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송운이 사천성에 있으니 조우할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빠르게 마주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도 아니라면 모른 척한 것인지 방금 전 상황에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 듯싶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좋게 생각해. 그렇지 않으면 벌써 쫓아왔을 거야. 인파가 워낙 많은 탓에 알아보기 힘들었을걸? 그래. 송하야, 진정하자.’
간신히 두근대는 심장을 가라앉힌 송하가 깊은숨을 내쉬었다.
“후우……!”
그 자리에 주저앉았던 그녀는 좀 전과는 다르게 소리 없이 어딘가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 * *
한차례 무림맹에게 갈등을 안겨 주었던 무림 대회의 준비가 막바지를 향해 달려 나가고 있었다.
그걸 지켜보는 입장인 송운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보름 만에 무림맹 내부에는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음식 재료가 모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무인들은 또 어디서 소문을 그리 들었는지 모인 이들의 숫자가 제법이었다.
정식으로 대회가 개막하는 것은 칠 주야 후지만, 너무 오랜만에 열린 소식에 다들 한달음에 달려온 듯했다.
덕분에 이득을 본 것은 상인들이다.
무림맹에 필요한 물품을 대는 것도 대는 거지만, 며칠 전에 보았듯 저잣거리에서도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송운 역시도 일전의 말을 전해 준 제갈염과 그것을 수락한 백능 덕분에 운양상단이 무림맹에 물자를 댈 수 있었고, 제법 큰 금액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또한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 계속해서 이 줄은 연결될 것이다.
‘이미 내가 돕지 않아도 잘하고 있었지만, 이번 일로 큰 이득을 봤을 터.’
운양상단이 송운의 지지대 중 하나이긴 하나, 자신보단 양조광이 기뻐할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라 즐거웠다.
실제로 그는 송운에게 또 한 번 큰 은공을 받았다며 기뻐했다고 들었다.
“이제야 정말 실감이 나는구려.”
“그러게 말이에요.”
송운의 말에 평서란이 웃으며 답한다.
그녀는 지금 이 풍경이 어색하지 않았다.
그건 송운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얼마 만의 천하 무림 대회인지…….”
송운이 내뱉은 얼마 만인지라는 말은 누가 들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기에 그저 물 흐르듯 스쳐 지나갔다.
‘오랜만이군.’
송운은 아주 먼 과거로부터 이 천하 무림 대회에 참가한 적이 있다.
처음엔 치기 어린 마음에 무공을 익혔으니 자신의 실력을 뽐내 보고 싶었다.
‘새로운 것을 배웠으니 써먹어 보고 싶고, 겨뤄 보고 싶었던 게지.’
그 아련한 기억에 송운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물론 그때는 이제 막 강호에 한 발짝 발을 내디딘 삼류였다.
게다가 그저 운 좋게 동굴에 버려진 듯 보이는 무공서를 얻은 것뿐.
그런 송운에게 스승이 있을 리 만무했고, 설상가상 송운은 애당초 학사 가문의 자식이다.
보물을 손에 쥐어 놓고도 스스로 익히는 데 오랜 시간을 공들여야 했다.
해서 참패했다.
예선조차 뚫지 못했다.
그 뒤로 실력을 더욱 갈고닦아 한 번 더 도전장을 내밀었다.
이번엔 순수하게 스스로 익힌 무의 수준이 어디까지 닿았는가를 알고 싶은 마음이었다.
끝내 그가 도달한 곳은 준준결승전이었다.
‘그땐 결국 결승전까진 끝끝내 발조차 담가 보지 못했지.’
하나 그것만으로도 기뻤다.
어차피 무림 대회의 결승전이라는 게 결국 있는 집안 놈들 싸움이었다.
오히려 그가 이룩한 성과는 가히 기적에 가까웠다.
그 이후 한동안 송운은 자부심이 커져 있었다.
‘결국 그것은 보잘것없는 것이었지만 말이지.’
그때였다.
“……가가?”
한참을 홀로 추억을 회상하던 송운의 귓가에 평서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 미안하오. 잠시 생각에 잠겨…… 요즘 이런 일이 잦구려. 정말 미안하오.”
당혹스러운 듯 보이는 송운의 모습에 평서란은 되레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 괜찮아요. 사실…… 운 가가는 생각보다 자주 그러신다고요. 그보다 가가께서는 이번 천하 무림 대회에 참가하지 않으실 건가요? 몇 년 만에 온 기회잖아요.”
기회.
무림맹에서 주최하는 천하 무림 대회인 만큼 전 강호에 출사표를 던지는 것과 같은 일이다.
상위권에 속할수록 많은 이들이 알아본다. 그래서 더 많은 무인들이 대회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하나, 송운이 아무 말 없이 빤히 쳐다만 보고 있자 민망했는지 평소의 평서란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아, 음…… 뭐, 이게 굳이 아니더라도 운 가가의 이름은 이미 꽤 멀리 퍼져 있을 테지만 말이에요.”
그런 그녀의 귀여운 모습이 꽤 사랑스러웠는지 송운이 평서란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그렇지 않아도 고민 중인 차였소. 란 매는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 이번 우승자에겐 특별히 맹주께서 무림맹 무기고에 있는 비익검(比翼劍)을 하사한다고 하던데.”
그 말에 평서란이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세상에…… 그 비검과 익검 말인가요?”
송운의 고개가 조용히 주억인다.
비검, 익검.
하나는 길이가 짧고, 다른 하나는 길이가 길다.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듯 이것은 암수 한 쌍으로 만들어진 쌍검이었다.
이 검을 사용한 이는 쌍검의 대가(大家)로 불렸던 비익쌍검(比翼雙劍) 천월주(千越主)로서 자신의 명을 다하기 전, 친우였던 전 무림맹주에게 검을 맡겼다고 한다.
비록 무림의 구대보화(九代寶貨)에 들어갈 정도는 아니었으나, 무림에서 제법 알아주는 명장이 만든 명검이자, 이제는 전설로 남은 쌍검의 대가가 사용했던 검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할진대, 이 비익쌍검을 완벽하게 다룬다면 일류 무인을 절정까지도 끌어올려 줄 수 있다고 한다.
그 값어치가 결코 가볍다고 볼 수는 없는 보물이었다.
“그런 검이라면 굳이 쌍검을 다루지 않는 이라도 탐을 낼 만하겠네요.”
“그렇소. 검을 쓰지 않고 팔아도 이문이 엄청 남는 장사일 테니.”
“흐음…… 이문이요? 그럼 운 가가도 검이 탐이 나시는 건가요?”
“허어, 그럴 리가. 내겐 이미 란 매가 준 검이 있지 않소?”
병기가 탐이 나는 건 아니다.
송운은 쌍검에 그다지 미련이 없었다.
아니, 그의 무공은 애당초 무기를 사용하지 않을뿐더러, 이미 평서란이 선물해 준 검이 있다.
더 많은 무기는 필요치 않았다.
물론 그것을 양조광에게 넘긴다면 운양상단은 엄청난 이익을 손에 쥐게 되겠지만, 그것 역시 그가 무림 대회를 신경 쓰는 주된 목적은 될 수 없었다.
‘그저 많은 무인들과 검을 나누고 싶은 것뿐이나…….’
송운이 망설이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이미 대내외적으로 제법 많은 공적을 세운 송운이 끼어드는 순간 혹여나 불공평한 평가가 나오지는 않을까, 더 앞으로 나아가야 할 젊은 무인들에게 폐를 끼치는 건 아닐지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도 과거 천하 무림 대회에 참가했을 때, 패기 넘치던 모습에서 주춤했었기에 고심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일전에 제갈염이 찾아와 이번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으면 한다는 의중이 비쳤던 적도 있었다.
물론, 그는 대회를 개최하는 과정에 대해 말한 것이었지 대회 자체에 참여를 말아 달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
하니 그것은 딱히 문제 될 것은 없다.
여러모로 갈팡질팡하는 송운의 마음을 평서란은 단박에 간파해 냈다.
그를 오랫동안 곁에서 지켜본 것은 아니나, 자신이 아는 송운이라면 그러할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한 것은 왠지 모르게 송운을 놀리고 싶다는 생각일 뿐.
야속해서가 아니다.
그냥 정말이지, 그의 그런 모습을 보고 싶었다.
‘후후,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단 말이지.’
그러나 그녀의 놀림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는 점점 마음을 접으려고 하는 것이 보이는 송운을 향해 토닥이듯 말을 건넸다.
“나가보시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되겠죠? 어차피 이미 오랜 세월 힘 있는 세가와 문파들이 쟁쟁히 참여한 대회인걸요.”
그 말에 송운의 숙이고 있던 고개가 슬며시 하늘을 향한다.
“크흠, 란 매도 그렇게 생각하오?”
“못할 건 또 뭐 있나요. 이번 기회에 세간에 소문만 무성하던 운 가가의 실력을 보여 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한동안 모든 게 거짓이라며 외치고 다니던 이들의 말을 잠재울 수 있겠죠.”
맞는 말이기도 했다.
무림에는 소문을 믿는 이들도 있었으나, 여전히 송운의 일화에 의문과 의구심을 잔뜩 품고 있는 자들 역시 널려있었기 때문이다.
그 말에 동의하는 듯 송운이 고개를 주억이자, 평서란은 묘한 마음이 들었는지 말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그리고 혹시 아나요. 운 가가보다 더 대단한 실력을 지닌 이가 나올지?”
“음…… 란 매도 혹여 나갈 생각은 없소?”
“전 이미 지난번 천하 무림 대회에서 우승한 전적이 있는걸요. 그땐 황궁 무인의 저력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기도 했구요. 비록 황궁과 무림이 별개로 나뉜 채 살아가고는 있으나, 앞으로도 지금처럼 언제든지 생길지 모르는 서로의 동맹 관계를 생각한다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죠. 더구나 당시 황제께서 원하시는 일이었거든요.”
본인의 말대로 평서란은 이미 오 년 전 마지막 천하 무림 대회에서 최연소로 우승을 거머쥔 여인으로 이름을 알린 적이 있다.
단지 송운이 정신없이 떠돈 탓에 몰랐던 것뿐.
“……그랬소?”
“아, 오해하실까 드리는 말씀이지만 설혹 그러지 않았다고 한들, 운 가가와 함께 검을 맞대고 싶진 않네요.”
평서란의 말이 끝나자 송운이 그건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어안이 벙벙하게 변했다.
반면 평서란은 그런 그의 반응과 대조될 만큼 연신 미소를 지었다.
‘생각해 보면 란 매가 출전하지 못하리란 법도 없지 않나?’
사실 깊게 생각해 볼 것도 없다.
그녀가 황궁의 사람이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무인이 아닌 것은 아니다. 천하 무림 대회는 중원에 속한 무인이라면 누구든지 참여할 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보니 딱히 생각해 볼 것도 없다.
자신도 이렇게 나가고 싶은 욕망이 불타오르는데, 평서란이라고 달랐을까?
누구보다도 무에 욕심이 강한 여인이?
더구나 황제의 명을 받은 일이다.
거절했을 가능성은?
단호하게 송운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그럴 리 절대 만무하지. 나는 정말…… 란 매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