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속으로는 훗날의 크나큰 그림을 그리며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열매가 단단히 익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 완성된 알맹이를 먹으려는 속셈이라는 것을, 백능 역시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이제는 제법 자리도 잡았겠다, 나 역시 나이가 있으니 적잖은 명분도 만들 수 있을 테고…… 맹주의 자리가 탐이 날 테지. 모든 권력의 가장 최상위층에 있다고 생각할 테니.’
한데 그러는 와중 들려오는 말이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말이 아닌 것도 모자라 마교와의 동맹에 천하 무림 대회를 열자는 이야기였으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슬슬 답답함이 치밀어 오를 터다.
그러한 반응들이 최근 들어 자신의 침소에 드나드는 쥐새끼들의 수가 늘었다는 걸 느끼던 그에겐 새삼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현재 후기지수들이 몸담고 있는 문파, 세가들이 맹주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 정도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 터.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남궁진혁이 가장 먼저 말문을 열었다.
“언제까지고 우리 무림맹이 문을 닫고 있을 수는 없는 법이겠지요.”
“저 역시 남궁 장로와 같은 생각입니다.”
“커흠……! 저는 맹주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저 역시도…….”
그 말을 시작으로 마치 도화선에 불을 붙인 듯 찬성의 목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第五章. 폭풍전야
짹짹짹-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고요하구나, 참으로 고요해.’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소리에 송운이 기지개를 켠다.
사람들의 걱정과는 달리 생각보다 꽤 오랜 시간이 고요함 속에서 흘러갔다.
하나 그 속에서도 불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으니…….
그중 한 명이 바로 송운이었다.
‘이미 예전에도 이러한 적이 있었지. 마치 폭풍전야처럼.’
송운은 이제는 제법 오래된 과거에 있었던 마교대전을 머릿속에서 떠올렸다.
“꺄아악!”
“사, 사, 살려……!”
“크아악!”
“어, 엄마! 아버지! 꺄악!”
당시의 끔찍한 비명이 귓가에 다시 맴도는 듯한 느낌에 송운의 두 눈이 찌푸려졌다.
휙휙-
그는 이내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방심, 혹은 안심.’
그때도 지금과 같이 오랜 평화에 사람들은 점점 전쟁의 무서움을 잊어 갈 무렵이었다.
그러한 차에 마교가 밀물처럼 거침없이 쳐들어왔고, 오랜 시간 평화에 물들어 버린 이들은 대책은커녕 우왕좌왕하기 바빴다.
그 대가는 참패였다.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 갔다. 송운은 그 결과가 얼마나 뼈아팠는지 너무도 잘 기억하고 있다.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야.’
송운은 속으로 쓰린 마음을 삼켰다.
어차피 과거는 과거일 뿐.
새로운 미래를 써 내려가고 있지 않은가?
그것을 본보기 삼아 일어나지 않은 일에 감정과 심력 소모를 하기보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대비를 하는 것이 더욱더 효율적일 터.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서 나태해지는 순간, 이미 진 것이다.’
무림인들뿐만이 아니라, 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강력한 나라일지언정, 평화에 물들어 호화스러운 삶을 즐기며 나태해지는 순간, 그 나라는 이미 망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하나 송운은 결코 그 모습을 다시 볼 자신도 없을뿐더러 그렇게 놔둘 생각도 더더욱 없었다.
이번만큼은 부모님과 동생들, 그리고 평서란과 그의 아버지인 평목단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모든 걸 지켜 내리라!
해서 끊임없이 송운은 게으름과 타성을 경계했다.
꽈악.
그의 꽉 쥔 두 주먹에 핏줄이 솟아올랐다.
너무도 견고하고 단단해서 그 무엇도 그의 주먹을 갈라놓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과거에는 무능력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나, 이번만큼은 다르다. 소중한 것들을 빼앗기지도, 잃어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이제 더는 미래의 일을 가늠할 수가 없게 되어 버렸으나, 그런 것에 더는 연연하지 않아도 될 만큼 빠르고 단단하게 성장해 왔지 않은가.
이제는 그 힘을 어찌 활용할 것인지를 고민하고, 사용할 때였다.
송운의 감았던 눈이 떠지는 순간.
번쩍!
그 깊은 흑색의 두 눈동자 속에 송운의 단단하고 굳은 의지가 빛을 발했다.
구름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유난히 컴컴하던 밤이 몹시 밝게 빛났다.
* * *
무림맹 내부가 부산스러워졌다.
결국 찬성의 표가 많아짐에 따라 맹주의 의견이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중소문파들이 찬성을 한 것도 있으나 역시나 맹주를 지지하는 제갈세가와 남궁세가, 그리고 소림사 등등 제법 큰 세가, 문파들이 손을 들어준 덕이 컸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애당초 백능이라는 이름의 무게는 그리 가벼이 여겨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백능은 긴 세월 동안 의견을 내놓는 것에 신중했고, 먼저 나서는 법이 거의 없는 대신, 한번 내놓은 의견은 반드시 관철시켜 왔다.
이번 일 또한 찬성하는 문파들의 힘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의견을 묵살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조금 더디던 결정이 내려지자, 진행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마치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말이다.
송운이 무림맹의 흐름이 급살을 탄 듯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무렵, 궁금증을 더 키울 새도 없이 곽철우가 그를 찾았고, 소식을 전해 왔다.
그래서일까?
이야기를 전해 들은 후 송운은 더욱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이제 겨우 이 주야가 흘렀나?’
처음처럼만큼은 아니어도 드문드문 드나들던 오룡일봉들도 대회를 준비하는 듯 발길이 뜸해진 지 오래다.
그런데도 남아도는 시간 탓인지 흘러가는 시간은 더디기만 했다.
‘천하 무림 대회라…….’
송운도 잘 알고 있는 대회다.
지나간 과거의 송운도 무림인이었고, 직접 도전했던 무림인들의 꿈이니 어찌 모를 수 있을까.
‘한데, 이 같은 시국에 굳이 무림 대회를 연다니…….’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우던 차에 그의 의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렸다.
총군사 제갈염이 직접 그를 찾아온 덕이었다.
“아, 총군사님.”
“일어날 필요 없네. 그대로 앉게나. 내 직접 할 말이 있어 찾아왔네.”
바쁜 와중임에도 밝은 얼굴로 송운을 찾은 제갈염은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무림 대회에 대한 소식은 저도 들었습니다. 맹주님께서 직접 나서신 일이시라고 하던데…….”
“하하. 맞네. 맹주님께서 이번에 아주 마음을 단단히 드신 모양일세.”
“그렇군요.”
“아, 그래서 말이네. 맹주님께서 이번 일에 자네는 잠시 쉬라 하시었네. 원한다면 잠시 무림맹을 떠나 있어도 좋다고 하셨어. 일단은 당장 전쟁이 일어날 것 같지도 않을뿐더러, 자네는 황궁에 소속된 몸이니 말일세. 황궁 사람을 오래 붙잡고 있는다는 게 영 마음이 편치 않으신 모양이시더군. 아, 더불어 이번 일로 큰 공을 세웠으니 무엇이라도 원하는 것이 있다면 소원 한 가지를 꼭 들어 주신다고 하셨으니, 언제든지 말하게. 내 최대한 힘을 써 보겠네.”
송운은 그 말에 속으로 긴 한숨을 내뱉었다.
‘소원이라…… 그나저나 잠시 쉴 때가 된 건가?’
정말 그의 말대로 이곳에서 당장 자신이 할 만한 일이 없다는 것을 최근 들어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무림맹 소속도 아닌 자신이 천하 무림 대회를 여는 것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은 없었다.
그때였다.
하나의 이름이 송운의 뇌리를 번개같이 스쳐 지나간 것은.
‘운양상단! 그래 맞아. 운양상단이 제법 크긴 했어도 미래를 위해 더 발을 넓혀 놓으면 좋을 터, 거기에 무림맹과 거래를 튼다면 두말할 것도 없을 테지.’
“총군사님, 그 소원을 지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음……?”
“생각난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하하, 거 젊은 사람답게 생각도 참으로 빠르군. 묻지 않았다면 서운해할 뻔했겠어. 어서 말하게.”
제갈염이 흔쾌히 허락하자 송운이 곧바로 운을 떼었다.
“다름이 아니고 무림맹에서 상단 하나와 거래를 터 주셨으면 합니다.”
“상단? 거래?”
송운의 입에서 의외의 단어가 나오자 의문을 품은 제갈염이 되물었다.
아무리 떠올려 보아도 송운과 어울리는 단어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맹주님께서 직접 들어주시겠다는 소원을 그런 것에 쓰겠다고?’
그가 알기로 송운의 집안은 오래된 학문 명문가다.
동시에 문인이자 무인이었다.
한데 소원을 일개 상단과 거래를 트는 데 사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기에 제갈염이 당황한 것이다.
송운은 당혹스러워 보이는 제갈염의 반응에 차분히 설명해 나갔다.
“예. 다름이 아니고 몇 해 전에 제가 따로 세운 상단이 있습니다. 아주 친한 벗이 맡아 주고 있는데, 이미 헌현현을 중심으로 제법 보는 눈이 좋고 큰 손으로 명성이 자자하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좋으니 거래만 터 주신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만……. 혹, 그 정도의 소원도 혹시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송운은 태연하게 말을 이어 왔지만, 제갈염은 또 한 번 그에게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허? 스스로 상단을 세웠다?’
이것은 제갈염도 금시초문인 일이었다.
대체 송운이라는 자는 누구인가?
문인? 무인? 그도 아니면 상인?
이제는 정말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문인의 자식이 뛰어난 무공을 익힌 것도 모자라, 이젠 상단까지 꾸렸다니 말이다.
실상 제갈염의 가문인 제갈세가도 오래전부터 오대세가로서 그 명망을 떨치고 있었으나, 뿌리는 문인에 좀 더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또한 제갈세가 역시 가문을 유지하기 위해 상단을 꾸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나, 무림세가인 제갈세가와 황궁의 학사는 기준부터가 달랐다.
하물며 송운의 집안은 한때 황사까지 지냈던 뼈대 깊은 학사 가문이 아니던가?
아무리 그의 가세가 기울었다고 할지라도 그런 높은 자리까지 했던 집안이라면 동네에 학당이라도 하나 세우면 그것으로도 먹고사는 데에는 그다지 큰 지장이 없다.
게다가 학사들의 자부심은 또 어떠한가?
그런 집안에서 자란 송운이 이 정도로 개방적이라는 건 이례적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러다 보니 이젠 스스로의 정보력마저 의심해 볼 지경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