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과연, 거짓은 아니라는 건가.”
툭툭.
순간 옷깃에 날려 묻은 침방울을 불결하다는 듯 내기로 날려버린 진천후가 자신의 눈앞에 놓여있는 생물체를 바라보며 신기하다는 듯 눈을 빛냈다.
호기심이었다.
그런 그의 눈빛을 재빠르게 늙은 꼽추가 삐뚤고 사이사이가 없는 누런 이를 다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늙은 꼽추는 바로 옛 공손연(公孫淵)의 먼 후손이자, 당금 혈교의 가장 뛰어난 강시 술의 대가.
공손우경(公孫優勁)이었다.
비록 자신의 피조물인 강시가 밀리는 기분이었으나, 애당초 장인으로서의 긍지보다는 새로운 장난감에 눈이 먼 지 오래였다.
다들 위험하다며 서로 미루던 통제 환을 먹은 것도 스스로의 결정이었으니 두말하면 잔소리다.
공손우경은 슬쩍 격양된 목소리로 귀마병에 대해 나열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강시 술은 아니나, 강시 술을 사용해 만드는 것보다 훨씬 효용적이며 빠릅니다. 환을 복용한 지 약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머리가 기능을 멈추고,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이나 사람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걸 보면 놈이 말한 게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단점이라면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자에게 직접 환을 먹여야 한다는 점이긴 합니다.”
이빨 사이로 침이 뚝뚝 흐르고 초점을 잃은 두 눈동자가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생물체는 강시처럼 몸이 뻣뻣하지도 않으면서 날렵하다. 더불어 힘 역시도 어찌나 장사인지, 당해낼 재간이 없을 정도니 이들만으로도 어쭙잖은 무림인들은 상대가 되지 않을 터다.
만일 제어가 되지 않는다면 위험한 것은 이쪽 역시 마찬가지리라.
“이게 정녕 그 환을 먹은 것이란 말이냐?”
귀마병의 모습을 보고 있던 종초기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무리 혈교라 한들 산 자에게 직접 먹였다는 사실에 조금 찝찝한 듯했다.
그 물음에 공손우경이 답하려던 순간.
“한데, 이건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툭.
“크허엉!”
철컹!
“히, 히이익!”
귀마병의 얌전해진 모습에 잠시 손을 내밀어 건드린 조익기는 성급히 손을 거두어 들여야만 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당황한 그는 핏기가 몽땅 사라진 얼굴로 제자리에 굳은 채로 헛숨을 들이켰다.
종이 한 장 차이로 그의 코앞에 멈춘 것이다.
날카로운 이빨은 그를 잡아먹을 듯 위협하고 있었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만년 한철(萬年寒鐵)에 사지를 묶어두어 더는 가까이 다가오지 못한다는 점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만!”
“죄, 죄, 죄송합니다! 이 미련한 놈을 용서하십시오!”
본능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 조익기가 머리를 조아리며 땅에 세차게 박았다.
‘끄흑. 이렇게 내 다음 후임이 들어오는 건가?’
순간의 호기심을 참지 못한 대가가 참혹할 것이라 여긴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으나,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아 슬쩍 실눈을 뜨는 순간.
“히, 히에엑!”
이번엔 코앞에 서 있는 진천후의 모습에 또다시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한심한 모습을 바라보며 진천후가 혀를 내찼다.
“쯧, 하여튼 볼수록 멍청하기 그지없구나. 네 그 멍청함이 너를 매번 살리는 것만 알아 두어라.”
곧 조익기를 향했던 진천후의 눈이 다시 귀마병을 향했다.
“그나저나 꼬맹이 녀석, 제법이군. 대체 어디서 이러한 것을 구해 온 거지? 우경. 똑같이 만들 수 있겠어?”
“저도 그게 의문이긴 합니다. 어디서 이런 걸 만들어 낸 건지…….”
여태껏 자신만만하던 공손우경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기어들어 간다.
하나 이것도 잠시뿐이다.
다시 득의양양한 모습으로 진천후를 향해 음침한 미소를 지었다.
“흘흘, 그래도 이 정도 양이면 당장 넉넉히 두 소대는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연구도 더 해 나갈 테구요.”
* * *
지잉-!
쿵- 쿵-!
드디어 본선 결전의 날이 밝았다.
사방에서 울리는 묵직한 북소리.
“와아아아아아아!”
“휘이이익!”
거기에 관중들의 감정이 한껏 격양된 목소리가 한대 어울려 천하 무림 대회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마냥 즐겁고 신나 보이는 관중들과는 달리 출전을 앞둔 무인들의 손은 땀으로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예선을 걸치면서 이번 역시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룡일봉의 비 출전 소식을 접하고 마냥 기뻐하기도 잠시뿐이 된 연유다.
제법 비범한 실력을 지닌 이들이 있다는 것을 보고서는 아예 출전의 의지가 급하락한 이들도 몇 있었다. 아무리 예선으로 거르고 걸러졌다고는 하나 개중에서도 역시 수준이 나뉠 수밖에 없기 때문일 터다.
그들이 경계하는 이들 중에는 송운과 송하도 껴있었다.
특히나 송운은 이미 몇 해 전부터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기 때문인지, 이름만 듣고서도 알아보는 이가 있었다. 더구나 무림에서 제법 큰 관심을 받았던 터라, 그를 우상으로 생각하는 이도 제법 있었다.
하나 아직까지도 그의 소문이 불려서 그렇게 된 것이라 믿는 자들 또한 있었기에 더더욱 공기는 팽팽했다.
“자자,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럴 때 푼돈이 목돈이 될지 누가 압디까? 어서요 어서!”
“허음……! 거참, 성격이 급한 친구로구먼. 어디 보자…… 난 저자에게 걸겠네.”
“나, 나도 걸겠네!”
“거 술은 안 파는가?”
“예끼! 이 사람아, 무림 대회 처음 와보는 티 좀 내지 말게.”
그러한 이들의 속사정은 아는지 모르는지 관객석에서는 너도나도 내기가 한창이었다.
이러한 대회에 어찌 내기가 빠지랴?
이미 몇몇 장사치들은 남들보다 발 빠르게 움직여 대진표를 구해 본선에 진출한 무인들을 파악해낸 상태다.
돈 긁어모으는 모습은 이만저만 해 본 솜씨가 아니라는 게 절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내기라는 것이 본디 도박과 별다를 것이 없는 행위이나 오늘 같은 날에는 적정선을 지킨다면 괜찮다는 관례가 깔려있기에 더더욱 눈에 불을 켜고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띄운다.
만일 오늘 잘만 한다면 하루 만에 생업의 반년 치는 넉넉하게 벌어들일 수 있는 중요한 날인 것이다.
반면, 먹을거리를 작게 나누어 파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잘 말린 육포와 당과는 눈 깜짝할 사이 팔려나갔다.
누군가의 말대로 술은 팔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흥분한 관객이 혹여나 술을 먹고 횡포를 부릴 것을 미리 예방하기 위해서다.
“자, 이제부터 본격적인 시작에 앞서 대진표에 가까운 분들은 앞으로 나와 미리 대기해주시기 바랍니다.”
내공을 실어 일파만파 소리를 전달한 사회자가 자리를 잡고 나자 어느새 웅성거림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한다. 관중들의 눈빛은 흡사 먹잇감을 노리는 매처럼 매섭게 빛이 쏘아져 나오고 있었다.
“이번엔 내 꼭 단단히 한몫 챙기고 만다!”
“사람이 보는 눈이 그리 없어서 어디 돈 좀 만져보겠나? 쯧쯧. 두고 보게.”
어쩌면 무인들보다 더 기 싸움이 팽배했다.
크면 크고 적다면 적은 돈들이 각기 걸려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상황일 터.
“이…… 저것들이……!”
“쳇, 자네가 참게. 이미 관례로 굳어진 지 오래거늘 우리 같은 조무래기가 나선다고 뭐가 바뀌겠나?”
그 광경을 고스란히 보고 있던 몇몇 무인들은 자신들을 대놓고 상품성 취급한다며 반발하기도 하였으나, 이미 오래된 관례로써 굳어진 것을 무르라 하는 건 무리였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매번 볼멘소리는 금세 사그라졌고, 곧 대기실의 사방은 조용해졌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이가 있었다.
“주군. 곧 시작입니다.”
뒤에 나타난 호위의 말에 백능이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무림맹 정 중앙, 높은 곳에 위치한 방인 만큼 대회장이 한눈에 들어오는 시야는 그의 답답했던 마음을 뻥 뚫리게 해 줄 만큼 시원했다.
“앞으로 무림을 이끌어 나갈 주역들이 이곳에 얼마나 모였을지 참으로 궁금하지 않느냐.”
“주군…… 너무 큰 기대는 하지 않으시는 게…….”
그의 목소리에 들뜸이 느껴지니, 만류하고 나서려던 참이었다.
하나 선두는 이번에도 백능이다.
“껄껄! 나라고 그걸 모르겠느냐. 그저 마음이 그러하다는 게지. 이번에 송운 그자도 출전 했다 했던가?”
“예, 그러합니다.”
“황궁에 다녀올 줄 알았는데, 대회 참가라니…… 기대가 되는구나. 참으로 기대가 돼.”
실제로 송운이 싸우는 모습은 오룡일봉 외에는 거의 목격한 이가 없는 만큼, 이번 대회는 지켜볼 가치가 충분했다. 그 역시 무인으로서 송운의 무위가 궁금했던 것은 사실이니까.
“그러하지 않느냐? 우승자는 역시 송운이 될 것인지, 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 나타날 것인지. 어느 쪽이건 이번 대회는 제법 즐겁겠구나.”
백능의 입가에 조용히 미소가 걸렸다.
* * *
대회의 시작과 동시에 수많은 관중들의 함성 속에서 무인들은 각자 무공을 펼쳤다.
어떤 이들은 실력을 뽐내려는 듯 화려한 무공을 펼쳤으나, 화려함에 비해 실력은 그리 높지 못했다.
대부분이 일류에서 그칠 정도였다는 말이다.
그 덕에 보는 눈이 즐거운 것은 있으나, 싱겁게 끝나는 경기도 많았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딱히 실망한 것 같이 보이는 관객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더! 더! 더! 밀어붙여라!”
“옳지!”
“일어나! 너한테 건 돈이 얼만데! 이런 염병할! 어억!”
종종 입에 게거품을 물고선 자지러지는 이들이 들것에 실려 나가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경기는 무공이라곤 그저 눈에 보이는 것밖에 모르는 이들에게 충분한 즐거움을 선사했다.
고수들끼리의 경기를 알아볼 이들은 그와 비슷하거나 높은 경지에 이른 무인들뿐이니, 오히려 일반인들에겐 수준이 낮은 것이 더 눈요깃거리가 되는 셈이었다.
그 사실을 증명해 주듯 대회장은 어느새 그 땀과 열기로 후끈하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더불어 천하 무림 대회의 진정한 고수들은 대다수 후반부에 배치되어 있었고, 실제로 참가한 무인들 중에선 예선을 통과해 본선에 이름을 남겼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는 이들도 제법 많았다.
“그럼, 전반부를 마무리 짓겠습니다. 한 식경(食頃)의 시간을 드릴 테니, 그사이에 모든 볼일을 끝마치고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