운의 눈에는 이미 결과가 보였다.
지난번보다 훨씬 많이 성장한 듯 보이는 송하였지만, 상대방은 여유가 넘쳤고, 송하는 겉으론 여유로워 보이나 속으로 피해를 숨기고 있었다.
* * *
“더 이상 봐 드리지 않을 겁니다.”
다시 대치 상태에 돌입한 송하를 향해 황보운룡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지만, 이에 기가 죽을 송하가 아니었다.
오히려 봐주지 않겠다는 말에 이를 더 악문 그녀였다.
‘절대로 안 질 거야!’
행여나 지더라도 절대 항복하지는 않을 심산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타핫!”
후웅-!
이번엔 송하가 먼저 손을 뻗어 검 끝을 겨눴다.
아까의 타격으로 어깨가 미친 듯이 욱신거렸으나 바보처럼 두 번이나 선공을 빼앗길 생각은 없었다.
날카롭게 허공을 찢어발기는 소리가 황보운룡의 귓가를 울렸다.
하나 뒤로 빠지면서 물 흐르듯 그녀의 검을 튕겨 낸 그는 유유히 거리를 벌렸다.
카드득-!
카앙-!
찌직.
그 뒤로 두 번의 공방을 더 주고받은 송하의 미간이 일순간 찌푸려졌다.
“윽……!”
동시에 송하가 잡고 있던 검 끝이 바닥에 닿았다.
마지막 충돌에서 내기로 인한 충격을 고스란히 받은 채 끝끝내 검파를 놓지 않은 탓에 송하의 손바닥이 완전히 찢어진 것이다.
송하는 검을 놓지 않으려 했으나, 이내 부들부들 떨리던 손은 검을 놓치고 말았다.
주륵-
챙강!
“황보운룡 승!”
“와아아아! 잘했다!”
“……하아.”
승패가 갈리면서 송하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내뿜어져 나왔다.
“잘하신 겁니다.”
그런 그녀를 향해 황보운룡이 손을 내밀어 왔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흥.’
송하는 멀쩡한 왼손으로 검을 주웠다.
“보시다시피 지금 손이 이 꼴인지라. 뭐, 이긴 건…… 축하해요.”
송하가 마지막에 작게 웅얼거리며 축하를 전했다.
져서 화가 났지만, 진 건 진 거였으니까.
그러곤 몸을 돌려 대회장을 내려가는 송하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황보운룡이 두 눈이 호선을 그렸다.
* * *
송하가 대회장에서 내려간 후, 계속해서 애가 타는 이가 있었다.
송운이었다.
자신의 눈앞에서 동생이 다쳤음에도 한달음에 달려 나가지 못한다는 건 무척 답답한 일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자리를 박차고 다가간다면 송하의 꼴이 우스워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송운은 꿋꿋이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평서란이 안절부절못하는 송운의 손을 잡아 주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아가씬 금방 털고 일어나실 거예요.”
“……그러하겠지?”
송운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그럼요. 누구 동생인데요?”
“하아…… 끝까지 모른 척해 주려 했건만, 아무래도 대회가 끝나는 대로 송하에게 가 봐야겠소.”
“네. 그렇게 해요. 이제 곧 운 가가 차례예요.”
평서란의 말에 송운이 고개를 돌렸다.
그새 적혀 나온 준결승전 표가 보였다.
“분명 결승전엔 황보운룡이 올라올 거예요. 운 가가께서 아가씨의 복수를 대신해 드리면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