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하. 따지자면 너희 잘못이 무에 있겠느냐? 죄가 있다면 겁쟁이였던 내 아버지를 모신 너희들의 충성심일 터.”
“교, 교주님……!”
진천후의 마지막 말은 그대로 뾰족한 가시가 되어 그들의 마음을 할퀴었다.
힘을 중시하나 모든 게 무너져 내린 혈교는 명분과 정통이 가장 중요했다.
어쩔 수 없이 내린 선택이었지만 결국 그것은 자신들을 몇십 년간 옥죄는 족쇄가 되었다.
진천욱은 아버지인 진천기에 비해 워낙 소심하고 몸마저도 허약했다. 정녕 자신들이 따랐던 진천기의 혈육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하나, 더 이상 선택을 후회하지 않게 된 것은 단 하나.
당대 혈마인 진천후 덕분이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인 진천욱을 이해하지 못했다.
할아버지인 진천기의 복수를 하고 싶었고, 천하를 제패하고 싶은 욕망의 불꽃이 어린 시절부터 가슴에 자리 잡은 채 자라났다.
세월이 흘러 자신들의 교주이자 주군이었던 그의 외아들이 장성했고, 더불어 그 옛날 첫 번째 혈마인 진천기를 쏙 빼닮았다.
그들은 진천후를 보고 새로운 희망을 얻었다.
더불어 자신들은 노쇠했으나, 그 긴 세월 간 진천후만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아이들도 태어났으며, 그 아이들 역시 뛰어난 실력자로 자라났다.
아니, 정확하게는 혹독한 훈련과 시련을 바탕으로 키워 냈다.
거기에 다른 정파와 마교의 눈을 피해 쥐 죽은 듯 살아왔으나,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허송세월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새로 만들어진 그것들이 있지 않더냐.”
강시술.
그것이 바로 혈교의 가장 큰 힘이자 주춧돌이었다.
불태워 사라졌다고 여겼던 금기 책은 살아남은 자들 중 몇몇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고, 그 일부가 다시 세상의 빛을 봤다.
그걸 토대로 절치부심한 끝에 기술은 오히려 성장했다.
한데, 진천후의 말에 교에서 강시술을 전담하는 이의 얼굴에 급격히 그늘이 드리웠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그가 결국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고 비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온데 교주님…… 그것이…….”
“마저 말해 보거라.”
“그, 그것이…… 아직 완벽하게 제조가 이루어지지 않은지라…….”
“아직도 말이냐?”
그 말에 다른 이들 모두의 안면에도 미처 숨기지 못한 아쉬움과 씁쓸함이 드러났다.
“이러한 상황에 말씀드리기 참으로 송구하오나…… 마무리를 짓던 도중 무림맹이 개입하는 바람에 아직 원하던 만큼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하오나 시간만 주시면 빠른 시일 내에 완벽히 준비하겠습니다!”
이에 그의 미간에 작은 주름이 잡혔다.
‘……젠장 맞을 무림맹 같으니라고.’
진천후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괜히 멀쩡했던 속이 쓰리고, 점심에 먹었던 밥이 소화되지 않아 꽉 막힌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다 된 밥에 재를 뿌린 셈이니, 속이 쓰리지 않을 리가 있을까.
그때였다.
그렇게 모두가 아쉬움에 쓰린 속을 다스리고 있을 무렵, 밖에서부터 갑자기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이건 또 뭔…….”
콰앙-!
진천후가 딱히 알아보라는 명을 내리기도 전에 그 소란스러움의 근원으로 보이는 이가 밖에 서 있던 호위무사들을 둘러업은 채 대전 안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왔다.
들어선 이는 겨우 약 오 척을 넘을 듯 말 듯 보이는 신장(身長)에 검은 장포를 둘렀음에도 드러날 만큼 호리호리한 외형을 지녔으며, 얼굴에는 검은 가면을 썼다.
그래서인지 겉모습만 보았을 때는 여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으나, 어깨 너머 장도(長刀)를 둘러멘 것을 보아선 힘이 없어 보이지도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밖에 서 있는 호위무사들은 실력이 제법 높은 이들로만 이루어진 데다 적은 숫자도 아니었다.
한데 그것을 혈혈단신으로 뚫고 들어왔다?
‘대체 어디서 저런 놈이……?’
모두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을 때, 가장 먼저 질문을 던진 건 다름 아닌 진천후였다.
“……네놈은 누구냐?”
묻고 있는 진천후의 표정은 화가 났다기보다는 갑자기 들이닥친 이를 향한 호기심이 가득해 보였다.
그러나 대답은 없었다.
가면을 쓴 자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옷깃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며 사방을 둘러보더니 태연하게 물었다.
툭툭.
“이곳이 혈교인가?”
그 말은 이곳에 모인 장로들을 모두 기겁하게 만들 만큼 파격적이었다.
이곳이 혈교의 내부라는 것을 알면서 어찌 저리도 당당할 수 있단 말인가?
그뿐만이 아니었다.
사내인지 여인인지 모를 묘한 목소리가 모두를 한 번 더 혼란에 빠트리고 있었다.
하나, 그런 소란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진천후는 좀 전과 같이 동일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렇다.”
딱 잘라 답하는 그가 마치 가소롭다는 듯 검은 가면이 코웃음을 쳤다.
“훗, 그렇다면 혈교라는 것도 별거 없군.”
“저, 저놈이……!”
“교주님 제가 지금 당장 저놈을……!”
그저 말 한마디일 뿐이었으나, 그 한마디의 파급력은 컸다.
혈교의 대전에 들어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자신들을 모욕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채쟁-!
챙-!
장로들의 얼굴이 급격히 붉으락푸르락하더니 노기를 감추지 못하고 급기야 곧바로 검을 뽑아 달려들려는 모습을 취하는 이도 있었다.
그런 이들을 막아선 것은 다름 아닌 진천후였다.
“워워, 진정들 해. 너희 모두가 동시에 덤빈다 해도 저 녀석은 꿈쩍도 안 할 거 같은데. 그나마도 얼마 없는 수를 줄일 생각이 아니거든 멈춰라. 아, 튼튼하고 고강한 시신을 바칠 생각이라면 더 해도 좋고.”
그런 장로들을 먼저 막아선 것은 진천후였다.
가벼운 말인 듯 들렸으나 실로 섬뜩한 말이었다.
“교, 교주님!”
“하오나……!”
막아서지 말라는 듯 분노에 찬 눈빛을 보냈으나, 진천후에게 지금 당장은 그들의 외침이 보이지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실로 오랜만에 느껴 보는 두근거림이다.
‘가만 보자. 어디서 느껴 봤더라……?’
진천후는 버릇처럼 손으로 입가를 쓸어내렸다.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느낌을 알아낸 진천후의 입가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의 미소가 나타났다가 곧바로 사라졌다.
두근두근.
고수는 고수를 알아본다.
어쭙잖은 실력을 지닌 놈이 아니라, 진짜 강자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묘한 긴장감이다.
진정한 고수를 만나 본 지가 언제였던가?
자신보다 더 높거나 동등하다고 추측될 만큼의 고수를 만나 본 건 기억조차 까마득했다.
언제부터일까.
스승이라 부르던 이마저도 뛰어넘은 지가.
이제는 너무도 오래된 이야기였다.
혈교에서 가장 높은 실력을 지녔던 그의 조부인 진천기의 실력을 제대로 알아보기도 전에 그가 이미 명을 달리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여전히 진천후의 표정은 평안했지만, 그런 겉과는 달리 속은 조금 애가 탔다.
애가 타는 것은 장로들 역시 마찬가지였으나, 동상이몽(同床異夢).
그들과는 다른 의미로 말이다.
‘……당장 저자와 겨뤄 보고 싶구나!’
하나 그렇다고 하여 저 검은 가면이 자신을 이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단지 당금 진천후 주변을 통틀어 그 누구보다 가장 강하다고 여겼기에 재밌는 상대 거리로 바라볼 뿐.
상대를 향해 피어오르는 호승심과 교주의 위치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마음이 서로 충돌했다.
점점 그의 눈빛이 붉은 광기로 물들어 갈 무렵, 그의 머릿속에 아주 익숙한, 너무도 아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후야…… 쿨럭! 너는 이제 나를 대신하여 이들을 이끌어 나가야 하느니라…… 너는 호승심이 너무 강해. 늘 책임감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그것을 꼭 명심 하거라…….”
‘……조부님!’
잠시지만 강렬히 피어오른 호승심과 광기가 그를 집어삼키려 했으나, 그 목소리 덕분인지 기괴하게 붉어지던 진천후의 눈빛은 순식간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래서일까?
검은 가면을 바라보는 진천후의 동공은 더더욱 차갑고 매섭게 변하기 시작했다.
이성을 되찾고 나니, 그에 대한 호승심보다는 경계심 쪽의 무게가 더욱 무거워졌다.
혈교의 교주인 자신에게 이토록 막 대하는 기세하며, 혈혈단신으로 혈교에 달려든 이의 정체가 궁금했다.
‘……재밌는 녀석이군. 놈일지 년일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 모습을 포착한 검은 가면이 갑자기 미친 듯이 손뼉을 쳤다.
짝짝짝-!
“풋, 교주라는 놈은 제법 상황 판단이 빠르구나. 훌륭하구나, 훌륭해. 그래, 한 무리의 수장이라는 이가 이 정도 머리는 굴러가야지. 재미는 조금 떨어지지만 말이야.”
“아니, 저놈이 그래도! 입을 열 때마다 아주 오만방자하기 그지없구나!”
“교주님, 제가 저놈의 목을 베어 오겠나이다!”
그때였다.
쌔액-! 캉!
챙그랑.
털썩.
“커억……!”
일은 눈 깜짝할 새에 벌어졌다.
잠시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 정체 모를 검은 가면의 뒤에 서 있던 이가 달려든 것이다.
하나 그 검은 목표물에 닿기도 전에 튕겨 나갔다.
‘역시, 몸놀림이 아주 빠르군.’
하나, 그것만으로 놀라기엔 너무 일렀다.
동시에 눈에 보이기도 전에 뽑힌 검은 가면의 칼등에 복부를 맞고, 내상을 입은 채 바닥에 내팽개쳐진 것이다.
다른 이들은 거의 보지 못한 듯했으나, 진천후는 똑똑히 보았다.
분위기가 싸늘하게 얼어붙는 것 역시 순식간이었다.
“네놈들 수장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 난 지금 이 자리에 싸우러 온 게 아니거든. 지금은 그다지 피를 보고 싶지도 않고…….”
빙긋.
“저, 저놈이 감히……!”
“이런 건방진 놈이 다 있나!”
말하며 얄궂게 웃음소리를 흘리는 검은 가면의 모습에 장로들의 몸이 분노로 떨려왔다.
하나 좀 전과 달리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달려 나갈 것 같던 기세는 누그러져 있었다.
방금 전 손보인 실력을 가늠해 보았을 때 막무가내로 덤빈다고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리라.
모두가 놀라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도 침착성을 잃지 않은 이는 한 명 더 있었다.
스릉-
혈천마수(血川魔手) 형추인(衡推引).
혈교의 장로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이였다.
그는 어느새 조용히 검을 뽑아 든 채, 검은 가면을 향해 물었다.
“대체 누구기에 이곳을 알고 찾아온 것인지, 어찌하여 이곳까지 온 것인지 정체를 밝혀라. 그렇지 않는다면 네놈은 이 자리에서 무사히 살아나가지 못할 것이다.”
하나 그런 형추인의 말도 무용지물, 허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