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어찌 이리도 무심했을까!’
자신을 목이 빠져라 걱정하고 계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니 마음 한편이 아려 왔다.
그간 혈교를 쫓는 것에만 너무 열중했던 탓이리라.
잡고 또 잡으려 해 봐도 손에 잡힐라치면 손에 쥔 모래처럼 흘러가니, 야속한 마음에 더욱 몰두했던 것이거늘.
어느새 시간이 이리도 훌쩍 흘렀다.
물론 이 또한 넓게 보면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었으나, 당금 부모님은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자신을 믿고서 기다리고 계실 것이 아닌가?
드르륵.
송운은 자신이 배정받은 방 서랍에 고이 간직해 둔 새하얀 서신을 꺼내 들었다.
하얀 종이 위에 적힌 아버지의 대나무처럼 곧고 정갈한 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네 어머니와 나, 송후는 아주 잘 지내고 있다.
송하 역시 조광이와 함께 잘 지내고 있다고 들었다.
아, 물론 새아가도 건강히 잘 있다.
네 소식은 간간이 다른 이들을 통해서 듣고 있으니, 이곳은 걱정일랑 말고 네가 해야 할 일을 하거라.
송악의 성격이 그대로 녹아든 문체다.
남들이 보기엔 그저 딱딱해 보일지 몰라도, 그 속에 녹아든 아버지의 지극한 마음을 송운은 이젠 알 수 있기에 더더욱 송구스러웠다.
어찌 걱정이 안 될까?
다만 이미 장성하여 타지에 멀리 나가 있는 자식의 앞길을 막을 수 없으니, 믿고 지켜봐 주시는 것이리라.
‘혼정신성(昏定晨省)은 못 할망정 잠시 다녀오겠다며 인사를 드려 놓고서는 이리 길어졌으니…….’
서신을 다시 원래 상태로 고이 접어 품에 넣은 송운은 답답함에 방 바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밖으로 나오니 검은색 도화지에 아름답게 수 놓인 별들이 반짝반짝 빛을 내며 송운을 맞이했다.
‘란 매.’
그 광경에 홀려 잠시 바라보고 있자니 이번엔 고운 평서란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래서야 지아비 자격도 박탈이 아닌가? 크흠!’
졸지에 남편이 살아 있음에도 생과부를 만든 것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생각해 보면 평서란에겐 늘 달콤한 당과보다는 쓰디쓴 약재 같은 기다림만 쥐여 준 셈이었다.
그나마 약재는 쓸모라도 있는 법인데, 그가 주는 것은 쓰기만 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늘 그녀는 자신을 믿고 기다려 주었다. 절로 미안함이 물 밀려오듯 마음을 강타했다.
문득 송운의 귓가에 평서란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운 가가.”
“허…….”
순간 저도 모르게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오죽하면 환청이 들리는군.’
미안한 일을 더는 만들지 않으려 했는데, 자꾸만 일이 꼬인다.
송운이 입 밖으로 절로 긴 한탄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아직은 찬 새벽의 공기에 그의 입김이 그대로 김이 되어 허공을 메웠다.
‘아직도 과거의 나를 다 버리지 못했구나.’
곁에 있을 때야 바로 옆에 있으니 챙기고자 노력하였다. 한데 회귀한 이후 처음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갖다 보니 잠시 또 제 할 일에만 몰두한 것이다.
수십 년 동안 혼자 움직이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생활하는 것이 너무도 몸에 깊게 밴 탓도 있다는 건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그것에 익숙해서라는 변명은 말 그대로 변명일 뿐.
그것이 연유가 돼서는 안 된다.
지금 이렇게 혈교를 잡으려 애쓰는 것 역시 결국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던가?
‘내가 더 신경을 쓰고 바뀌어야지. 제대로 된 자식, 그리고 지아비가 되려면 아직 한참 멀었구나, 송운.’
어머니가 해 주신 밥 위에 몽글몽글 올라오는 새하얀 김도, 아버지 그리고 조광이와 함께 공부하던 시간도, 동생들과 함께 무를 나누던 시간 역시도.
하나같이 다 소중한 것들이다.
‘란 매의 품이 참 따스했는데…….’
포근했던 그녀와의 추억이 떠올라 행복해지려 하던 것도 잠시.
“……크, 커흠!”
문득 스친 마음에 스스로 생각하고도 뜨끔하고 놀란 송운이 괜스레 머쓱했는지 아무도 없는 허공에 헛기침을 냈다.
“남녀 간 당연히 흘러가는 세상 음양의 조화인 것을.”
조금은 장난기 어린 생각을 거두고 나니 다시 북경의 상황이 궁금해졌다.
그곳은 별 피해가 없을까?
표적이 되었던 자신이 이곳까지 온 이상 별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을 떨치기는 어려웠다.
얼마 전, 운양상단 측에선 북경과 자신들은 별일 없다며 서신을 보내오긴 했다.
하나 그것만으로는 마음을 안심하기엔 송운의 성이 차지 않았다.
자신을 걱정시키지 않으려거든 무슨 일이든 할 사람들이라는 걸 잘 알기 때문이리라.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겠어.’
어차피 한동안 자신에게 주어진 휴식이다.
그것마저도 얼마나 지속될지는 모르지만, 지금이 아니면 앞으론 더욱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이참에 빠르게 움직여 북경과 운양상단에 다녀오는 편이 좋다고 판단한 송운이 몸을 돌리려던 참이었다.
‘……음?!’
뭔가를 느꼈는지 그의 몸이 제자리에 멈추었다. 순식간에 송운의 기감이 주변에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잘못 느낀 것은 아닐 텐데.
‘설마, 그럴 리가…….’
생각을 마저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지금 설마, 그럴 리가. 라고 생각하고 계셨어요? 혹시?”
작금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는 환청 따위가 아니라 진짜였다. 너무도 귀에 익은 목소리에 굳어 있던 송운의 고개가 뒤를 향했다.
놀란 것도 모자라 마음속까지 꿰뚫린 송운은 어안이 벙벙한 심정을 감출 수가 없었는지 평소 잘 짓지 않는 표정을 한 채, 정면을 주시했다.
보고서도 믿기지가 않는 상황.
“이게 대체…….”
“잘 지내셨어요?”
짙은 어둠이 무색할 만큼 화사한 미소로 답해 오는 여인의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설마가 사실이 된다고 했던가.
송운은 아직도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여인이 믿어지지 않는지 양쪽 눈을 손으로 비볐다.
“여기까진 어쩐 일이오? 아니, 아니지. 무엇보다 이곳에 들어오려면…….”
“아무리 저라지만, 설마 여기까지 그냥 힘으로 밀어붙여서 들어왔겠어요? 혹…… 제가 이 거대한 무림맹에 월담이라도 했다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평서란의 농담에 송운이 연신 손을 좌우로 내젓는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소.”
“설마는 이미 운 가가를 한번 놀라게 하지 않았던가요? 그 녀석은 언제든지 상황을 뒤집을 준비를 하고 있다고요.”
평서란이 조금은 토라진 듯이 고개를 돌리자, 송운의 두 눈동자가 당혹으로 물들었다.
“아, 그것이 그런 게 아니고…….”
한참 우왕좌왕하는 송운을 바라보던 평서란이 웃음을 내뱉었다.
“후후, 오랜만에 보는 운 가가의 당황하는 모습을 보니 여기까지 달려온 보람이 있네요. 그냥 온 건 아니고 황궁의 사신으로서 왔어요. 아무리 그 성세가 대단한 무림맹이라 할지라도 황궁의 사신이라는 명찰을 달고 온 이를 문전 박대할 리가 없잖아요?”
어깨를 살짝 으쓱거린 평서란이 여전히 곱디고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말에 송운은 이제야 납득이 됐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긴장이 풀렸는지 입가에 미소를 피운 채 평서란에게 농을 던졌다.
“그랬구려. 하마터면 내가 보고 싶어 이 먼 거리를 달려와 월담까지 했다고 생각할 뻔했지 뭐요.”
하나, 이번에도 승(勝)은 평서란 쪽이었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웃는 얼굴로 맞받아친 것이다.
“음…… 그건 부정하지 않을게요. 굳이 다른 사신들을 제치고 제가 오겠다고 나선 이유니까요.”
예전 같았다면 자신의 말에도 곧잘 얼굴을 붉혔을 평서란이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대로 당할 그가 아니다.
곧 송운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밤하늘의 별을 보며 아름다운 란 매를 떠올리던 도중이었는데, 진짜 얼굴을 보니 혹여 이것이 꿈은 아닐지 걱정이오.”
이번엔 송운의 역공이다.
‘이 정도…… 쯤은……!’
잘 참아보려 했지만, 평소 칭찬에 약한 평서란의 얼굴이 잘 익은 복숭아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화르륵!
이상하게 다른 건 조금씩 내성이 생겨나도 이런 낯 뜨거운 말만큼은 쉽사리 면역되지 않는다.
“가, 가가도 참……!”
붉어진 얼굴을 보여 주기 민망했는지 고개를 돌린 그때였다.
펄럭!
‘……아.’
귓가로는 낮은 음의 목소리가 코끝엔 익숙한 향기가, 밥을 먹다가도 수련을 하다가도 책을 읽다가도 문득문득 생각이 났던 그가 평서란을 감싸 왔다.
그것도 당장 코앞에 와 닿아 있다.
정신이 몽롱해지려던 그때, 송운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보고 싶었소. 그리고 미안하오, 란 매.”
길지도 짧지도 말이었으나 그의 마음은 충분히 전해져왔다.
울컥.
순간 평서란의 목구멍에서 무언가 차올랐다. 동시에 눈가 주변이 촉촉이 젖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없었다.
아파도 참고, 힘들어도 참았으며, 슬퍼도 참았다.
그렇게 자라 왔고, 그렇게 배웠다.
그래야 동등한 무인으로서 여인의 몸으로도 사내들과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었다.
더 높은 궤도에 올라갈 수만 있다면 버틸 수 있다는 일념으로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심지어 몇 해 전 송운과 생이별을 했을 때조차도 그를 믿고 참고 기다렸지 않은가?
문득 그때의 아픔이 전해져 왔는지 평서란이 입술을 작게 깨물었다. 그렇게 참아 왔던 감정이 송운의 한마디에 무너져 내렸다.
자신도 영문을 모르는 감정이 평서란을 당혹시켰다.
‘내, 내가 왜 이러지? 울지 말자. 운 가가도 뵈었고, 좋은 날이잖아.’
하지만 이번만큼은 감정이라는 녀석이 쉽사리 그녀 편을 들지 않았다.
그동안 그를 이해한다고 했지만 그녀의 마음 한편에 저도 모르게 조금은 응어리져 있던 것일까?
애써 그렇게 자신을 달래 보지만 야속하게도 한번 새어 나오기 시작한 눈물은 쉽사리 그녀를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거면 됐어요. 다치지 않고 무사해줘서 고마워요.”
평서란이 들키지 않기 위해 억지로 목울대를 내리누르며 고개를 푸욱 숙인 채 답했으나, 이미 말속에 가득한 물기를 숨길 수는 없었다.
‘이런…… 결국 란 매를 울리는 건가.’
송운이 아차 싶었는지 그녀를 끌어안고 있던 손에 힘이 슬그머니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