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1화
“강시술.”
“……!”
순간 급작스레 튀어나온 단어에 장로들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으나, 곧 평정심을 되찾은 장로들이 질의를 던졌다.
“그, 그것과 환이 대체 무슨 상관이 있다는 말이냐?”
이런 반응들이 재미있는지 휘가 눈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아니지. 상관이 있지. 이 환은 복용하는 순간 바로 강시술보다 더 강력한 생체 무기를 만들어 줄 테니까. 네놈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말이야. 바로 귀마병이라 불리는 녀석이지.”
“……!”
“……?!”
휘의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 한마디는 모두를 들썩이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곧 휘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거무튀튀한 환 하나를 집어 들었다. 색이 극적으로 대조되다 보니 휘의 손이 더욱 돋보이는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여기 있는 새카만 환들, 보이지? 이걸 먹으면 모든 이성을 잃어버리고 철저하게 짐승으로 변해 버린다. 그뿐 아니라, 몸도 강철처럼 단단해지고, 날렵해지지.”
“하면 그걸 복용한 자가 다시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인가?”
진천후의 물음에 휘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이내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즐거움이 가득 묻어 나오고 있었다.
“아니. 이걸 복용한 자는 두 번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지 못해. 그렇기 때문에 이 환이 더 재미있는 거야.”
“그, 그렇다면 그를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저 검붉은 색의 환을 복용한 자인가?”
한 장로가 되물어 오자, 휘가 반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오! 이제 좀 머리가 돌아가는 거야? 네 말이 맞아. 그러니 이 약만큼은 복용하는 이를 고르는 데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게 좋을 거다. 통제자가 죽어 버린다면 변해 버린 놈들이 무자비로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달려들 거야. 다른 통제자를 데려온다고 한들, 이미 한번 정해진 통제자만 따르니까.”
휘는 한 번 말이 통했다고 생각하자 신이 났는지 술술 설명을 내뱉었다.
“아, 그렇다고 통제자를 보호하겠다는 심산으로 너무 멀리 있어도 말을 듣지 않지.”
교묘한 술수는 통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흐음…… 성능이 뛰어난 만큼 불이익도 감수해야 한다는 셈인가.’
조용히 듣고 있던 진천후가 입을 열었다.
“마지막으로 네놈에게 물을 것이 있다.”
여전히 차분한 음성으로 물어 오는 진천후의 시선에 휘 역시 피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말해 봐.”
“어찌하여 네 주군이라는 자는 우리를 도우려 하는 거지? 혹…… 일전에 혈교에 몸이라도 담았던 이인가?”
드디어, 이 환을 보낸 사람을 궁금해한다.
‘성공. 그래, 그 말이 언제 나오나 지켜보고 있었어.’
자칫 말이 통하지 않아 무력이라도 행사해야 하나 싶었거늘, 생각보다 일이 술술 풀리고 있으니 휘의 입장에선 나쁠 것이 없었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탓인지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주군께서 너흴 돕고자 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
모두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쏠릴 무렵.
그의 입가에 즐거워 보이는 미소가 어렸다.
“재미있으니까. 내 주군께서는 삶이 지루한 건 딱 질색이신 분인지라 말이야. 그러니 분발해 주길 바란다.”
“저, 저, 저놈이 끝까지……!”
“아!”
그렇게 몸을 돌리는가 싶던 휘가 진천후를 향해 다가오더니 마지막 한마디를 그의 귓가에 남긴 채, 나타났을 때처럼 어디론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네게는 조만간 다시 찾아오도록 하지.”
파밧-!
휘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그가 들고 왔던 사각 목재 함뿐이었다.
“교주님, 이것이 진짜 그런 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설령 이게 사실이라고 한들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걱정스러운 말투로 말하는 군사에게 진천후가 명했다.
“잡아다 놓은 놈들 중 아무나 한 명을 지목해서 먹여 보거라. 혹시 모르니 단단히 묶어 놓는 것 역시 잊지 말고. 효과를 보는 즉시 내게 보고해. 그러면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있겠지.”
동맹인 듯 동맹 아닌 동맹이 체결되는 순간이었다.
第四章. 진정(眞情)
부엉-
밤이 깊어 가는 묘두응(猫頭鷹) 소리가 적막한 방 안을 울린다.
그와 동시에 하늘 위 높게 뜬 달을 보던 백능의 고민 역시도 그에 따라 깊어져만 간다.
‘천하 무림 대회…… 지금 같은 시기에 여는 것이 과연 옳은 선택인 것인가?’
요근래 백능은 자기 전에도, 밥을 먹을 때도, 씻을 때에도 끊임없이 번뇌에 빠져 있었다. 그 때문인지, 요즘 들어 그의 얼굴에 패인 주름이 더욱 깊어진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으니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천하 무림 대회!
무림맹에서 삼 년에 한 번씩 개최하던 중원 사상 가장 큰 무림 대회다.
본디라면 진즉에 열었어야 할 것이나, 이러저러한 사건들이 몇 해에 걸쳐 터지면서 미루고 미루다 보니, 결국 지금까지 밀린 것이다.
하나 약 보름간의 고민 끝에 백능의 마음은 개최하는 쪽으로 조금 더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때일수록 숨어 있는 인재를 모아야 한다.’
백능 역시 잘 알고 있다.
이미 혈교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이상, 절대로 멈추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달포가 되었건, 몇 달이 되었건, 몇 해가 되었건 그들은 반드시 오랜 시간 동안 갈아 온 분노 어린 칼날을 들이밀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들의 준비는 더욱 철저해질 터.
‘처참한 꼴을 면하려면 지금부터 우리 역시 준비를 해야 하거늘…….’
백능이 속으로 긴 한숨을 내뱉었다.
다들 너무 평화에 젖어 있었다.
‘이미 큰 사건들이 여러 번 지나갔지 않은가? 설마하니 더 큰 위기가 찾아올까?’라며 스스로들을 위안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백능은 더 큰 위기감을 느꼈다.
이미 몇 차례 지나간 태풍은 그에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혜안을 가져다줬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무림에 평화가 이어져 왔구나. 이대로는 아니 돼.’
자신이 추구하는 것도 평화였으나, 아무것도 대비하지 않는 무방비한 모습을 원한 건 아니었다.
평화롭지만, 바깥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 낼 수 있는 힘!
그것이야말로 백능이 생각하는 진정한 평화였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그럴 거라 줄곧 믿어 왔다.
한데 실상은 달랐다.
경험 많은 이들은 앞서 나서긴커녕 자리보전에 급급해져 있다.
무황비고가 열렸을 때도, 혈교의 꼬리를 잡기 위해 내보냈을 때도 모두 새파랗게 젊은 오룡일봉과 송운이 중심에 있었지 않은가?
아니, 정확하게 꼽자면 송운의 공이 가장 컸다.
그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테니.
젊고 뛰어난 무인!
이제는 그들이야말로 작금의 무림맹에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비록 무림맹의 입장에서 보자면 당장 속은 쓰릴 테지만 송운처럼 아직 무림맹에 소속되지 않았으나 젊고 뛰어난 무인들을 발굴해 내야 한다.
백능을 비롯한 무림맹에 속한 많은 이들이 오룡일봉을 매우 뛰어난 후기지수라며 칭찬 일색을 내놓았으나 그것 역시 세상을 더 넓게 보지 못하는 자들의 평일 뿐이다.
‘작금의 무림맹은 너무 틀에 메어 있다. 그것은 나와 같은 우생(愚生) 역시 어느 정도는 마찬가지일 테니…….’
맨 처음 송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백능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사실을 직시하고 인정해야만 했다.
오랜 시간 평화에 물들어 버린 무림맹은 우물 속에 갇혀 버린 개구리 신세가 되어 버렸다는 현실을 너무도 잘 아는 그였기에…….
겉으로 평화로워지니 이제는 새외나, 공공의 적으로부터 무림을 지켜 내는 것보단 그저 서로의 눈치를 보며 각자 가문, 문파의 배를 불리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하다면 정파와 사파가 다를 바가 무엇이란 말이냐?’
정파라는 이름만 뒤집어쓴 채 오롯이 자신들의 배를 불리는 것에만 혈안이 되어 있으니, 사파와 다른 것이라면 겉으로 태가 나지 않는다는 것 정도였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속으로는 조금씩 부패해 가고 있었다.
정말 예전처럼 무로서 정점을 찍고, 성대하던 무림맹의 기세가 세월의 흐름에 한풀 꺾인 셈이다.
물론 피비린내 가득하던 전장을 떠올리면 그것조차 다행이란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나 이미 혈교가 눈앞에 나타난 이 시점에서 나태한 모습을 보이다가는 자칫 큰 사달이 날 것이라는 게 백능의 생각이었다.
그는 조심스레 자신이 알고 있는 무림맹 외부의 무인들을 떠올려 보았다.
‘평서란.’
얼굴은 아직 모르지만 이름만큼은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 아이 역시 황궁의 사람이지. 청명쾌검, 평목단의 외동딸이라 하였던가.’
그 이름을 떠올리자 백능의 머릿속에 흐릿하게 젊은 시절 보았던 평목단의 모습이 기억나기 시작하더니, 점점 자세해졌다.
얼굴을 모르는 여걸 대신 그의 아비를 떠올린 것이다.
단단한 눈매에 또래와 확연히 차이 났던 커다란 풍채, 거기다 어린 나이에 의지가 확고했던 그 모습은 시간이 흘렀으나 쉽게 잊힐 만한 것이 아니었나 보다.
‘세월이 이리도 흘렀거늘…… 참으로 기개가 높던 청년이었지.’
아니나 다를까 이미 황궁에서 어마어마한 전력을 끌어내는데 일조한 장본인이다.
본디 황궁에서도 평가라 하면 그 이름 자체만으로도 최고로 쳐주는 무신 가문이다.
그중에서도 평목단이라는 사람 한 명만 놓고 보자면 백능이 보아도 강호에서 대적할 자는 구주칠대무신에서도 윗선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오죽하면 황권의 강함과 상관없이 늘 황궁의 무인들을 무시하는 무림에서도 그를 무시하는 이가 없을 정도이니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황궁의 무인 중에서 그 정도의 재능을 지닌 이가 나타날 줄은 나 역시 생각하지 못한바.’
백능이 조금 씁쓸해진 입안을 혀로 쓸어내렸다.
이게 현실이다.
물론 송운은 거기서 조금 더 특이한 편이긴 하다.
‘학사 집안 출신이라 하였던가?’
애당초 평목단이나 평서란처럼 무가의 자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마어마한 무공을 지니고 있지 않은가.
이는 유명한 문파가 아니라도 노력과 실력으로 높은 경지를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 준 것이기도 했다.
또한, 그의 이야기는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