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6화
단 한 번도 여자를 울려 본 적도 없는 그였다. 애당초 여자에 대해 관심조차 없었고, 인연을 잇지 않으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대상이 평서란이라고 생각하니 더더욱 미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매번 기다리게 하고 걱정이나 끼치는 못난 남편이구려. 이런 내가 싫다면…… 나를 떠나도 좋소.”
휙-!
“뭐예요?”
그 말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흘러나오던 눈물이 쏙 들어간 평서란이 도끼눈을 한 채 송운을 쳐다보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살벌하게 노려봤다.
그러곤 외쳤다.
“절대! 절대,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 * *
휘잉-
바람이 을씨년스럽게 불어왔다.
아니, 정확하게는 물리적인 바람이 아니라 송운의 마음속에 바람이 몰아쳤다.
“……크흠.”
“왜요? 어디 불편하세요?”
그의 헛기침 소리에 평서란이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눈빛으로 송운에게 물어 왔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미소와 그 목소리가 어찌나 사근사근한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평온을 끌어온 듯하였다.
물론 당장의 송운에게는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기분일 테지만…….
하나 별수 있으랴?
자신이 지은 죄, 달게 받아야지.
‘그 와중에도 란 매는 예쁘구나. 아니, 너무 당연한 것인가?’
사내와 여인이 연정을 서로 품는 것.
송운은 마음속으로 떠오르는 생각에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이제야 조금은 아버지가 어머니께 간혹 꼼짝 못 하는 연유를 알기도 할 것 같았다.
이내 송운이 입을 열었다.
좀 전과는 달리 사뭇 진지한 표정과 목소리였다.
“지금 북경은 어찌 돌아가고 있소?”
“전 중원이 시끌시끌한 때에 북경이라고 다를 게 뭐 있겠어요. 똑같아요.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 알게 모르게 다 아는 이야기죠. 단지 다를 게 있다면 북경에는 황제 폐하가 계신다는 사실이 조금은 사람들이 안심하고 있긴 하지만…….”
절레절레.
그곳의 상황을 떠올린 것인지 평서란의 묘하게 굳은 얼굴이 좌우로 돌아간다.
‘결국, 그곳도 상황은 피차일반이라는 소리군. 하긴, 그러니 황제 폐하께서도 직접 이곳으로 사신을 보내신 것이겠지.’
송운이 씁쓸한 마음에 고개를 조용히 주억였다.
“아! 물론 어머님, 아버님, 도련님과 식솔들은 모두 잘 지내고 계세요.”
“아…… 다행이구려.”
송운이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 않아도 가장 먼저 묻고 싶었던 말이다. 한데 먼저 꺼내 볼 염치가 없어 하지 못한 것을 이리 먼저 이야기를 해 주니 참으로 고마울 수밖에.
“가장 먼저 이 이야기를 해 드렸어야 했는데, 제가 너무 늦게 말을 꺼냈네요.”
“괜찮소. 우선 이곳엔 황궁의 사신으로 온 것이니, 그 이야기부터 하는 것이 당연히 우선 아니겠소?”
그 말에 잠시나마 밝아졌던 평서란의 얼굴이 다시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하아…… 맞아요.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처음에 적 소협에게 들었을 때는 큰 문제라고 여기지 않았어요. 그 당시에는 확신이 아닌 추측일 뿐이었고, 더구나 운 가가가 직접 나섰다고 하였으니, 금방 일이 풀릴 거라고 믿었죠. 하지만…… 아니더라고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북경 외곽 지역에서부터 좋지 않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도 밤사이 어린아이부터 성인 남성이 쥐도 새도 없이 사라진다는 흉문이 말이다.
계속되는 좋지 못한 소문에 백성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하자, 이를 타파하기 위해 황제가 직접 군사를 풀어 조사에 나선 것이다.
결과는 무(無).
도착하는 곳마다 거리가 제법 되는 탓인지 매번 놈들이 이미 휩쓸고 지나간 후였다고 한다. 그에 따른 적절한 보상을 맞추어 내리곤 있다지만, 말보다 빠른 입소문은 한겨울 추위보다 매서웠다.
더불어 계속되는 흉악스러운 일은 점점 더 사람들의 마음을 피폐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도 북경은 그나마 가장 마지막에 손이 뻗은 거라고 했어요. 이미…… 이미 다른 지역은 더 오래전부터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더라고요.”
질끈.
평서란이 애꿎은 엄지손가락을 깨물었다.
당시의 기억이 떠올라 화가 턱 끝까지 차오른 것이리라.
북경에서 낙후된 지역일수록 자식을 잃고, 지아비를 잃은 것도 모자라 몸마저도 내주어야 했던 여인들이 참혹한 모습은 파견 나간 모두의 치를 떨게 만들었다.
처음엔 미미하게 시작되었던 일이 점점 추격이 계속될수록 보란 듯이 그 규모가 불어났다고 하니 더욱 화가 나는 것은 당연한 일.
결국 소득 없는 추격은 일단락되었고, 사정을 알 법한 무림맹에 파견을 보낸 것이다.
송운은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재촉하지 않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시간의 침묵을 유지하던 평서란이 조금 진정이 되었는지 차분히 다시 말을 이었다.
“……저도 그 현장에 직접 나가 봤는데 정말 귀신에게 잡혀갔나 싶을 정도였어요. 심지어는 추적하기조차 쉽지 않았어요.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 거죠? 진짜 혈교의 짓인 건가요?”
“직접?”
그때, 다른 말보다도 직접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송운의 눈빛이 변했다. 그녀의 솜씨를 믿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이번 상대는 정말 만만치 않은 놈들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하나 송운이 그러한 걱정을 하는지도 모르는 평서란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네, 직접이요. 그래야 상황을 더 쉽게 파악하고 처리할 수 있으니까요.”
그녀의 불꽃 같은 눈빛과는 달리 담담하고 직설적인 말에 송운이 그제야 저도 모르게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란 매도 황궁의 사람이자 무인. 새삼 이제 와 놀랄 것도 없지.’
단지 그녀는 무인으로서, 신하로서, 나라의 녹을 먹는 이로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능력을 인정받고 일찌감치 도독첨사(都督僉事)의 자리에 올랐으니 무게가 결코 가볍지 못한 것이다.
더불어 그 임무가 위험하다고 뒤로 내뺄 만큼 나약한 인물이었다면 애당초 송운이 그녀에게 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당당함에 매료된 것이니까.
더구나 평서란은 훗날 여 무인 중 정점에 서는 여제가 되질 않던가?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실력으로도 이미 한참 아랫수였다.
그야말로 여우가 호랑이 걱정을 하는 격이다.
‘그래, 누가 누굴 걱정한단 말이냐? 란 매의 말대로 다치지 않았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겠지.’
순간 송운은 자신을 되짚어 보았다.
회귀 후 지킬 것이 많아졌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전생의 자신에 비해 자질구레한 걱정이 늘었다.
‘잔걱정은 오히려 독이 되는 법이다. 사람의 앞길을 막는 독.’
톡톡.
한참 동안 답이 없는 송운의 모습에 평서란이 조심스레 검지로 그를 찔렀다. 이에 놀란 그가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음? 아…… 미안하오. 잠시 다른 생각을 했소. 어디까지 이야기하였더라?”
“많이 피곤하신 거 아닌가요? 쉬려고 하셨는데 괜히 제가 와서 괴롭히는 거 아니죠? 듣자 하니 운 가가께서도 그간 제법 바쁘셨다고 하시던데…….”
좀 전과는 달리 평서란이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지은 채 바라보자 송운이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답했다.
그의 입가엔 잔잔한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하, 그런 건 절대 아니오. 오히려 이미 사 주야나 쉬고 있던 참이었지. 그래, 맹주님께서는 뭐라 하시었소?”
“잠시 뜸 들이시긴 했지만 혈교가 맞다 했어요. 하지만 지금 당장 부딪치지는 않을 거라고도 했죠. 그리고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는 말도…… 절대 쉽지 않은 지독한 싸움이 될 거라며, 황제께 꼭 그리 전해 달라고 하시더라고요.”
“맹주께서 그리 말씀하신 걸 굳이 다시 물은 연유는…….”
송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답이 들려왔다.
“그야 당연히 운 가가를 더 믿으니까요.”
너무도 당당하게 말하는 평서란의 말에 송운은 속으로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뭐, 틀린 말은 아닌가?’
어쩐지 마음이 뿌듯해지는 듯한 기분.
“그렇게 말해 주니 내가 왠지 뭔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구려.”
“후후,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제게는 단 하나뿐인 지아비이시니까요. 누구보다 제가 편이 되어 드려야죠.”
“음, 그렇소? 하면 말 나온 김에 이렇게 딱딱한 이야기는 내일 마저 나누는 것으로 하고 오늘은…… 오랜만에 단둘이 맞이하는 밤인데 좀 더 분위기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 어떠하오?”
“이미 운 가가가 계신 곳이 저에게는 좋은 곳인걸요?”
송운은 꽤 능글맞아진 평서란의 말에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러곤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겨 자신의 품으로 이끌었다.
팟-!
그 바람에 달빛 하나 없던 방을 비추고 있던 촛불이 힘을 잃고 사라졌다.
“앗……!”
“그럼, 오늘 밤은 이대로 보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군.”
어둠 속에서도 음흉한 미소를 띤 송운의 얼굴이 점점 그녀를 향해 다가갔고, 조금은 어색해하던 평서란의 반짝거리던 두 눈이 따라 살포시 감겼다.
고요한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第七章. 천하무림대회
북적북적.
섬서성 서안에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인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렇지 않아도 무림맹의 거점인지라 무인들의 발걸음이 문지방 닳도록 드나드는 곳이 이곳 서안이었다.
한데, 지금은 헤아릴 수조차 없을 만큼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흡사 이곳이 천하제일의 상권이 들어서 있다는 소주(蘇州)나 항주(杭州)라고 해도 믿길 만큼의 광경이다.
이미 밤이 되었는데도 허공에는 실로 매달린 작은 야명주들이 색색들이 길게 이어져 사람들의 머리 위를 밝게 비추고 있었다.
덕분에 평소라면 조용할 이곳엔 사람이 넘쳤다.
아니, 정확하겐 흐른다는 표현이 맞았다.
지금 이 길을 걷는다면 스스로 걷는 게 아니라 주변인들에게 떠밀려 간다고 하는 게 더 어울릴 테니.
“……삼 년마다 한 번씩 늘 봐 오던 풍경인데 왠지 뭔가 느낌이 다릅니다.”
“오랜만의 천하 무림 대회라 그런 것이 아니겠느냐? 더구나 소문이 흉흉하니 올해는 더더욱 지나치겠거니, 했던 상인들에겐 희소식이겠지.”
“그런 것일까요?”
청년의 목소리엔 아주 잠시, 불안감이 내비쳤다.
“그 덕분에 잠시 주춤했던 시장이 다시 활기를 찾고 있지 않으냐?”
“그건 그렇습니다만…….”
“설마 아직도 다른 장로들의 반대가 신경이 쓰이는 게냐?”
잠시 머뭇거리던 사내가 입을 열어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