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어쩐지 사람들 시선이 이쪽으로 쏠리는 것 같죠?”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구려. 그냥 바깥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송운이 제안을 건넸지만 평서란이 고개를 내저었다.
어찌 되었건 평서란은 당금, 황궁의 사신으로 와있는 몸이다.
만일 여기서 식판을 내려두고 나간다면 지켜보는 눈이 많은 만큼 ‘무림맹주가 대접하는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박차고 나갔다.’가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된다면 소문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황궁과 무림맹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얼토당토않은 말이 나돌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소문의 무서운 점이었다.
잘 이용하면 득이지만 삐끗하면 독이 되는 것.
특히나 말하길 좋아하는 호사가들 사이에선 그럴 가능성이 배가 된다.
시기가 시기인 만큼 좋지 않은 소문은 애당초 돌지 않게 하는 것이 옳은 판단일 터.
해서 온몸을 사내들에게 눈요깃거리 당하고 있음에도 불쾌함을 참고 있는 것이리라.
당사자인 평서란이 참고 있기에, 어떻게든 무시하려던 송운의 귓가에 한 무리의 대화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호오? 저기 앉아 있는 여무인, 혹시 그때 그 여무인 아닌가?”
“여 무인이라니?”
“왜 지난번 대회 때 말이야. 외모까지 뛰어나 다들 놀라지 않았는가? 그…… 그래! 천궁여제(天宮女帝) 말이야!”
“오, 자네 말을 들으니 기억이 단박에 나는구먼!”
“이런 이런, 이러니 자네가 아직까지 장가도 못 들고 혼자인 게 아닌가? 쯔쯧. 여인에 대해 이리 기억력이 안 좋아서야. 그 당시에도 참으로 떡잎부터 남다르다 했더니, 역시나 발육상태가 아주 올바르구먼. 낄낄.”
먼저 말을 걸었던 사내는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 혀를 끌끌 차면서도, 점점 노골적으로 평서란을 훑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송운의 눈빛이 점점 더 사나워지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나눈다고 생각하여 들리지 않을 거라 여긴 것인가? ……후우.’
나름대로 속삭이듯 말을 내뱉었을 그 모든 소리가 송운의 귓가에 직접 대고 말하듯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상황은 평서란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을 터다.
제법 큰 식당 안인지라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주변으로 퍼지고 퍼져 많은 이들의 시선이 죄다 평서란에게 꽂히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강호에 아무리 여인이 많다 하여도 세상에 드러난 여 무인을 보는 일은 흔치 않은데다, 황군의 사신이라는 사실에 더더욱 주목을 받은 탓이다. 금상첨화로 실력과 외모 모두 출중하니 평서란의 이름이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것은 순식간이었으리라.
처음으로 강호에 내디딘 발 한걸음이 후기지수에 맞먹는 후광을 얻어온 것이다.
당시 오룡일봉 중 가장 어린 세 명이 빠지고 남은 세 명만이 참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평서란에게 우승 자리를 내어주었다는 것은 무림맹의 입장에서는 꽤나 뼈아픈 기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무림인들은 일반적으로 서로의 본명보다는 별호가 더 익숙하다.
단지 이름이 아니라 그 무인의 무공이라던지, 특징이라던지 다양한 것들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이름만 외우는 것보다야 훨씬 이득이기 때문일 터다.
해서 간혹 그 무인의 성정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어쩌면 이미 생긴 평서란의 별호도 세월이 흐르고 나면 다시 철혈무후로 바뀔지도 모른다.
‘물론 이젠 철혈무후라고 불릴 만큼의 모습이 상상되지는 않지만…….’
잡생각은 길지 않았다.
송운은 자신이 들고 있던 식판을 내려두었다.
곧바로 자리를 잡은 평서란을 향해, 자신의 겉 무복을 벗어 걸쳐주었다.
그 결과 상의가 전부 드러나는 꼴이 되었으나 송운은 스스럼없었다.
평서란 역시도 무복을 입고 있기에 잘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덕분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는지 표정이 제법 좋아짐이 느껴졌다.
“얼른 먹고 나갈까요?”
“그렇게 합시다.”
송운이 고개를 주억였다.
第九章. 준동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 집중에 덕을 본 것은 송하였다.
“우욱! 이런 나쁜 놈들 같으니라고!”
털썩-
송하는 답답하다는 듯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두껍게 걸쳤던 남자 장옷을 벗어 던져 버렸다.
아까 그 번잡스러운 식당 안에는 송하도 있었기에, 모든 상황을 지켜본 것이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그 시선들이 역겨워서 밥이 넘어가질 않아 모두 다 버리고 오는 길이었다.
“변장만 아니었어도 나라도 확 나서서 그놈들 뒤통수라도 갈겨줬을 텐데.”
벌컥벌컥!
두 눈을 부릅뜬 송하는 어지간히 속이 탔는지 곁에 있던 물 한 통을 통째로 입에 들이부었다.
그리고는 몇 번이고 바닥에 발을 동동 구르길 반복했다.
“이런 나쁜 자식들!!!”
마지막으로 크게 허공을 향해 소리를 지른 송하는 그제야 마음이 조금 풀렸는지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꼬르륵-
그와 동시에 송하의 뱃속에서 밥 달라는 신호가 우렁차게 방 안을 울렸다.
“여, 역시 밥은 먹고 나올 걸 그랬나……? 아니야! 정 배고프면 이따 야시장에나 나갔다 오지 뭐…….”
잠시 흔들렸던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돌아누운 그녀의 눈에, 마침 막 벗어놓은 장옷이 비쳤다.
“……그나저나 이거 제법 무거워 보이는데 갑갑하지도 않고 좋단 말이야.”
아무래도 가장 드러나기 쉬운 체구를 조금이라도 감춰보려 특별히 송하에게 세세하게 맞추어 주문 제작한 옷이었다.
통풍과 무게감은 송하가 내기로 떨쳐 낸다고 하여도 옷 자체를 두껍게 만든 탓에 일반 장옷보다 답답할 수밖에 없을 듯한데 신기하게도 그러한 점은 없었다.
결론적으론 크게 차이는 없어 보이긴 했으나…….
설령 답답했다 한들 누구를 원망하랴.
애당초 이 생고생을 사서 한 것은 본인이거늘.
되레 정녕 답답한 것은 인피면구였다.
생각보다 좋은 것은 사실이나 온종일 쓰고 다녀야 하는 만큼 얼굴에 쥐가 날 것 같았다.
‘으, 차라리 처음부터 오빠한테 말을 할 걸 그랬나?’
휙휙.
잠시 곰곰이 생각에 빠진 듯하던 송하의 고개가 빛보다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만일 그리했다면 이렇게까지 자유로운 강호행에 나서지 못했을 터. 필히 송운의 보호를 가장한 감시를 받았을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래. 조금 답답하면 어때? 천하의 큰오빠가 날 가만 놔뒀으려고. 이 정도의 답답함은 그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암! 자유엔 대가가 따르는 법이라고 했어.’
송하는 곧 댓 발 튀어나왔던 입을 집어넣고선 자신의 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얼마 전 상황이 눈앞에 생생히 그려졌다.
“아가씨. 정녕 홀로 가실 겁니까?”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양조광을 향해 한숨을 푹 내쉰 송하가 확고한 눈빛으로 답했다.
“아아, 이러지 마세요. 조광 오라버니. 나 이제 정말 다 큰 성인이래도? 내 친구들의 친구들은 이미 혼인까지……!”
송하는 순간 자신이 내뱉은 말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고 나서야 얼굴이 잘 익은 사과마냥 발개지는 것을 느꼈다.
“아, 어, 저, 그게…… 그, 그렇다는 말이 아니고…… 난 그저…….”
당혹스러움에 마치 지진이라도 난 듯 눈동자가 심히 흔들리는 송하의 모습을 보던 양조광이 입가에 자상한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주억였다.
“압니다. 그만큼 다 컸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싶으셨던 것이죠?”
부드러운 그의 목소리는 송하를 한 번 더 당황하게 했지만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힌 그녀가 하려고 했던 말을 이어나갔다.
“응. 운이 오빠가 없을 때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라는 거 알잖아. 나도 이제 다 컸다고, 어릴 때처럼 오빠가 맹목적으로 지켜줘야 할, 보호해줘야 할 아이가 아니란 말이지. 혼자서도 이렇게 당당하게 세상에 나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단 말이야. ……더 이상 큰오빠한테 짐이 되고 싶지 않아.”
송하는 불과 이곳에 올 때 당시의 일을 떠올렸다.
그 외에도 송운은 늘 가족들을 위해 몸을 내던져왔다. 겉으로 태를 내지 않아도 알게 모르게 무언가 가족을 위해 살아간다는 사실을, 송하를 비롯한 가족들 모두가 알고 있다.
어릴 적 송운이 송하에게 했던 말을 그녀는 잊지 않고 있었다.
“절대 우리 가족이 다치지 않게, 내가 평생 곁에서 지켜줄 것이다.”
그 당시 송하가 본 송운의 눈빛은 굉장히 절절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그래서 더더욱 무공이란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강해져야 그가 짊어질 짐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질 수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맏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송운에게 모든 짐을 떠넘기듯 맡기고 싶지 않았다.
“운 공자님이라면 절대 송하 아가씨를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실 겁니다.”
“나, 나도 알아. 어쨌든 좀 부탁할게. 염치없겠지만…… 지금 이런 거 부탁할 사람이라곤 조광 오라버니밖에 없어. 알지?”
해맑게 웃는 송하의 머리 위에 양조광의 손이 살포시 얹어졌다.
송운처럼 커다랗고 단단하진 않으나 하얗고 기다란 손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아가씨 정말 많이 크셨군요. 준비를 마치면 곧바로 소식을 넣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받아온 것이 제법 긴 여정 길에 필요한 노잣돈과 인피면구, 그리고 조금 전까지 걸치고 있던 겉옷과 이 검이었다.
스르릉.
“……돌아가면 꼭 감사 인사 전해야겠네.”
비록 인피면구를 써 본래의 것은 감춰져 있었으나, 다시 검을 검초에 넣고선 꼭 쥔 채 누운 송하의 눈꺼풀이 어느새 솔솔 감겨오고 있었다.
오늘은 왠지 오랜만에 기분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만 같았다.
* * *
어두침침한 분위기에, 축축한 이끼의 습기로 가득 찬 어느 동굴 안.
허리가 거의 반으로 굽은 늙은 꼽추가 화로에 불을 붙였다.
화륵-!
순간 거대한 불이 치솟았고, 동시에 이미 초점을 잃은 생물체들이 그 빛과 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촤라라락! 철컹!
“크르릉!”
“크아아악!”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사람의 형상을 한 짐승 같은 자들의 울부짖음이 조용하던 동굴을 시끄럽게 울렸다.
철컹 철컹!
계속해서 날뛰는 그들을 향해 늙은 꼽추가 말했다.
“그만! 멈춰라.”
“크르르…….”
늙은 꼽추의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연속해서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부숴버리겠다는 기세로 날뛰던 그들이 잠잠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