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늘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것도 아닌 주제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송운은 잠시 뒤로 잊고 있던 미안함이 마음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목울대를 타고 씁쓸함이 역류하는 것만 같다.
차마 그 감정을 다시 삼키지 못한 송운이 그것을 토해내려던 그때.
“미안…….”
“거기까지. 사과는 더 이상 받기 싫어요. 앞으로 우리에겐 더 많은 시간이 있고, 운 가가는 앞으로 더 많은 일을 함께해야 할 거예요. 설마 그때마다 계속 사과만 내미실 건 아니겠죠?”
평서란이 그의 다음 말을 막아섰다.
송운이 그녀의 얼굴을, 입술을, 코를, 눈을, 차근차근 눈에 담았다.
한참 동안 자신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빤히 마주하고 있는 평서란을 다시 바라보니, 유달리 입술이 발갛다.
“그럼 사과 대신…… 이것은 될까?”
점점 송운이 그녀를 향해 가까워지면서 누구 것인지 모를 달뜬 숨결이 서로의 콧잔등을 간질였다.
마치 원래 하나였다는 듯, 서로가 서로를 감싸 안았다.
하늘에 뜬 달이 구름에 가려 하나로 포개어졌다.
그렇게 밤은 점점 깊어 가고 있었다.
* * *
무림맹이 천하 무림 대회로 정신이 없을 무렵.
그 소식은 퍼지고 퍼져 구천악의 귓가에도 닿았다.
챙그랑-!
그의 손에 잘 들려 있던 술잔이 산산조각이 난 채로 바닥에 나동그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로 인해 사방으로 퍼진 날카로운 조각들이 공간을 낮고 차게 울린다.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이 늙은이는?”
치욕스러움을 무릅쓰고 맺은 동맹이다.
한데, 조용히 내부의 힘을 기르기에도 바쁠 시기에 천하 무림 대회라니!
구천악의 입장에서는 어이를 상실하다 못해 화가 나서 펄쩍 뛰고도 남을 일이었다.
‘여태껏 미뤄 놓고 갑자기 왜? 놈들이 언제 어떻게 들이닥칠지도 모르는데, 천하 무림 대회를 열겠다고? 이 늙은이가 드디어 노망이 났나!’
그런 구천악의 모습에, 마치 준비했다는 듯 전언자가 말을 꺼냈다.
“그, 그것이 중원 각지에서 실력에 비해 알려지지 않은 무인들을 한자리에 모으겠다는 취지라고 합니다, 주군.”
“내가 그걸 몰라?! 그걸 하겠다고 한 놈이나 한다고 찬성하는 놈들이나……. 허, 정파 놈들은 예나 지금이나 마음에 들질 않아. 제길.”
찰랑.
그는 부서질 듯 또 다른 잔을 집어 들었다.
술잔에 가득 찬 술이 위태위태해 보이는 만큼 그의 심경 역시 이성과 분노를 오가고 있었다.
차라리 한때 이름을 날리다 은거에 들어간 고수들을 수소문하는 편이 더 낫다 싶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으득.
구천악의 이가 부서질 듯 갈렸다.
이가 절로 갈리도록 신경을 긁는 일이나, 지금은 그런 것을 재고 따질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교는 작금 힘이 부칠 대로 부쳐 있는 상황.
이러한 시국에 혈교가 들이닥친다면 대책이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은 참아야 한다.
그토록 증오하는 정파와 손을 잡은 이유는 단 하나.
당장 눈앞의 적을 하나라도 줄이기 위한 방도일 뿐이었다. 최대한 많은 전력을 그러모아야 하는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백능도 그것을 알기에 그곳까지 나온 것이리라.
하나 그러면서도 역시 정파와 완벽하게 믿을 생각은 없다.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는 관계.
끝까지 정파 놈들과 손을 잡고 갈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것이 정파와 마교의 동맹의 전부였다.
구천악은 얼마 전에 마주해야만 했던 백능의 얼굴을 떠올렸다.
부르르!
어찌나 능구렁이같이 구는지 하마터면 동맹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치우고 성질대로 나올 뻔했지 않은가.
‘……생각만 해도 끔찍하군.’
그와 동시에 문득 몇 해 전 있었던 무황비고 사건을 떠올렸다.
구천악을 바라보던 마왕들의 눈에 좀 전과는 달리 자연스럽게 그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때 그 빌어먹을 비고만 아니었어도……!’
유명무실(有名無實).
그야말로 무황비고는 유명무실 그 자체였다.
그만큼 당시에 입은 손실이 너무도 컸다.
잃은 건 많은데 얻은 건 단 하나도 없었다.
작금, 마왕 자리를 꿰차고 있는 놈들이라고 해 봤자 그때 잃어버린 마왕들에 비하면 성에 차지 않았다.
벌써 몇 해가 지난 일이지만 그래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거리고 배알이 꼴려 오는 그였다.
그 상황이 여전히 나아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그의 화를 부추겼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이제 전 중원이 노리는 공공의 적은 ‘마교’가 아닌 ‘혈교’라는 사실이었다.
공공의 적이 있는 이상 서로의 피를 볼 만한 일은 만들지 않을 터.
‘큭, 그 일만 없었다면 내가 이 더러운 족속들과 손을 잡았을 일도 없었을 터인데.’
그는 최대한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이미 화풀이 대상은 죽어 버렸다.
맨 처음 그 소식을 들고 온 이는 처형당해 이승에서 발을 뗀 지 오래다.
아무리 그가 이성을 잘 붙들어 맨다고 하나, 그런 지대한 실수를 한 이를 살려 둘 리 없었다. 본보기를 할 이가 필요했던 탓도 있었다.
그렇게 잊을 만하면 눈앞에 떠오르는 분함에 속이 타 재차 술잔에 손을 가져다 대려던 찰나.
침묵을 깨뜨린 이가 있었다.
공안 마왕이 죽고 공석이 된 자리에 더 이상 비워 놓을 수 없어 올려놓은 헐천마왕(蠍天魔王)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동맹은 정말 치욕적입니다.”
조용히 흘러나온 말 한마디는 가뜩이나 열이 올라있는 구천악의 마음속 장작에 불을 지피는 데에는 충분했다.
‘……저런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타 마왕들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뭐라?”
반면 구천악의 음성은 좀 전보다 되레 차분해져 있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런 중요한 시기에 똥오줌 못 가리고 쓸데없는 일이나 벌이고 있는 놈들하고 동맹을 맺는다 한들 뭐가 바뀐단 말입니까?”
파사삭-
그 소리에 화가 난 것인지 첫 번째 술잔에 이어, 두 번째 술잔이 손에서 가루가 되는 소리가 살벌하게 교전을 울렸다. 그럼에도 그의 손에서 흘러내리는 것은 피가 아닌 오롯이 술뿐이었다.
‘허……! 언제부터 이 마교가 이 지경 이 꼴이 되었단 말이냐!? 제기랄!’
구천악은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는 것과도 같은 느낌에 머리가 핑 돌자, 두 눈을 아예 질끈 감아 내렸다. 순간 그의 크고 단단한 육신이 찰나의 순간이나마 휘청거릴 정도로 말이다.
본디 마교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충성심이 강력하던 집단이다.
오로지 힘을 숭상하는 자들이라 더더욱 그랬다.
천마가 명한다면 멀쩡하던 이도 그 자리에서 자결할 만큼 지독하다. 더불어 구천악이 천마의 자리에 막 올랐을 무렵엔 충성심과 자부심이 최고치에 달해있을 시절이었다.
한데, 계속되는 몰락의 길을 걷다 보니 이젠 그마저도 슬슬 미비해지고 있다.
아니, 거의 과거의 일이 되어가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최근 들어 튀어나오는 입김은 무어라 설명할 방도가 없지 않은가.
강자존.
마교는 믿음 또한 중요하나 힘이 곧 권력이 된다는 신념이 가장 진하게 깔려 있는 집단이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자신의 뒤를 칠지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본인도 모르는 새 점점 초조해지고 있었다.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여기서 무너질까.’
어떻게 지켜 내 올라온 자리던가.
구천악은 그의 마지막 남은 이성을 붙들어 매며 힘겹게 첫 운을 뗐다.
“이…… 멍청한 놈 같으니라고.”
“……?”
갑자기 밑도 끝도 없는 그의 발언에 당혹스러움을 내뱉은 것도 잠시.
곧 그의 독설이 살기와 함께 화살이 되어 날아왔다.
“지금 우리 상태의 전력으로 될 것 같으냐? 어림도 없는 소리지. 네놈들이 마왕의 자리까지 올라왔다고 기고만장해 있나 보구나. 하나! 자리가 비었으니 어쩔 수 없이 끌어올린 것뿐. 본디 네놈들의 자리가 아니라는 건 스스로가 더 잘 알 터! 그렇지 않았다면 그 자리조차 언감생심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겠지?”
으르렁거리는 그의 말속에 담긴 어마어마한 살기를 모두 몸으로 받아낸 헐천마왕의 몸이 자동으로 수그러들었다.
아무리 신경이 쇠약했다고 하나 구천악은 스스로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온몸으로 새겨준 것이다.
만일 그들이 무를 익히지 않았거나, 구천악이 이성으로 화를 짓누르지 않았다면 큰 내상을 입을 만큼의 내기였다.
그 여파가 주변에 미친 것은 당연한 일.
분위기는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쿵-!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주군! 부디 용서를……!”
쿵-! 쿵-!
살얼음을 걷는 듯한 분위기에 다들 머리를 땅에 조아리자, 구천악이 됐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닥쳐라! 보기 싫으니 모두 물러가라!”
그러자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마냥 모두가 파도처럼 우르르 교전을 빠져나간다. 만일 지금의 시국을 전대 천마가 보았다면 감았던 눈을 다시 뜨고 일어나 마교를 모두 박살을 내놓았을지도 모른다.
구천악의 입에서 깊고 묵직한 한숨이 절로 흘러나와 공허해진 교전을 적셨다.
“……이런 우라질.”
第八章. 드디어 시작
그로부터 삼 주야 뒤.
드디어 모두가 학수고대하던 대진표가 나왔다.
그 소식에 송운 역시 확인하기 위해 곧바로 무림맹 중앙 광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한데, 란 매. 황궁으로 돌아가 봐야 하지 않겠소?”
“안 그래도 이미 사람을 통해 서신을 보내두었죠.”
“황제께서 직접 찾으시진 않으셨고?”
그의 말에 평서란이 고개를 주억였다.
“이곳에 남아서 지속적으로 정보를 황궁으로 보내 달라고 하셨어요. 그러니 우리 그러한 걱정은 접어두시고 번호표 찾을 걱정이나 해 볼까요?”
송운이 그녀의 말에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두런두런 이야기하다 보니 어느새, 광장에 다다른 것이다. 생각보다 쉽게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 많은 출전자들이 한꺼번에 달려 나온 탓이다.
웅성웅성.
“와……! 눈으로 보니 훨씬 더 어마어마하네요? 지난번 대회보다 배는 더 몰린 거 같아요.”
대진표에 있을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기 바쁜 송운을 대신해서 평서란이 먼저 탄성을 내질렀다. 어지간해선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꽤나 큰 감탄사라고 볼 수 있다.
솔직히 무림맹 측에서도 몇 년을 미룬 대회라지만 이 정도로 많은 인파가 몰릴 줄은 예상 밖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