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천하제일의 정보력이라고 생각했거늘, 아직도 감춰진 면모가 있었다니. 알면 알수록 대단한 재목(材木)이로구나! 참으로 탐이 나는 군…… 탐이 나!’
제갈염은 경험 많은 총군사답게 음험한(?) 속내를 재빠르게 감춘 채 답변을 내놓았다.
“크흠……. 뭐,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네. 내 말은 그래도 맹주님께서 들어주시는 소원인데, 고작 이러한 것으로 되겠는가?”
“저는 딱 그 정도면 좋을 것 같습니다.”
송운은 더 이상 물을 필요도 없다는 듯 미소 지었다. 단호한 모습에 제갈염 역시 못 이기는 척 고개를 주억인다.
본인이 그러길 원한다는데 더 말해서 무엇하랴?
“알겠네. 상단과 거래를 트는 것이 딱히 어려운 일은 아니지. 그것도 송 소협이 직접 세운 상단이라 하니 더 물어서 무엇하겠는가? 자세한 것은 그곳으로 며칠 내에 사람을 보내도록 하지.”
“크게 이바지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신경을 써 주시니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 총군사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여쭙고 싶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송운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제갈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는 송운의 입에서 흘러나올 질문이 과연 무엇일지 기대까지 되는 제갈염이었다.
“말해 보게.”
“이번 대회는 무림맹 세력 외의 인재를 모으려 하시는 겁니까? 문파의 힘과 권력에 휘둘리지 않을 실력 있는 무인들 말입니다.”
순간적으로 제갈염의 눈썹이 일렁였으나 빠르게 원상태를 되찾았다.
‘하…… 하하하……!’
송운의 날카로운 일침에 속으로 크게 웃음을 터뜨린 그가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순간 천둥벌거숭이가 된 듯한 기분에 묘하면서도 놀라웠다.
이제 와 새삼 놀랄 것도 없을 거라 여겼는데도 송운은 여전히 자신을 놀라게 한다.
그것도 이번엔 그동안 보아 왔던 무에 대한 자질이 아닌 문으로써 말이다.
‘어린 나이에 거인(擧人)이 되었다고 하더니 확실히 운이 좋아 합격한 것은 아니로군.’
이쯤 되면 그가 이미 황궁의 사람이라는 것이 참으로 아쉬울 따름이다. 이 정도로 뛰어난 인재라면 당연히 무림맹의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했을 터.
‘끙…… 이번 대 황제는 참으로 복이 많은 이로다.’
다시 한번 백능의 마음을 십분(十分) 이해한 제갈염이 진중한 표정을 한 채 입을 열었다.
탐이 나는 재능을 지닌 이를 만났으나, 이미 황제의 사람이었다.
더구나 외부인에게 허를 찔렸는데, 총군사나 되는 사람이 마냥 좋다고 실실 웃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자네는 어찌 그리 생각하는 것인가?”
이에 되묻는 제갈염만큼 송운도 만만치 않았다.
쉽게 원하는 답을 주는 것을 거부했다.
“저는 황궁의 사람입니다. 감히 저 따위가 맹주님의 의견에 또 의견을 내어 무엇 하겠습니까?”
하나, 제갈염 역시 녹록지 않은 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나 역시 자네에게 이 질의에 대해 답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역시.’
그의 답에 송운은 속으로 만족의 미소를 지었다.
애당초 쉽게 답을 얻을 것 같았으면 이렇게 묻지도 않았다.
송운 역시 서슴없이 답을 해 나갔다.
“적수역부(積水易腐), 즉 고인 물은 썩는다고 했습니다. 무림맹은 이미 고인 물이지 않습니까. 맹주님께서는 그것을 걱정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까?”
“……!”
제갈염 역시 이미 인지하고 있는 말이었으나, 그것을 타인의 입을 통해 듣는 것은 완전히 다른 기분이었다.
송운이 황궁의 사람이기에 스스럼없이 뱉을 수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일까.
순간 충격이 다가오는 것마저 막을 순 없었다.
잠시 주춤한 제갈염이 입을 열었다.
“……하면 내게 굳이 그것을 물은 자네의 저의(底意)가 무엇인가? 내가 그것을 듣고 역정이라도 내거나, 적으로 돌아서면 어찌하려고?”
“딱히 언중유골(言中有骨)을 의도하려던 것은 아닙니다. 별다른 큰 뜻은 없었으니까요. 총군사님을 믿고 있기에 드린 말씀입니다. 다만, 총군사님께서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깊이 사죄드리겠습니다.”
말을 끝낸 송운이 곧바로 고개를 숙이려 하자, 제갈염이 재빠르게 어깨를 붙잡았다.
그와 껄끄러운 일이 생기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이 무림에, 굳이 무림맹 소속이 아니더라도 송운은 커다란 힘이 되어 줄 것이란 믿음이 있었다.
그는 진정 협(俠)을 아는 자였으니까.
적어도 제갈염이 그동안 보아 온 송운은 그러했다.
“하하하! 역시 자네의 머리는 무시할 게 못 되는군.”
“아닙니다. 그런 말을 총군사님의 입에서 들으려니 참으로 쑥스럽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송운이 그의 말이 부담스러웠는지 손을 내저었다. 그도 그럴 게 제갈염은 자타공인 무림에서 최고로 쳐주는 두뇌가 아닌가!
텁.
그때, 제갈염이 송운의 두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아닐세. 나는 자네가 참으로 대단하다고 여겨지네. 문과 무, 두 가지를 모두 뛰어나게 갖춘 것 아닌가? 나는…… 사실 문을 남들보다 조금 더 타고났을 뿐, 무에는 그리 재능이 없다네. 하늘은 공평한 법이지. 한데 자네에겐 그것이 통하지 않는 듯하이. 그러니 나로서는 자네가 부러울 따름이야.”
어쩌면 조금 씁쓸하게 들려오는 그의 말에 송운이 조심스레 고개를 주억인다.
그 역시 결국은 무림인.
‘아무리 뛰어난 머리를 지닌 이로 칭송받는다 한들, 무로서는 늘 밀려왔겠지.’
그 마음이 절로 송운에게까지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덕담이 오가는 와중에도, 송운은 아직 명확하게 답하지 않은 제갈염의 반응에서 이미 답을 얻었다.
‘총군사님의 반응이 이러한 것을 보니, 내 추측이 틀린 것은 아닌 것 같구나.’
놀란 것은 송운 역시 마찬가지였다.
현재 무림에서 가장 거대한 힘을 지닌 이들이 무림맹이고, 그런 만큼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본디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힘을 쓰는 법이었으므로.
해서 과거에도 그들은 변화보다는 늘 현상 유지를 택했다.
그래야만 자신들이 가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고인 물은 썩는다.’
좀 전에도 제갈염을 향해 직설적으로 표현했지만, 반드시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렇게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처럼 굴다 결국 마교대전에서 뼈아픈 참패를 당했지 않은가.
송운은 ‘그렇다면 왜 더 빨리 변하지 않았을까.’라는 의문을 품기도 했지만, 그것은 애당초 의문이라 할 것이 없었다.
‘지금이라도 바뀌려 하는 것에 감사히 여겨야 할 터.’
자신이 회귀한 뒤부터 세상은 계속해서 바뀌어 왔다.
그가 아는 미래가 거의 다른 양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처음을 제외하고서는 전과 같은 것은 거의 없지 않은가.
이번 일 역시 그 여파로 인해 바뀐 미래일 가능성이 컸다.
‘어찌 되었건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니 크게 나쁠 것도 없겠지.’
더 이상의 답은 오가지 않았으나, 이미 서로의 의중을 읽은 두 사람이다.
긴말은 더 필요하지 않았다.
간단한 다과를 마친 송운은 그가 돌아간 후에도 꽤 오랜 시간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第六章. 뜻밖의 가빈(佳賓)
제갈염이 다녀간 후 또다시 이 주야가 흘렀지만, 말이 좋아 휴식이지 끊임없는 수련을 반복했다.
마치 그동안 시간이 없어 하지 못했던 수련을 보충하겠다는 듯이.
후웅-!
새가 날아오르듯 가뿐히 몸을 허공으로 띄워 올린 송운이 제자리에서 반 바퀴 돌아 선을 그으며 그대로 땅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멈칫.
‘하아, 아니다. 아니야. 쉴 땐 쉬어 줘야 하는데…….’
혈교와 맞붙고 난 이후로, 이상하게 손을 놓을 수가 없다.
언제 어떻게 달려들지 모르는,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하려니, 몸을 둔하게 놔두기엔 마음이 너무도 불안한 탓이었다.
그들의 전력은 계속해서 튀어나왔다.
치고, 치고, 또 쳐도 끊임이 없었다.
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전력을 숨겨 두고 키워 왔을까? 만일 그것이 전부였다면 그렇게 쉽사리 노출하지도 않았을 터.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들을 버리는 패로 써도 될 만큼 높은 수준의 무공을 익힌 이들이 많다는 얘기겠지.’
그뿐만일까.
혈교는 강시라는 사악한 주술을 사용했다.
송운은 몇 달 전에 있었던 사건을 머릿속에서 꺼내 올렸다.
그야말로 인간이 아닌 존재들.
이성을 잃고 단단한 몸을 가졌으며, 아픔 또한 느끼지 않는 괴상한 존재들이다.
이미 죽은 몸이기에 기력(氣力)을 다해 지쳐 쓰러질 일도 없었다.
그런 것들이 하나둘이라면 모를까 수백 수천의 떼로 덤벼든다면 그야말로 끔찍한 일이다.
송운의 왼손이 오랜만에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한참을 골똘히 생각하던 송운의 고개가 다시 좌우로 내저어졌다.
‘아니야. 나답지 않구나. 잠깐이라도 쉬어 줘야 일 보 전진할 수 있는 법이거늘.’
이내 잡생각을 떨쳐 내고자 가부좌를 튼 송운이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한 바퀴, 두 바퀴.
중천에 떠 있던 해가 산 뒤로 넘어가는 것도 모른 채.
송운은 점점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어 갔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계속해서 감겨 있을 것만 같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그 속에 감추어져 있던 두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눈을 감기 전의 혼란과 불안정한 모습이 아닌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이다.
복잡하던 마음속이 정리되어서였을까?
문득 송운의 머릿속에 두 글자의 단어가 떠올랐다.
가족.
‘너무 오랫동안 신경을 못 썼구나. 이보다 더한 불효자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두 번 다시는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것에 소홀했음을 깨닫자 마음이 다시 묵직해짐을 느꼈다.
‘최소한 연락만큼은 제때 드렸어야 했거늘…….’
송운이 속으로 길고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서신을 한 것이 언제던가?
이곳에 처음 당도했을 무렵은 몹시도 찬 겨울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반면 지금은?
‘어느덧 겉옷을 벗은 줄도 모르고 있었구나.’
아직 매미가 울 시기는 아니나 벌써 농부들은 논과 밭에 뿌릴 종자를 골라 파종 준비를 하고 있을 터였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니 벌써 석 달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