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화
탁. 탁.
부스스.
그 말을 들은 검은 가면이 제자리에서 몸을 반 바퀴 빙글 돌려 돌 위에 걸터앉은 채 바닥을 발로 탁탁 찼다.
그러자 그 자리에 신발 자국이 고스란히 새겨지며 돌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렸다.
“나? 내가 누군지 굳이 알려 줄 필요가 있을까? 애당초 너희가 이렇게 허술하게 있으니 내가 쳐들어오기 편했던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그리고 뒤에 너. 괜한 허튼짓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멈칫.
그 말에 조용히 뒤를 점하고 다가서던 이의 몸이 그 자리에 굳었다.
꿀꺽.
검을 거머쥔 손에 땀이 차오른다.
덩달아 주변의 공기까지 팽팽해졌다.
‘어찌합니까?’
종초기는 진천후의 눈치를 보며 의견을 물었고, 그것을 본 진천후가 눈을 슬쩍 흘기며 고갤 저었다.
‘거둬라.’
지금 놈을 건드려 봤자 좋은 꼴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어차피 저러한 방법은 통하지 않을 거라 예상했다마는…….’
잠시라도 시간을 벌며 머리를 굴려 보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도무지 답도 나오지 않았다.
확실한 게 있다면 상대는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라는 것뿐.
“아아, 정말 내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는 건가?”
“…….”
그 말에 유일하게 반응한 건 진천후였다.
“내가 그걸 알면 신선이라도 됐겠지.”
아니꼽지도, 그렇다고 비굴하지도 않은 그의 표정과 목소리는 검은 가면의 흥미를 돋우기엔 충분했다.
“아, 아하하하하하! 혈교의 교주라는 놈이 신선이라. 그랬다면 정말 웃겼겠네. 하긴…… 너희가 날 알 리가 없잖아? 좋아, 장난은 여기서 그만하도록 하지.”
순간, 매 순간 장난기 넘치던 검은 가면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다.
* * *
“주군, 부르셨습니까?”
사박.
작지도 크지도 않은 적당한 키에 호리호리한 몸을 지닌 검은 가면이 살포시 독고백의 앞에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가벼운지 땅에 닿는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왔느냐?”
그가 말을 하자 독고백이 특유의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검은 가면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오랜만에 부르셨습니다. 지시하실 일이 생기신 것입니까?”
“그래. 요즘 혈교가 눈에 띄게 행동을 크게 벌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독고백의 말에 곧바로 검은 가면이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조만간 찾아뵙고 말씀을 올리려던 참이었는데 역시 주군이십니다. 세상 돌아가는 일은 모두 주군의 발밑에 있으니 말입니다.”
세상에 흔해 빠진 아부였으나, 검은 가면 속에서 흐르는 목소리는 너무도 다정하고 진심이 담겨 있어 아부를 받는 이로 하여금 거북하지 않게 만들었다.
독고백 역시 싫지 않았는지 입꼬리가 슬쩍 천장 위를 향한다.
“후후. 그런 잡다한 말은 그만하면 되었다. 이미 충분히 넘치게 들었으니 말이야, 휘아(徽兒)야.”
“예, 주군.”
검은 가면이 부름에 곧바로 대답했다.
“오랜만에 너와 만나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싶으나 네가 해 주어야 할 일이 생겼구나.”
“하명하시옵소서.”
딱!
독고백이 손을 튕기며 소리를 내자, 뒤에 서 있던 하녀가 조용히 걸어 나왔다. 하녀의 손에는 제법 큰 사각 목재 함이 들려 있었다.
휙.
독고백이 또 한 번 더 손짓하자 이번엔 그 하녀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이 자연스레 휘라 불린 이의 무릎 앞에 놓였다.
휘의 장난기 어린 두 눈에 궁금증이 가득 들어섰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나 독고백 역시 곧바로 말해 줄 생각은 없었는지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말한다.
“열어 보아라.”
아마 모르긴 몰라도 그의 표정으로 미루어보아 새 재밌는 장난감을 얻은 게 분명했다.
‘대체 무엇이시기에 이리 즐거워하시는 것이지?’
한두 번 이러했던 것이 아닌지라 익숙하긴 했으나, 이럴 때마다 분명 작지 않은 사건이 터지곤 했으니 함을 여는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끼익.
목재 함이 열리면서 동시에 쇠 특유의 마찰음 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완전히 함이 열리자, 내부에 들어 있던 물건이 모습을 보였다.
바로 수십 개의 동그랗고 새카맣게 물든 단 환이었다.
그중 딱 두 개의 환만이 검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기분 나쁜 검붉은색이네.’
필시 평범한 환은 아니리라.
생각과는 달리 조금 허망한 마음에 기운이 빠진 휘아가 되물었다.
“주군, 이것은 환약이 아닙니까?”
“환약이긴 하나 치료 약이 아니라 귀마병을 만드는 환약이다.”
“……!”
귀마병이라는 단어에 가면에서 유일하게 드러난 휘의 두 눈이 놀란 토끼처럼 휘둥그레졌다.
‘귀마병……!’
생소한 단어가 아니었다.
휘가 아는 바에 따르면 눈앞의 환약은 분명 살아 있는 사람이 먹는 순간 단박에 영혼이 없는 강시 같은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아주 지독한 약이었다.
얼마 전, 귀마병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긴 하였으나, 이것을 이리 빨리 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나 당혹스러움은 아주 잠시일 뿐.
곧바로 독고백의 의중(義衆)을 읽어 낸 휘가 어깨를 으쓱였다. 당금 그가 해야 할 일은 이를 보고 놀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주군, 양이 제법 많습니다. 이것을 누구에게 사용하면 되는 겁니까?”
“후후. 역시 너에겐 귀찮게 설명하지 않아도 돼서 좋구나. 별로 어려울 건 없다. 혈교에 가서 건네주고 오너라.”
연이은 놀라움에 휘의 눈이 다시 한번 솔방울만 하게 동그래졌다.
“혹, 제가 아는 그 혈교 말이십니까?”
휘아의 말에 독고백이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거라면 놈들에게 적어도 문전박대를 당할 일은 없을 테지.”
즐거운지 만면에 미소를 지은 독고백을 향해 휘아가 다시 질의를 던졌다.
“하오나, 주군. 이미 그들에겐 강시술이 있는데 확인조차 되지 않는 귀마병을 쓰려고 하겠습니까?”
“정 믿지 않는다면 그 자리에서 한 놈에게 먹여라. 눈으로 귀마병의 위력만 보여 준 뒤 따로 제어할 것도 없이 죽이면 될 것 아니냐? 놈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아아, 더 이상은 설명도 귀찮구나. 나머진 네가 알아서 하여라.”
독고백이 침상에 누워 손을 까딱거렸다.
‘웬만하면 한 번 정한 일에는 번복이 없으신 분이니.’
그 모습에 독고백의 말대로 더 이상 대화는 필요 없다는 걸 깨달은 휘아가 사각 목재 함을 품에 안고 고개를 숙인 뒤, 나타났을 때와 같이 조용히 사라졌다.
반면, 독고백의 붉은색 눈가가 하늘을 향해 강렬하게 휘어졌다.
‘곧 재밌는 일이 생기겠구나.’
* * *
스륵.
잠시 회상을 마친 검은 가면, 아니 휘가 등에 메고 있던 보자기를 풀었다.
그 몸짓 하나하나에 긴장을 하고 있던 장로들이 마른침을 삼키며 견제하기 바빴다.
“그것은 또 무엇이냐?”
하나, 그 말에 대답하기보다 휘는 곧바로 사각 목재 함을 열었다.
끼익-
채쟁-!
챙!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서슬 퍼런 검들이 휘아를 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휘아는 당황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이럴 것이라 예상한 결과였으니…….
하나 그렇다고 해서 수십 개의 칼끝이 자신을 향해 있는 걸 썩 기분 좋게 받아들일 성격은 아니었으므로 미간을 찌푸리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쯧, 힘이면 다인 줄 아는 무식한 놈들 같으니라고.’
목재 함에서 무언가 위험한 것이 나올 것이라 예상했던 장로들의 예상과 달리 환약이 나오자, 되레 당황하고 말았다.
“저것은 환…… 이 아닌가?”
모두가 멍하니 서 있을 무렵, 먼저 입을 연 것은 진천후였다. 그것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상당히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이다.
“그걸 어디에 쓰겠다는 뜻이지? 설마 이 난리를 피워 놓고 약이나 팔아 보겠다는 건가? 바깥에 널브러진 저들을 치료하라고?”
“쿡쿡, 이번 대 교주는 제법 재치가 있구나.”
“저놈이……!”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도 농을 치는 휘의 모습에 한 장로가 성을 내려 했으나, 그마저도 끊겨 버렸다.
휘의 다음 한마디가 그들을 침착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내 주군께서 너희를 돕길 원하시기 때문이지.”
“……뭐라?”
“갈! 네놈의 주군이 대체 어떤 놈이기에 이토록 건방진 태도로 소란을 일으키면서 환약 따위를 보냈단 말이냐? 그리고 또 하나! 어찌하여 우리를 도우려 한단 말인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란 것이냐? 우릴 끝까지 농락할 셈인 게냐! 아주 건방이 하늘을 찌르다 못해 뚫고 올라가려 하는구나!”
형추인의 목소리에 노기와 내기가 가득 베여 온 대전을 쩌렁쩌렁 울렸다. 흥분한 탓에 전혀 조절을 하지 않아 개중에는 그의 내기에 슬쩍 주춤거리는 이도 있었다.
“교주님, 저 사내인지 계집인지도 모를 것을 제 손으로 처단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모두의 격한 반응을 보며, 시큰둥한 표정을 짓던 휘가 고개를 내저었다.
“거참,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설명이고 뭐고 듣지도 않고 이놈 저놈이래? 그렇게 보기 싫다면 설명할 가치도 없지. 난 이만 돌아가겠어.”
척.
휘아가 망설임 없이 환약이 담긴 함을 닫고 몸을 돌려 버렸다.
척!
그러자 이번엔 진천후가 나서서 그 앞길을 막아 버렸다. 순간 불쾌함을 느낀 것인지 눈을 가늘게 뜬 채, 휘를 노려보며 말했다.
“뭐야? 이야긴 다 끝난 게 아니었나?”
“그쪽 말대로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 봐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누구의 사신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신이라는 명분으로 찾아왔다는 자가 참으로 성미가 급하군.”
“교주님!”
모두가 만류하는 가운데 진천후의 눈이 일순간 붉게 번뜩였다. 그러곤 담담하지만 살기 가득 밴 음성으로 자신의 말을 꿋꿋이 이어나갔다.
“걱정들 집어치워라. 만약 연유를 듣고도 타당하지 않다면 내 손으로 이곳에서 살려 보내지 않을 것이니. 어디서 온 나부랭이인지도 모르는데, 본교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는 이상 그냥 보내 줄 수는 없지.”
“아…… 아하하하하! 정말 배포 하나는 끝내주는구나, 너? 그래 내가 인정하지. 너희들, 이게 뭔 줄 알아?”
끼익-
휘가 닫아 두었던 목재 함을 다시 열어젖히며 말을 이었다.
“그건 환…….”
“아아, 그래. 환약이야, 환약. 네놈들이 보고 있는 대로 환약이라고. 하지만 병을 치료하는 약 따위가 아니야. 오히려 사람을 죽이는 약이지.”
“……죽이는 약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잠자코 듣고 있던 장로 한 명이 되물었다. 어쩐지 감이 올 듯 말 듯한 것이 답답해지려던 순간.
휘의 입에서 익숙한 단어가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