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162화 (162/275)

제162화

‘전국 각지에 퍼져 있는 인재들을 모으고, 앞으로 생길지 모를 일들에 대비해야 하거늘…… 너무 나태해졌구나, 나태해졌어.’

백능이 속으로 혀를 찼다.

이미 미룰 만큼 미루어진 상태이므로 지금이 적기다.

‘이보다 더 늦어져서는 안 된다.’

결정을 마친 백능의 단단한 시선이 문 바깥을 향했다.

“밖에 누구 없는가?”

“맹주님, 부르셨습니까?”

“그래, 왔는가? 허허. 거기 편히 앉게.”

천천히 차를 따르고 있던 백능의 안면에 인자한 미소가 내려앉았다. 하나 반가워 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목소리에는 진지함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이번엔 무슨 일이시기에 이리 급하게 저를 부르셨습니까?”

제갈염이 궁금하다는 듯 물으니 백능이 능청스레 고개를 주억였다.

“역시 자네는 눈치가 빨라.”

그 맹주에 그 수하라고 그것은 제갈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눈치를 조금 늦추어 볼까요?”

“허허허! 능력도 뛰어난 이가 재치 역시 뛰어나니 내 자네를 싫어하려야 싫어할 수가 없네.”

“하면 맹주님께서 절 싫어하시기라도 하실 작정이셨습니까?”

“내 그럴 리 있나? 이토록 사람 됨됨이가 훌륭하고 능력 좋은 총군사가 또 어디 있다고 말이야. 나는 참으로 복이 많은 사람인 듯싶으이.”

백능의 계속되는 찬사에 제갈염 역시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를 띠며 말한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제가 혹시 폐를 끼치는 건 아닌지 늘 잠자리에 들기 전에 고심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대답을 들은 백능이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제갈염을 바라보았다.

“허어, 이거 총군사처럼 든든한 신랑감이 혼기가 가득 차고도 넘을 때까지 혼인을 아직 못한 이유가 게 있었구먼.”

그 말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금 난감한 얼굴이 된 제갈염이 말을 잇는다.

“큼, 맹주님도 참 날이 갈수록 입심만 늘어 가십니다.”

그때였다.

방심하고 있던 제갈염의 마음에 한 차례 더, 이번엔 강력한 한 방을 꽂아 내린 백능이었다.

“천하 무림 대회를 열 계획이네. 총군사 자네의 생각은 어떠한가?”

푸웁-!

“……예?”

순간 제갈염이 잘못 들었다는 듯 마시던 차를 내뿜으며 되묻자, 백능이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허허. 이 사람 참, 자네답지 않게 무에 그리 놀라는가? 천하 무림 대회 말일세. 지금이 적기인 듯싶네만…… 나 혼자 결정하기는 좀 그런 것 같고, 자네 생각이 듣고 싶어 이리 불렀네.”

생각지도 못했던 물음에 처음엔 당황한 듯 보이던 제갈염은 재빠르게 평정심을 되찾았다.

잠시 입을 굳게 다문 채 홀로 생각에 잠긴 제갈염을 백능은 그저 느긋하게 기다릴 뿐.

그 무엇의 재촉도 하지 않았다.

‘천하 무림 대회라…….’

이미 이런저런 연유로 미루어진 지 몇 년이 흘렀다.

햇수를 본다면 했어도 진작 치렀어야 했다.

게다가 천하 무림 대회라는 거창한 이름에 걸맞게, 각 문파에서,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무림인들이 자신의 기량을 뽐내는 자리다.

해서 많은 문파들은 이 자리를 빌려 각기 문파의 기량을 보이기도 하고, 신진 무인들을 큰 무림의 세계로 내보내는 데 발판을 삼기도 한다.

그것은 무림이라는 곳에 이름을 알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터.

하나 그것이 바로 당금 천하 무림 대회가 지연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시국이 시국이다 보니 문파들이 서로가 지닌 인재를 겉으로 쉽사리 드러내려 하지 않는 탓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러한 때에 혹여라도 문파도 이름도 없는 이가 우승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꼴이 우스워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기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결국, 시기상조(時機尙早)라는 말이다.

한참을 고심하던 제갈염이 무거운 첫 운을 떼었다.

“하오나…… 맹주님, 반발이 거셀 겁니다.”

“누구보다도 그들이 말인가?”

돌리는 법 없이 날카롭고 직설적인 백능의 질문에 제갈염은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어차피 둘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 않은가?

아니, 전 무림맹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굳이 심력을 소모하며 모르는 척, 아닌 척할 필요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니 담담히 그 말을 수긍한 것이리라.

“지금껏 수많은 무인들이 천하 무림 대회를 걸쳐 갔지요.”

제갈염의 목소리에 희비가 교차했다.

그 말속에 담긴 의미는 다양했기에 백능 역시 고개를 주억였고, 기다렸다는 듯 그 말에 답을 달았다.

“바로 그것이 내가 지금 천하 무림 대회를 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연유일세.”

그 말에 이번엔 제갈염이 강력하게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맹주님께서도 익히 알고 계시다시피 그들은 자신의 세력을 보존하기를 더 원합니다. 이러한 혼란의 시대에 굳이 유능한 인재가 다칠 만한 일을, 그것도 자신들의 전력을 드러내야 하는 대회를 열려고 들지 않겠지요. 그들 입장에서는 최대한 힘을 비축해 두어야 할 시기일 테니 말입니다.”

“그 때문에 지키고자 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고 해도 말인가?”

여태껏 흔들리지 않았던 제갈염의 표정이 이번 질문에서만큼은 묘해졌다.

멈칫거림이라고 해야 할까?

하나 그의 생각과 입은 쉬지 않았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말이 조금은 달라지겠군요.”

“총군사, 그래서 더더욱 해야 한다는 말이네. 이미 놈들은 움직이기 시작했네. 문을 열고, 더 많이, 더 넓은 세상에 퍼져 있는 무인들을 하나로 모아야 하는 때란 말일세. 지금이야말로 진정 문파에 얽매이지 않고 생각이 유연하고, 자유로운, 그런 뛰어난 무인을 얻을 수 있을 걸세.”

말하는 백능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강경한 힘과, 뚜렷한 목적이 담겨 있었다. 자신보다 더 당당한 기세와 함께 밝게 빛이 나는 듯했다.

그의 나이가 무색해질 만큼 말이다.

‘역시 내가 제대로 본 것이 맞구나.’

자신이 읽은 의중이 들어맞았다는 걸 이미 오래전 직감하고 질의했던 제갈염의 얼굴에는 어느새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맹주님의 생각은 바로 그것이셨는가?’

진정한 무인(武人).

그들을 한데 모으고 힘을 길러 내부가 아닌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한 단단한 성을 쌓아 올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백능이 원하는 진짜 목적이었다.

“하나, 만일 무재가 나오지 않아도 좋네. 그것은 그것 나름대로 의미가 깊을 터이니.”

백능의 마지막 말의 의중 역시도 파악한 제갈염이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럼 그리 진행하라 이르겠습니다.”

* * *

얼마 전 있었던 동맹 사건에 뒤이은 맹주의 발언은 무림맹을 다시 한번 발칵 뒤집기엔 충분했다.

‘그’ 동맹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면서도 탐탁지 않아 하던 장로들이었으므로 이것은 정말 크나큰 반발이 빗발쳤다.

“맹주님! 이런 시기에 천하 무림 대회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이미 우리 무림맹에는 뛰어난 무력을 지닌 이들이 널렸습니다. 한데 전력을 아껴도 모자랄 판에 어찌 사상자가 나올지도 모르는 그런 위험한 무림 대회를 열자고 하십니까?”

그들의 반발을 이미 예상했다는 듯 백능의 대답에는 물 흐르듯 막힘이 없었다.

“그것은 규칙을 더욱 엄히 하여 다루면 되는 일이네. 크게 걱정할 것이 없다고 보네만.”

“맹주님, 혈교 녀석들이 언제 어디서 기습을 감행할지도 모르는 판국이 아닙니까? 하면 그것을 보러 모인 관중들, 혹은 무인들이 다치기라도 한다면 정말 앞으로 우리 무림맹의 미래는 없을 겁니다.”

한 장로는 계속해서 불거지는 싸움판에 조심스레 목소리를 내 보았으나, 백능은 물러날 생각이 한 치도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오히려 그는 거대한 바위처럼 점점 단단해져만 간다.

“삼삼오오 모여들 관중들이 걱정이라 하였는가? 무고한 자들이 피해를 받을까 봐?”

“예, 그러합니다. 맹주님.”

하나 그들의 겉과 속은 달랐다.

‘제발 쉽게 쉽게 넘어갑시다, 맹주.’

‘그럼 그렇지. 우리말을 무시할 리가 없…….’

이제야 말이 조금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반대하던 장로들의 얼굴에 살포시 미소가 떠오를 무렵.

판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기 때문에 대회를 열어야 한다는 말이네. 자네의 말대로 무림에서 뛰어난 무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무림맹의 본거지 아닌가? 한데 자네들은 대체 무엇이 그리 걱정인지 이 늙은이는 잘 모르겠군.”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낮고 온화하였으나, 목소리에 담긴 기운은 일순간 좌중을 압도시키기에 충분했다.

‘큭…… 산중왕(山中王)은 늙어도 결국 산중왕이라는 건가?’

몇몇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못 먹을 음식을 먹었다는 듯이 뱉어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다. 괜히 꼬투리를 잡힐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으니.

그리고 아직 기회는 있었다.

‘……후우.’

장로들이 서둘러 다시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백능의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그들이 아무리 표정을 감추려 해 봐도 백능이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는 없다.

자세히 바라보고 있지 않은 이상 알아채기 힘들 정도였지만 백능은 그들의 머리 꼭대기 위에 서 있는 실력자였다.

입심으로, 나이의 힘으로 오른 맹주 자리가 아니다.

하나 그것을 대수롭게 여길 필요는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돌렸다.

단지 들리지 않게 속으로 혀를 찰 뿐이다.

그와 동시에 백능은 혹독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긴 하였지.’

세상의 온갖 달콤한 유혹이 발린 이 자리에 서기까지 오랜 세월 동안 유혈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놀랄 일이다.

아마도 그것은 무너질 뻔했던 무림맹이 다시 굳건해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리라.

한 번 무너진 탑을 다시 쌓는 건 새로 짓는 것보다 오히려 더 힘들었다. 깨진 유리를 다시 붙여 새것으로 만드는 것과도 같은 일이지 않은가.

그 속에서 제대로 붙지 못한 균열을 볼 때마다 백능은 그걸 묵과하지 않고 단단히 다시 다져 나갔다.

그렇게 긴 세월이 흘러 반백 년이 지나 당금의 무림맹이 되었다.

세간에서는 예전 같은 회생은 불능이라 여길 만큼 황폐해졌던 무림맹을 이만큼 성세에 올린 것이 바로 백능이다.

해서 그를 우러러보는 무인들이 많았다.

진정으로 무림맹을 아끼고, 개인의 욕심을 버리고 오롯이 무림맹에 평생 모든 것을 바쳤으니 말이다.

물론 그것이 어찌 백능 홀로의 힘으로 되었겠는가?

여러 크고 작은 문파들이 함께 힘을 합쳤고, 여기까지 도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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