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이 틈을 타, 동맹의 찬성편에 섰던 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가장 먼저 의견을 내세운 건 화산파였다.
“찬성이고 반대고 할 것이 무엇이란 말이오? 이미 이 무림맹의 최고 권위자인 맹주님께서 정하신 일이지 않소? 더구나 총군사께서도 직접 그 의견에 동의하셨다고 하니, 이는 필히 동맹을 하여 우리가 손해를 볼 것이 없다는 충분한 판단 후에 이루어진 것일 터! 대체 그대들은 무엇이 문제인 것이오?”
“허어……!”
“끙!”
사람들의 탄식을 뒤로 한 채, 화산파 장로의 의견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거의 몰락 직전까지 갔던 우리 무림맹을 다시 세운 것이 지금의 맹주님이시니, 우리는 믿고 따르면 되는 것 아니겠소?”
그때 다시 나선 것은 점창파(點蒼派) 장로였다.
목소리에 흥분이 가득했으나 억지로 내리누른 듯한 목소리였다.
“이 보시오들! 아무리 그래도 정파와 마교와 함께 손을 잡는다는 일 자체가 무리인 것 아닙니까? 하물며, 갑자기 마교 놈들이 혈교와 손을 잡고 우리의 뒤통수라도 치면 어찌합니까?”
“허허……. 하면, 이렇다 할 뾰족한 묘안이라도 가지고 있는가 보오. 이렇게 말이 나온 김에 얘기해 보시구려.”
그 말에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종남파의 장로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인자하게 말을 꺼내자, 그 뒤로 대답을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 그 누구도 이 이상의 현답을 내놓기 어려운 실정이었기 때문이다.
그 침묵 속에 조용히 듣고 있던 제갈염이 거들었다.
“저 역시 장로분들께서 무엇을 걱정하고 계시는지 잘 압니다. 하나,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모두가 아시다시피 혈교 역시 이미 오래전 마교에서 버림받은 존재였습니다. 또한 그 두 집단끼리도 이미 생과 사를 오가는 전투를 치렀지요. 그때의 전투에서 피해를 입은 것은 우리 정파만이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맞소. 적어도 마교가 우리의 친우가 될 수는 없을 터나, 적의 적은 나의 아군이라는 말이 있지.”
“커흐흠!”
말을 꺼낸 것은 현 남궁세가의 장로이자 무림맹 내부에서도 제법 높은 신위를 얻고 있는 남궁진혁(南宮眞侐)이었다.
그의 말을 끝으로 더 이상 소란은 일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제갈염을 생각한다면 정말 말도 되지 않는 무모함에 몸을 던졌으리라곤 생각되지도 않을뿐더러, 찬성 쪽의 말대로 이미 공식적으로 성사된 동맹을 어찌 다시 끊는단 말인가?
번복할수록 속절없이 시간만 더 지체될 뿐.
더구나 제갈염이 처음 했던 말처럼 지금 무림맹의 힘만으로는 혈교를 잡기엔 무리일 수 있다.
결국 그들 역시 따라갈 수밖에 없는 처지인 것이다.
“거 뭐, 이미 이렇게 된 마당에 혈교 놈들만큼은 제대로 뿌리를 뽑아야 할 것이오!”
“암, 그래야 하고말고!”
마교와 손을 잡은 이 마당에 목적마저도 이뤄내지 못한다면 이는 정말로 무림맹의 위신을 스스로 땅에 가져다 처박는 꼴이 될 테니 말이다.
끝끝내 고집을 부릴 것 같던 반대파 장로들이 그제야 휘어지는 유연함을 보이자, 제갈염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쳐졌다.
“물론 모두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 * *
무림맹에 한바탕 큰 소란이 일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무렵.
잡음이 일어난 것은 혈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로 빠르게 퍼진 소문이었던 탓에 혈교의 귀에도 닿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소식을 전해 들은 혈교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상실될 판이었다.
설마하니 역사에 단 한 번도 없었던 이례적인 동맹이 지금 자신들로 인해 성사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말이 사실인가?”
중년인은 자신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오는 것을 간신히 정신력으로 부여잡으며 자신의 눈앞에 앉아 있는 이를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유독 그의 얼굴이 자세히 보였다.
부리부리한 눈에 좌측 눈을 가로지르는 큰 흉터, 적당히 우뚝 솟은 콧대, 입꼬리는 일(一)자로 굳어져 두툼한 입술을 두드러지게 만들었다.
심기 불편함이 가득 담겼으나, 제법 잘생긴 얼굴과 더불어 길고 커다란 손과 몸집을 지닌 거대한 사내가 바로 이번 대 혈마(血魔)인 진천후(秦天后)였다.
전대 혈마인 진천기(秦天氣)의 유일한 손자이자, 그가 지녔던 무인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진천후는 배포가 크며, 검의 귀재였다.
반면 그의 아버지인 진천욱(秦天煜)은 소심하며, 유약했다.
상황이 그러하다 보니 진천후는 남은 혈교의 희망이자 빛이었다.
그런 그가 이러한 궁벽한 곳에서 아직까지 날개도 펴 보지 못한다는 사실이 늘 안타까울 뿐.
‘이런 비좁고 어두운 곳이 아니라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셔야 할 분이시거늘…….’
잠시 감성에 잠겨 있던 조익기(曺翼旗)는 이글거리는 진천후의 두 눈과 잠시 스치며 마주한 그 강렬함에 황급히 눈을 바닥으로 한껏 내리깔아야만 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흉포함과 무게감을 가득 담고 있는 사내였다.
방금 전에 일었던 안쓰러움까지 한 방에 날려 버릴 만큼 말이다.
진천후는 일전에 모셨던 상관보다 더하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은 사람이다.
‘그래, 나 따위가 감히 안쓰럽게 볼 분이 아니시다. 앞으로 더 드넓은 세상을 호령하실 분이 아니신가?’
뭔가 장렬한 표정을 지은 조익기는 더 대답이 늦으면 무엇이라도 당장 날아올까, 노심초사하며 황급히 대답했다.
“예, 예! 사, 사실입니다!”
조익기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진천후의 주먹이 의자를 향했다.
“어찌, 어찌, 어찌……!”
콰앙-!
콰지지직!
결국, 그의 손에 앉아 있던 의자가 산산이 조각났다.
‘도대체 어찌하면 이리도 한결같이 성질이 불같으신지…… 이천백서른두 번째 의자가 결국 또 저렇게 가는구나. 내 너의 명복 역시 빌어 주마.’
지금 당장 목이 달아나도 이상하지 않을 테지만, 중년인은 그 와중에도 의자의 명복을 비는 것을 잊지 않았다.
사실 짧으면 짧고 길면 길었던 시간 동안 그를 보필하면서, 이렇게라도 해야 자신의 불안감이 조금이나마 가라앉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눈앞에 앉은 이 사내는 겁이 많은 것을 질색했다.
하여 조금이라도 겉으로 티를 내는 것을 막기 위한 그만의 방식이었다.
“……지금 바로 장로들을 다 불러오도록 해. 당장!”
“예, 예!”
第三章. 동맹 아닌 동맹
얼마 지나지 않아 조용히 그림자 여러 개가 대전으로 향했다.
약 열 명에 가까운 그들은, 나이대가 제법 다양한 편이었으나, 이미 지천명을 훌쩍 넘어 보이는 이들이 대다수였다.
동일한 점은 그들의 얼굴이 모두 하나같이 밝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결코 좋은 일로 불려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미리 들었기 때문일 터.
‘후우.’
제각각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오긴 하였으나, 긴장감에 속이 미식거리고 울렁이는 것까지 막지는 못하였다.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터졌다는 소식은 그들마저도 멍하게 만들 만큼 충격적이었다.
하나 이미 부름을 받은 이상 자리를 피할 수는 없는 법이다.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대전 안으로 향하는 장로들이었다.
* * *
“이제 어찌하면 좋겠느냐?”
“…….”
진천후의 목소리는 다그치는 것도 분노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용솟음치는 것도 아니었으나, 그 물음에 누구도 먼저 성급히 입을 열 수 없었다.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입을 다물고만 있자 이번엔 조금 다그치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째 누구 하나 대답하는 이가 없어? 내가 네놈들을 잡아먹기라도 한다더냐?”
사실이다.
그가 비록 평소 욱하거나 화를 잘 내긴 하나, 성격이 그러한 것이지, 결코 자신의 수하를 죽이거나 하는 적은 없었다.
혈교에 남은 사람이 워낙 귀하기도 했지만, 모두 하나같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려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진천후는 생각보다 자신의 수하들에게 관대한 주군이었다.
어쨌거나 그 말이 안도감을 들게 한 것일까.
그제야 한시름 놓은 이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것이…… 아무래도 둘이 힘을 합쳤다고 하니 찝찝한 건 사실입니다, 교주님. 적과 적이 힘을 합치는 것은 우리 혈교에 썩 좋지 못합니다.”
그러자 이번엔 흰 눈썹이 위로 추켜올려져 인상이 험상궂은 이가 반박했다.
예전 마교와의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던 추혼사검(追魂邪劍), 종초기(宗招基)였다.
“누가 지금 그것을 모를 것 같으냐? 이 답답한……!이럴 줄 알고 내가 가장 먼저 너덜너덜해진 마교부터 털자고 했을 때, 네놈이 뭐라 그랬느냐?! 무조건 우릴 건들기 시작한 정파 먼저 쳐야 한다고 하지 않았더냐!”
“뭐라? 네노옴?! 지금 네놈이라 했소?”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요했던 대전이 시끄러워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서로가 네 잘못이라며 매도했고, 그러니 애초에 마교 먼저 치면 되지 않았느냐부터 시작된 말싸움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결국 그들을 언짢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진천후가 입을 열었다.
“……그만.”
“이렇게 바보같이 숨죽이고 있다가 당한 것 아니었느냔 말이야! 우리의 전력 중 하나인 천지쌍비가 어이없이 죽었단 말이다!”
“아니, 그래도 이놈이……!”
“그만…… 모두 다 그 입 닥치란 말이다! 그딴 정파고 마교고 한꺼번에 다 털어 버리면 그만 아니더냐!”
지잉-
진천후의 입에서 거대한 내력이 쏟아져 나오자, 모두 일시에 귀를 틀어막아야 했다.
자칫 조금만 힘 조절을 잘못했다면 내상까지 입었을지도 모를 힘이었다.
그만큼 진천후의 심기가 많이 뒤틀렸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들 귀를 틀어막느라 고요해진 장내를 둘러보던 진천후가 안면에 만족의 미소를 띠었다.
“이제야 좀 조용하구나.”
“소, 송구합니다, 교주님.”
“저희가 감히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벌하신다면 기꺼이 받들겠습니다.”
하나 방금 전과 달리 진천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됐다. 그만하면 됐어. 고작 그런 말을 들으려고 내가 너희를 부른 것이 아니지 않더냐?”
“…….”
진천후의 말에 모두 다시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진천후는 답답했는지 옷고름을 풀어 재꼈다.
그러자 옷 속에 숨겨져 있던 탄탄한 그의 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의 몸에는 자잘한 상처들이 무수히 새겨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