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0화
자그마치 삼천 명!
이런 모든 상황을 감안해서 생각한 것보다 약 천 명가량 더 모인 숫자다.
사실 접수를 받는 마지막 날 전까진 예상한 숫자가 맞았다. 한데, 마지막 날 약속이라도 한 듯 급격하게 몰린 것이다. 아마도 허겁지겁 먼 곳에서부터 온 사람들이 서둘러 온 것일 터.
그 덕분에 원래 대진표가 나오려 했던 날짜보다 하루가 더 걸려야만 했다.
그걸 짜야 하는 이들은 밤새도록 종이와 글자와 씨름하며 욕을 퍼부었다는 풍문이 나돌 정도였으니…….
그 사이 자신의 번호를 찾은 송운이 평서란의 말에 빠르게 답했다.
“총군사께서도 매회마다 약 천 명 정도 모였다고 하셨으니 역대 최고가 아니겠소.”
“음…… 정말 오랜만에 열린 대회기도 하니까요. 이런 흉악한 시기에도 이 정도의 수치면 엄청나다고 볼 수 있겠죠.”
그녀의 말에 송운이 고개를 주억인다.
‘그런 만큼 의미는 더욱 깊겠지.’
한데 그보다 더 신기한 일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엔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이 빠졌네요.”
“그러게 말이오.”
‘역시 이번엔 몸을 사리겠다는 것인가.’
어차피 그 중의 대다수가 이, 삼류의 무인들일 것을 참작하더라도 이 정도의 인파가 모였다는 자체가 이미 엄청나다고 볼 수 있다.
송운이 문득 예전 향시를 치를 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신기하게도 이번에 역시 앞자리를 제외하곤 같은 숫자다.
‘이천칠백칠십 번이라…… 그땐 오천칠백칠십 번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느샌가 추억에 잠긴 송운을 일깨운 건 다름 아닌 제갈염이었다.
툭툭.
“자네 여기 있었군. 원체 사람이 많은지라 찾느라 고생했네.”
“아, 총군사님.”
“사람이 너무 많아 한참 헤매었네. 내 정리를 하다 보니 자네 이름이 보이지 뭔가? 사람도 많으니 찾느라 고생하지 말라고 내 직접 번호표를 직접 들고 왔네.”
마침내 찾았다는 반가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며 말하는 그의 안면에 대고 ‘이미 번호를 찾았다.’라고 어찌 말한단 말인가?
그것도 이 수많은 인파를 뚫고 직접 찾아오기까지 했는데 거절하는 것은 그 수고를 수포로 돌리겠다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
‘뭐, 받는 게 어려운 일도 아닌데.’
송운이 제갈염의 내민 손이 슬슬 머쓱해지려던 찰나, 건넨 ‘직접 적은 번호표’를 받아들었다.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닐세. 내가 늘 고마웠지.”
번호표를 받아든 송운을 바라보는 제갈염의 안면에는 진심으로 고맙다는 듯 온화하고 자상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감사합니다. 총군사님.”
송운의 곁에 있던 평서란이 고개를 숙이며 감사의 인사를 전한 것이다. 제갈염은 찰나의 고민도 없이 그녀를 알아봤다.
“음? 이분은 분명 황궁의……?”
“예, 맞습니다. 황궁의 사신으로 온 평서란이라고 합니다.”
순간, 당혹스럽긴 했으나 여기까진 그다지 크게 놀랄 바는 아니었는지 고개를 주억이며 반가운 얼굴을 했다.
한데 당연히 황궁에 속한 사람들이니 반가워 함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긴 하나, 마냥 그렇다고만 보기엔 둘 사이의 분위기가 어째 심상치 않다.
흔히 말하는 친밀도가 남다르게 보인 것이다.
“한데 어찌 이곳에 함께 계십니까?”
“아, 소개가 조금 늦었습니다. 이쪽은 평서란이라고 합니다. 제 부인 될 사람입니다.”
그 말에 어딘지 모르게 그 말에 평서란의 귀가 살짝 붉어지는 것을 송운은 보지 못했다.
그와 동시에 순간 그 말을 들은 제갈염의 눈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지난번부터 시작해서 점점 자신의 정보력이 조금씩 부족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둘이 부부의 연을 맺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설마, 이 둘이 부부의 연을 맺었으리라곤 상상치도 못했구나! 허어…… 양측의 무재가 실로 높으니 황궁의 복이로다. 복이야.’
살짝 혼돈(?)을 마주하고 있던 제갈염에게 먼저 말을 건 것은 평서란이었다.
“여긴 복잡하니 방으로 들어가시는 게 어떠하시겠습니까?”
“아아, 아닙니다. 마음은 감사하나, 저를 찾는 곳이 많아 가봐야 하는지라…… 이리 또 만나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송 소협. 난 이제 또 가봐야 하네. 이제부터 시작이니 앞으로도 내가 할 일이 아주 많거든. 하하! 자네의 마음은 받은 걸로 하도록 하지. 두 사람 참 보기가 좋구먼. 그럼 다음에 보세.”
“예, 그러도록 하시지요.”
그렇게 충격을 안고 돌아가는 제갈염의 뒷모습은 두 사람에 비해 어딘지 모르게 쓸쓸해 보였다.
* * *
타닥.
조용한 어둠 속 유일하게 빛이 새어 들어오는 황금 침상의 자리에 앉아 무료함을 한껏 온몸으로 뽐내던 그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바닥에 바짝 들러붙어 부복(俯伏)한 그는 말을 이었다.
“적(赤). 주군을 뵙습니다.”
자연스럽게 인사를 받아낸 독고백이 손끝을 까딱거리자, 적이라고 자신을 밝힌 이의 입에서 정확한 본론만이 튀어나왔다.
“무림맹에서 천하 무림 대회를 연다 합니다.”
그 말에 독고백의 자세가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세상의 모든 무료함을 모두 몸에 끼얹고 있는 듯했다면 지금은 두 흑색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빛을 낸다고 해도 믿길 정도로 반짝거렸다.
“호오, 드디어 여는 것인가?”
그도 그럴 것이 인생이 늘 무료하고 심심한 그에게는 삼 년에 한 번씩 작은 즐거움을 선사해주던 것이 바로 천하 무림 대회다. 가끔은 실망감을 안겨주기도 하지만 무인들을 한 곳에 몰아놓는 기회가 쉽사리 없다 보니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는 다른 의미로 보물찾기와도 같았다. 한데 지난 몇 해간 여러 가지의 일들이 겹치면서 미루어졌던 것이다.
‘물론 그것들도 모두 즐겁긴 했지만, 쿡쿡.’
하니 그의 입가에 미소가 어리는 것 역시 당연한 것일 터.
“혹…… 이번에도 직접 움직이실 생각이신지요?”
곁에 있던 여인이 건네는 질문은 몹시 조심스러웠다.
홍월림이었다.
이상하게 지난번 같이 동행을 한 뒤로 그는 홍월림에게 지나치게 관대해졌다. 마치 자신이 지금까지 알았던 독고백은 없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는 알 수 없는 자신감이 붙어 이렇게 종종 그에게 질의를 던지곤 했다.
오늘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흐음, 글쎄…… 지켜봐야겠지? 우선은 곧바로 보고 하도록 해.”
“예, 주군. 명 받잡겠습니다.”
* * *
본디 예선은 하루에 끝날 예정이었으나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든 관계로 총 삼 주야에 걸쳐 치르기로 했다.
첫날 예선을 통과한 사람들만 체력을 보충하는 이득을 보는 게 아니냐며 따지는 이들도 있었으나, 소란은 금세 잠잠해졌다.
그게 싫다면 기권을 하면 된다는 답변이 날아온 탓이다.
대부분의 무인들은 이번 대회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포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매번 꼬박꼬박 참여하던 대문파들이 죄다 참여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만으로 참가한 이들의 가슴에 희망의 불을 지피기엔 충분했다.
‘이건 기회다.’
이번 대회라면 자신도 우승자에 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때문에 그들의 운영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눈물을 머금고 ‘그깟 손해 더러워서 조금 보고 만다.’라며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쌓이는 불만 역시 어찌할 수 없는 것뿐이다.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그깟 작은 불평으로 날릴 수는 없었으니까.
하나 이마저도 대회가 시작하고 나니 막상 모두가 축제의 분위기에 취해 불평불만은 언제 있었는지 모르게 눈 녹듯이 사라졌다.
대회 첫째 날.
송운은 가장 마지막 날에 속해 있기에 굳이 나갈 필요는 없었다.
다만, 멀찍이서 출전한 이들의 결투를 지켜봤다.
첫날은 이상하리만큼 무공이 눈에 띄는 이가 없었다.
그날 밤, 대오가 조용히 송운을 찾아왔다.
“……주군을 뵙습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반가워 손을 내민 순간, 대오가 격식을 차리려 하자 송운이 급하게 막아섰다.
“이러지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한번 찾아가려 했습니다. 대체 어찌 된 일인지 궁금하기도 했고요. 생각보다 빨리 와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전서구를 날린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기에 생각보다 빠른 걸음에 조금 놀란 송운이다.
그런 그를 쳐다보는 대오의 얼굴에는 뭔가 아리송한 표정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부끄러운 듯 반가워 보이는 상당히 묘한 분위기였다.
“자, 잘 지내시는 것처럼 보여서 다, 다행입니다.”
간단한 인사를 시작으로 대오의 말이 제법 길어졌다. 송운은 차분한 듯하면서도 느릿느릿 말하는 그의 말을 재촉하지 않았다.
어차피 밤은 길고, 시간은 많으니까.
잠깐의 사담을 뒤로 하고, 대오가 곧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그것이…… 아무래도 들려오는 바로는 암묵적으로 모든 문파가 천하 무림 대회를 찬성하는 대신, 대문파가 참여하지 않는 쪽으로 결론을 내린 것 같습니다.”
“……결국 반대파가 순순히 찬성을 들진 않았다는 얘기군요.”
“아무래도…… 그런 듯합니다. 더불어 이번 거래가 성사되는 데 화산파가 한몫 기여한 모양입니다.”
“……화산파가 말입니까?”
송운은 의외의 이름에 순간 멈칫했다.
‘화산파는 맹주의 세력에 속한 문파가 아닌가. 한데 대체 왜……?’
그가 조용히 고개를 주억이자 의문을 품은 송운이 되물었다.
“연유가 뭐라 합니까?”
“그, 그것이…… 그쪽은 워낙 철통 방어인지라, 더, 더 이상 세세하게 팔 수가 없었습니다. 제 능력의 한계입니다. 요, 용서하십시오, 주군.”
“아닙니다. 구파일방을 상대로 이 정도만 알아내도 엄청난 발전입니다. 그러지 마세요.”
송운은 대오의 어깨를 잡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실제로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그사이 더욱 큰 발전을 이룩해 낸 것이다.
대오를 다시 앉힌 후, 송운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설령 곽 소협과 뭔가 연관이 있는 것인가?’
하나 그는 곧 잠시 고민을 접어 두기로 마음먹었다.
이 정도 정보로는 섣불리 이야기를 꺼냈다가 뭔가 켕기는 것이 있다면 오히려 더욱 움츠러들 터.
‘아무래도 정보가 좀 더 필요하긴 하겠군.’
몇 번의 질의와 답이 오고 간 후, 대오는 처음 이곳에 당도했을 때와 같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렇게 첫날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