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기다리고 기다렸던 전반부가 막을 내리고, 잠시 쉬는 시간이 주어졌다.
본래라면 전반, 후반으로 나뉘지 않았을 테지만 이번 대회는 워낙 사람이 많아 적용된 새로운 방식이었다.
물론, 이 시간에 무인들만 쉬는 건 아닌 듯했다.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던 관객들 역시 경기가 이뤄지는 동안에 내뱉지 못한 탄식이 사방에서 흘러나왔다. 물론 그중 일부는 환호성을 지르기도 하였다.
“아이고, 내 돈! 다 잃었네, 다 잃었어!”
“낄낄, 그러게 사람 보는 눈을 좀 기르라 하지 않았는가? 내 말이라도 들었으면 오죽 좋아?”
제법 쏠쏠한 재미를 봤는지 곁에 있던 이가 안타까운 시선으로 옆에 앉은 사내를 바라봤다.
“쩝…… 본전치기는 한 것 같구먼.”
“저, 저 사기꾼 잡아라!”
“이 정도면 이번 달은…… 으흐흐흐흐! 월향아, 조금만 기다려라! 이 철봉이가 간다!”
희비가 갈리는 순간이었다.
하나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박빙의 승부나, 기적 같은 역전이 이루어지지는 않았기에 탄식과 환호의 횟수는 거의 비등비등한 상황이었다.
순식간에 주어진 휴식 시간이 흘렀다.
데엥-!
둥- 둥!
다시 한번 큰 북이 울리며, 동시에 객석에 있던 눈빛이 번쩍번쩍 빛나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인가?”
“앞선 일부에서 딱히 이렇다 할 만한 실력자는 나오지 않았으니, 기대를 걸어 볼 만하지 않겠는가? 거기다 그…… 송운인가? 하는 자도 이번에 출전했다고 들었네.”
“오오, 그러했지!”
“모처럼 열린 경기에 구파일방이 빠진다고 해서 아쉽다고 생각했더니, 오히려 더 흥미로운 실력자가 출전했구먼.”
사방에서 들려오는 관중들이 수군대던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송하가 슬며시 검지로 삿갓을 위로 들어 올렸다.
‘이제부터가 진짜인가?’
두근두근-
송하의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한다.
이토록 많은 이들의 앞에 설 일이 없었던 그녀로서는 걱정 반, 설레는 마음 반이었다.
심지어 참가자만으로도 충분히 많다고 생각했던 예선전에서도 이 정도의 인파는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그것보다는 드디어 제대로 된 무인들과 상대를 해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더욱 그녀의 마음을 흥분시키고 있었다.
예선전에서 주의 깊게 지켜본 결과, 그녀가 추려낸 경쟁 상대는 대략 일곱 명 정도였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빠진 만큼 이 정도 숫자도 제법 많아 보이나, 애당초 시작 인원을 생각하면 보잘것없는 인원이었다.
우승은 애당초 바라지도 않았다.
송운이 참가한 이상 승리는 어지간한 이변이 있지 않는 한 그가 거머쥘 것이다.
‘딱! 준결승까지만 올라가 보자. 넌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 송하야!’
자칫 운이 좋지 않으면 올라가는 길목에서 송운을 마주하게 될 수도 있었다.
마음속으로 깊이 부디 준결승 경기에 올라가기 전까지는 그와 마주하는 일이 없길 간절히 바라는 송하였다.
송하는 속으로 멋대로 널뛰는 마음을 달래며, 다짐하듯 두 주먹을 한번 불끈 쥐었다.
* * *
대회장에서부터 제법 멀찍이 떨어진 곳에 위치한 객점의 가장 높은 층.
두 명의 인영이 휘황찬란한 음식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인중에 회색의 짧은 수염과 얼굴에 주름이 제법 진 이였고, 다른 한 명은 그에 비해 상당히 젊어 보이는 외관을 지녔다.
젊은 사내가 음식을 집던 손을 멈추고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이내 휘휘 손을 저었다.
“……다행히 이번 대회에 쓸 만한 자는 딱히 없는 듯합니다.”
달그락.
접시에서 한 번의 부드러운 칼질로 고기를 썰어 낸 짧은 수염의 사내가 고개를 들어 건너편을 쳐다보았다.
일순간 그의 서늘한 눈빛에 젊은 사내가 움찔거리며 반응했다.
“그자가 참가했다지.”
반면 짧은 수염의 사내의 눈빛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에는 그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송운 말입니까? 그다지 신경 쓰실 부분은 아닌…….”
“아니지, 아니야. 그 녀석이야말로 가장 신경이 써야 할 녀석이다.”
방금 전과 묘하게 다른 목소리에 젊은 사내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미처 짚지 못한 부분을 떠올린 것이다.
“하오나, 송운 그자는 이미 황궁에 몸을 담지 않았습니까? 천자의 명령 없이는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더구나 송운은 문인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쯧, 그래서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아!”
젊은 사내의 목구멍에서 굵고 짧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아직도 다섯만 보고 열을 보지 못하는구나.’
그 모습에 짧은 수염의 사내의 안면에 아쉬움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젊은 사내의 말대로 단순히 송운이 천하 무림 대회에 참가하여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하나, 황궁에서 중요한 위치인 사람이 무려 두 명씩이나 무림맹에 와서 머무르고 있었다.
이것이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인가?
바로 황궁과 무림맹의 사이가 나쁘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도 머물고 있는 이는 소문만 무성한 무인인지 문인인지 아직 분간이 가지 않는 송운과 이미 지난 천하 무림 대회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힌 평서란이었다.
그 정도의 주요 전력을 황궁에서 보냈다는 것은 황제가 어느 정도 무림맹을 신뢰하고 있다는 것과도 마찬가지였다.
언제든지 무림맹과 황군은 연합을 맺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
아니, 실제로 이미 일전에 연합을 맺은 전적이 존재했다.
이 정도 선을 유지하고 있는 이상 앞으로도 얼마든지 그들은 연합군을 맺을 확률이 높았다.
더불어 정보통에 의하면 작금, 황궁의 병력의 수준이 상당히 높은 수치를 웃돌고 있다고 하니, 이들의 입장에서는 썩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그자들이 저희의 앞길에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군요.”
“이제야 머리가 다시 굴러가는 게냐? 쯧, 아직 멀었구나.”
그의 말에 짧은 수염의 사내가 혀를 차며 다시 음식 먹는 행위를 시작했다.
“아직 부족함이 많습니다. 제 모자람을 용서하십시오, 숙부님.”
그가 식사를 하던 와중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다고 해서 별호 하나 없이 소문만 무성한 자가, 무엇이 그리 대단하단 말인가?’
젊은 사내는 입으로 내뱉은 말과는 달리 다소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곧바로 짧은 수염의 사내가 그것을 지적했다.
“곽철우. 그 아이가 이미 오래전 송운에 대하여 모든 것을 보증하였다. 송운이 없었다면 아마 곽철우는 몇 해 전 가짜 무황비고에서 살아 나오지 못했을 게다. 더불어 이번 토벌 역시도. 그자의 실력은 진짜다.”
“하나 숙부님, 철우의 실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대놓고 목소리에 속내를 표출하니 짧은 수염의 사내가 이번엔 달래듯 말을 이었다.
숙부님이라는 호칭에서 느껴지듯 그들은 멀게 느껴지지만 제법 멀지 않은 관계였다.
“허어…… 아자(兒子)야, 그것은 어디까지나 곽철우의 또래에 비했을 때일 뿐이다. 그가 오룡일봉이라는 허명을 달고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중원 전체 무림을 놓고 보자면 애송이인 게야. 알겠느냐?”
젊은 사내는 더 이상 숙부라 부르는 이에게 반발하지 않았다.
“……예, 숙부님.”
“가장 실력이 높은 이들을 붙여 송운과 평서란의 동태를 주의 깊게 살피게 하여라. 결코 들켜서는 아니 된다.”
“예, 그리 일러두겠습니다.”
그렇게 시끄러운 세상 속에 둘의 식사 시간은 고요히 흘러가고 있었다.
* * *
다들 본인의 실력을 숨기려는 의도인지 아니면 무공의 수위가 올라가면서 자연스레 볼 수 있는 것이 줄어든 것인지.
그도 아니면 둘 모두인지는 몰라도 대회의 후반부는 확실히 전반부보다 좀 더 간결하고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래서인지 열기가 다시 차오르기도 전에 후반부가 모두 끝이 났고, 최종적으로 남은 이는 여덟 명이었다.
송하는 최대한 몸을 뒤로 뺀 채 주변을 살폈다.
‘예상했던 대로네? 딱 한 명만 제외하고.’
애당초 자신이 집었던 인물들이 살아남았으나, 한 명은 예상과 달랐다.
그리 크지도 작지도 않은 키에 적당히 벌어진 어깨, 거기에 조금 독특하게도 오른쪽 허리춤에 검을 매단 왼손잡이 무사였다.
‘얼굴은 제법 사내답게 생겼네. 흥, 지가 그래 봤자 우리 큰오빠보단 못하겠지만.’
송하는 자신의 예측이 빗나가게 한 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연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치렀던 경기가 너무 싱겁게 끝나 버리는 바람에 제대로 된 정보를 얻지도 못하였기에 더욱 속이 상하는 송하였다.
그러던 중, 싱글싱글 웃고 있는 그와 눈이 마주쳤고, 송하가 재빨리 먼저 고개를 돌렸다.
‘뭐, 뭐야? 날 왜 쳐다보는 거야? 기분 나쁘게. 날 보며 웃어 주는 건 우리 오빠들이면 충분하다고.’
송하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준준결승전의 대진표가 커다란 종이에 적혀 나왔다.
가장 먼저 그녀의 눈에 들어온 이름은 송운이었다.
송운과 이어진 이는 키가 작고 도를 사용하는 이였다.
얼굴에 커다란 흉터를 지닌 데다 험상궂게 생겨서인지 그가 든 도와 잘 어울리는 느낌의 무인이었다.
‘아까 보니 그렇게 버거운 상대는 아닌 것 같던데, 그럼 나는…….’
그러곤 곧바로 자신의 이름 옆에 적힌 이름을 확인했다.
황보운룡(皇甫雲龍)
“……맙소사.”
그녀의 고운 입술에서 자신도 모르게 한탄에 가까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필이면 자신이 예측하지 못했던 그자였다.
* * *
“……이름 한번 참 거창하게도 지었다.”
잠깐의 충격이 가셨는지 대기자들이 모두 빠져나가 휑해진 한복판에서 송하가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황보운룡의 부모님이 얼마나 큰 인물이 되길 기대했으면 이름을 운룡이라 지었을까.
계속해서 곱씹어 봐도 참 스스로도 부담스러울 이름이었다.
톡톡.
그때, 누군가 송하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누구…… 합!”
어깨 너머로 시선을 돌리던 송하가 재빨리 입을 틀어막았다.
자신의 뒤에서 여전히 싱글싱글 웃고 있는 황보운룡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 탓이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육성으로 ‘깜짝이야!’를 내뱉을 뻔한 송하였다. 그랬다면 목소리가 그대로 드러나 여인이라는 사실을 들켰을지도 모른다.
“……딸꾹!”
놀란 마음에 딸꾹질을 시작한 송하를 보고는 황보운룡이 미안한 표정을 내비쳤다.
“아, 실례했습니다. 이렇게까지 놀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거든요. 이번 대진을 하게 된 황보운룡이라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러고선 말을 끝내며 송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