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완전히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면 거짓 아니겠습니까. 자칫 그들이 무슨 꼼수를 부릴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껄껄! 오늘따라 네가 말이 많아진 것을 보니 진심으로 걱정이 되긴 하는가 보구나. 하나, 언제까지고 눈치를 보고만 있어서는 바뀌는 것이 없을 게야. 나는 옛날의 참사를 다시 겪고, 반복하고 싶지 않을 뿐이니…… 게다가 지금은 놈들로 인해 무인들이 평소보다 더 많은 인원이 경계 중이거늘 무슨 일이 날까.”
그 말을 내뱉는 백발의 사내를 바라보던 젊은 청년의 눈빛엔 걱정이 가득했다.
가뜩이나 깊게 파인 그의 주름이 더욱 깊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주군.”
“또한 이리 든든한 호위무사를 두었는데 두려울 것이 무에 있겠느냐?”
쿵-! 쿵-!
그 말에 청년이 성급히 머리를 땅에 박으며 외쳤다.
“주군! 당치 않으신 말씀이십니다. 아니, 소인은 사실 주군의 호위무사라는 이름을 달기엔 너무도 부족한 실력입니다. 그 말씀을 거둬 주십시오.”
“어허허! 이거 참…… 어깨에 잔뜩 긴장이 들어가긴 했구먼.”
백발의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금 이렇게 무방비로 나오신 것을 알면 몇몇 장로들이 또 난리가 날 겁니다.”
“맹주라는 자리는 참 이래저래 힘이 들어. 이래서 내 맡지 않으려 했던 것인데…… 한두 해 겪어 보는 건 아니다마는 어디 한번 나가려면 호위들을 줄줄이 달고 나가야 하니……. 끌끌, 빛 좋은 개살구인 게야. 결국 나를 감시하려고 붙여 놓은 것 아니더냐? 그래도 이리 오랜만에 너와 단둘이 바깥바람을 쐬니 기분은 참 좋구나.”
“…….”
주군의 말에 끝내 호위무사는 입을 다물었다.
‘……답답하실 테지.’
제법 오랜 시간을 그의 곁을 지켰다.
어릴 적, 참혹하게 가족을 모두 잃은 힘없는 어린아이였던 그에게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 준 이가 바로 백능이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는 자신을 먹이고, 재워 주고, 키워 주어 지금의 자신이 되었다.
그 시절에도 백능의 머리 절반이 백발이었다.
그가 견딘 세월에 비하면 살아온 날이 절반도 미치지 않지만, 곁에서 보고 들으며 지낸 세월이 얼마인가?
자그마치 삼십 년이다.
강산이 변해도 세 번은 변했을 시간.
그 심경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작금 무림맹은 맹주가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그게 비록 서안이라고 할지언정, 보호를 명분 삼아 그를 무림맹이라는 성안에 가두려는 것이다.
그렇다고 맹주의 실력이 모자란 것은 결코 아니다.
아무리 그들이 멋대로 휘두르려 한다고 해도, 백능은 맹주이기 전에 무인이었다.
백능도 젊은 시절 무림을 호령하고 다녔다.
그것도 격정의 시대를 걸쳐 실력으로 살아남은 당대 최고의 무인!
하나 맹주의 목숨은 결코 그 자신만의 것이 아니다.
숫자 앞에 장사 없다고, 혹여나 다수에 의해 암살이라도 당하는 날엔?
무림맹의 위신이 땅에 떨어질 것은 뻔하다.
올라가는 길은 험난하나 떨어지는 길은 쉽다.
그리된다면 혹여나 다른 이들이 그 자리를 꿰차게 된다 한들, 잃어버린 명성을 되찾기 위해 다시 쌓아 올려야 한다.
그것이 귀찮고 두려운 것일 터.
그 점은 황제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사는 곳은 다르다 해도 황제도 결국 거꾸로 뒤집어 본다면 황궁에 갇혀 사는 신세가 아니던가?
언제부턴가 황궁은 황권이 강화되어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이들의 기세가 줄어들었다고 하나, 언제 또 물어뜯으려 들지 모르는 것이다.
‘후, 무림이나 황궁이나 다들 그런 자리가 대체 무엇이 그리 좋다고 달려드는 건지…….’
그가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쉴 무렵, 백능이 입을 뗐다.
“그러니 호(浩)야, 너는 다른 걱정은 말거라.”
호라고 불린 호위무사는 언제 다른 생각을 했느냔 듯이 빠르게 답했다.
“예, 알겠습니다. 주군.”
그는 좀 전과는 다르게 순순히 수긍했다.
평생을 그에게 바친 자신이 백능의 말에 토를 다는 것도 조금은 웃긴 이야기였다.
그에게 백능은 주군이며, 동시에 아버지이자,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저 자신은 그를 믿고 따르면 되는 것이다.
“껄껄! 내 이래서 네가 좋다. 과연 믿음직해. 이만 돌아가자꾸나. 더 시간을 끌었다가는 네 말대로 장로들이 나를 찾을 터이니 네 입장이 곤란해질까 걱정이 되는구나.”
파밧-!
그 말에 조금 전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두 명의 형체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그 시각, 송운과 평서란 역시 그 저잣거리에 함께 있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판이 크게 열린 덕에 구경거리도 제법 많았다.
“자자, 골라 보십시오! 예쁜 물건이 아주 많습니다!”
“아이고! 거기 훤칠한 공자님! 공자님 곁에 계신 분께 선물을 드리시는 게 어떻습니까요?”
제 발로 걷는지 떠밀리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이곳에서 평서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이렇게 거닐고 있으니 옛 생각이 나네요.”
“옛 생각?”
송운이 되물었다.
“네. 예전에도 우리 북경에서 이리 둘이 구경을 나선 적이 있었죠. 물론 그때 사 주신 장신구도 아직 잘 가지고 있어요.”
말 끝나기 무섭게 평서란이 자신의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순간 번쩍 빛이 나는 것이 그때 송운이 선물했던 그 장신구였다.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빛이 전혀 변색되지 않았구려.”
“그렇죠? 제가 그만큼 제가 관리를 철저히 했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평서란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사람이 이리 아름다워도 되는 건가?’
송운은 새삼스레 느끼는 감정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였다.
“반짝거리는 것이 란 매를 닮아 참 아름답구려.”
“어머, 과찬이세요. 세월이 흘러도 이 아이는 그대로겠죠. 그리고…… 전 시간이 흐를수록 나이를 먹을 거예요.”
평서란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란 매 역시 무인이기 전에 여인인 건가?’
송운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란 매가 아무리 나이를 먹는다고 할지언정 이 장신구보다 못할 리 없소. 아니, 애당초 저런 장신구 따위와 비교할 수 없지. 세월이 아무리 흐른다 해도 내 눈에는 란 매가 가장 아름답소.”
그의 말에 조금 전까진 묘했던 평서란의 얼굴이 밝아졌다. 만일 그게 입에 발린 말이라고 해도 송운이 한 말이기에 기분이 좋아진 것이다.
“후후, 입술에 침은 바르셨어요? 남들이 들으면 욕할지도 몰라요, 운 가가.”
송운과 평서란 둘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을 무렵.
휙―.
누군가가 빠르게 그 둘을 스쳐 지나갔다.
퍽!
“……아, 죄송합니다.”
정확하게는 송운의 어깨를 스친 누군가가 빠르게 사과를 건네었고,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자취를 감췄다.
낮지만 낮은 것 같지 않은 음성, 향, 기운 그 모든 것이.
“……익숙한데.”
“가가! 괜찮으세요?”
평서란이 우선 그의 어깨부터 살폈다. 반면 송운은 태연하게 어깨를 털어 냈다.
“이 정도쯤은 거뜬하오. 란 매는 괜찮소?”
“저야말로 괜찮아요.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제법 세게 부딪힌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갈 길이 매우 급했나 보오.”
문득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하나의 이름.
‘설마 이곳에……?’
송운은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간 데다가 복면까지 쓰고 있어 얼굴 확인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다시 붙잡기에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
평서란은 송운의 신변에 온 신경을 뺏긴 듯 보였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해 볼까?’
송운의 고개가 다시 한번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에 쥐새끼 한 마리 끼어들 틈조차 없어 보이는 인파. 거기에 여기저기 빽빽이 불을 밝힌 상점들이 다시 한번 송운의 두 눈에 들어왔다.
저 많은 인파 속으로 뛰어들어 찾기에는 타인에게 피해가 갈지도 몰랐다.
게다가 자신의 옆에는 평서란이 함께 있질 않은가.
곧 그 사실을 일깨워 주려는 듯 평서란의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울렸다.
“가가?”
“아, 미안하오. 이만 갑시다.”
곧, 송운이 찜찜함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 * *
사람들로 북적이는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한적한 길가.
그곳에 도착한 한 인영이 자리를 잡고선 연신 가쁜 숨을 들이쉬었다.
“후우…… 후우……!”
두근, 두근!
심장이 빠르게 뛰고 귓불이 발개졌다.
단지 뜀박질을 해서만은 아닐 터.
거기에 커다랗게 뜬 두 눈은 조금 전까지의 긴박한 상황을 몸소 표현하고 있었다.
이내 숨쉬기가 벅찬지 얼굴의 절반을 넘게 가리고 있던 복면을 벗었다.
드러난 건 사내의 얼굴이었다.
하나…….
‘분명, 분명히 오빠였어.’
겉모습을 인피면구로 감춘 송운의 여동생 송하였다.
‘들키진 않았겠지?’
숨은 고르게 돌아왔으나, 놀란 가슴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는지 아직도 마구잡이로 뛰고 있는 심장을 부여잡고 있는 그녀였다.
무림맹에 있다고 하였으니 당연히 한 번쯤은 마주칠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으나, 이렇게 빨리 마주할 줄이야!
게다가 그의 곁에는 뜻밖에도 평서란도 함께였다.
‘윽, 내 실수야. 이 바보!’
너무 많은 인파에 거의 파묻히다시피 걸어가던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사람이 많을 거라곤 예상했으나, 설마하니 평소의 북경보다도 더 많을 줄이야!
한 장소에 사람들의 밀집도가 높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벌어진 현상이긴 했다. 해서 겨우 길이 트이자 빠르게 벗어나려고 했을 뿐이었는데, 그게 이 사달이 난 것이다.
‘차라리 초행길이 아니었다면 이 정도까진 아니었을 텐데. 하아…… 최대한 변복하고, 기운을 완전히 감추었으니 모르겠지? 오빠에겐 최대한 늦게 알리고 싶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들키긴 싫어.’
그녀가 여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언제까지고 숨길 수 없다는 건 송하 본인이 더 잘 알고 있다.
송하 역시 절정의 경지에 오르고 나니 조금씩 몰랐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무공의 경지가 올라갈수록 상대를 알아보는 데 수월해진다는 것을 알기에, 아무리 변복을 한다고 해도 자신을 본다면 알아챌 것이란 걸 알고 있다.
그녀의 목적은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무사히 천하 무림 대회에 참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