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화
노인의 얼굴은 평온하였으나, 은연중 퍼지는 강압적인 기운은 구천악이 느끼기에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이거야 원, 시작부터 지는 꼴이로군. 후우……!’
끝끝내 말 한마디도 지지 않는 노인의 모습에 결국 사내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삼키고서야 먼저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설마 겁도 없이 정말 홀로 찾아올 줄이야. 아! 물론 그 정도 깜냥도 되지 않을 거란 상상은 하지도 않았지만 말이지. 만일 그랬다면 우리 교단의 길이 남을 비웃음거리로 전락했을 텐데……. 이거, 참으로 아쉽게 되었군그래.”
전략을 바꾼 듯 비꼬는 사내의 모습에 노인이 그제야 잔뜩 굳었던 얼굴을 펴고선 파안대소하였다.
“껄껄! 비록 이 늙은이가 혈혈단신으로 이곳까지 따라왔다만…… 자네가 그리 쉬이 농을 꺼낼 상황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네.”
하나, 웃음도 잠시뿐.
노인은 결코 우위를 놓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내비쳤다.
‘능글맞은 늙으니 같으니라고.’
그 말인즉 비록 자신이 늑대 소굴 안에 발을 들였으나, 바깥에선 호랑이들이 버젓이 돌아다니고 있으니 네가 마음 놓고 날뛸 자리는 없다는 뜻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본론부터 얘기하는 게 서로에게 훨씬 좋겠군, 백 영감.”
흰 백발의 노인은 다름 아닌 무림맹주 백능이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사내는 바로 천마 구천악이었다.
“후우…… 어차피 서로 알 거 다 아는 사람끼리 쓸데없는 말장난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넘어갑시다. 영감도 알다시피 혈교의 잡놈들이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호오? 그렇단 말인가? 지금 말하는 혈교가 설마하니 내가 아는 그 혈교가 맞는 것인가?”
까득.
전혀 모르겠다는 듯 태연히 말을 잇는 백능의 모습에 구천악의 속만 점점 썩어들어갔다.
‘이…… 빌어먹을 능구렁이!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모르는 척을 해?’
구천악은 ‘동맹이고 뭐고 다 집어치워!’라는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간신히 집어삼켰다.
구천악의 유일한 장점인 이성의 끈을 이렇게 놓쳐선 안 된다.
게다가 이제 와서 물러날 수는 없었다.
그러하기엔 당금 마교는 너무 미약했다.
이미 충분히 동맹으로 인해 생겨날 모든 사항들을 고려하고, 또 고려해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마련한 자리가 아니던가.
만일 아무 소득 없이 무산된다면, 이대로 홀로 혈교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을 터.
수십 년 전 있었던 그 사건에서 혈교를 무너뜨리는 데 동조했던 마교이기에 자신들 역시 안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첩첩산중(疊疊山中).
그야말로 최악과 최악이 겹친 상황인 것이다.
혈교가 검을 뽑아 드는 날, 독기 서린 칼날의 끝은 가장 첫 번째로 마교를 향할지도 모른다.
부르르.
보이지 않는 불길함이 구천악을 엄습해 왔다.
스스로의 힘으로 마교의 가장 높은 자리에까지 오른 구천악이나, 그만큼 혈교의 무서움 또한 잘 알기에 무시할 수 없었다. 애당초 그들이 무섭지 않았다면 제거하려 그토록 노력하지도 않았을 터다.
‘재수 없긴 하지만, 방비책은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
으득.
그렇게 구천악이 속앓이를 하고 있을 무렵, 백능 역시 마냥 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라고 어찌 편하겠는가.
이미 여러 번 혈교의 꼬리를 잡으려다 번번이 실패한 탓에 그들의 세력을 측정해 낼 길이 없었다.
빨리 손을 쓰지 않는다면 역으로 당하는 것은 순식간일 터였다.
무공을 배운 이건, 배우지 않은 이건 놈들의 세상을 향한 원한이 서린 검의 끝은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들 것이다.
그러한 실정에 때마침 구천악이 먼저 음지에서 맹주에게 은밀히 손을 뻗어 왔다.
마교와 손을 잡는다면 무림맹의 손실을 최대한 줄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위험을 무릅쓰고 나온 자리였다. 이미 그 당시 무림맹이 한번 크게 휘청거려 봤기에 정파고 마교고 둘 다 혈교에게 잡아먹힐 가능성을 배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이것은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오로지 백능 혼자만의 판단이었다.
지금쯤 무림맹에선 자신이 없어졌다는 소식에 발칵 뒤집어졌을 게 눈에 선했다.
하루아침에 잘 자고 있던 맹주가 사라졌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하여 조그맣게 적어 두고 나온 서신을 누군가 발견하였길 바랄 뿐이다.
백능은 조용히 제갈염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만일 총군사가 알았다면…… 조심히 다녀오라며 보내 주었을까? 허허.’
아마도 자신이 아는 그라면 순순히 보내 줬을 것이다.
제갈염은 그리 꽉 막힌 처사가 아니었으니까.
이해득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움직일 줄 아는 훌륭한 군사였다.
그랬기에 젊은 나이에 그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외의 장로들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막아섰겠지만 말이다.
하나 백능 역시 애당초 그러한 이해득실이 없었더라면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역시도 나고 자라길 정파의 사람.
수많은 목숨을 생각해야 하는 무림맹의 맹주가 아니었다면 백능의 성격상 저 흉악한 마교와 손잡을 생각 따위는 추호도 하지 않았으리라.
다만, 아무리 이해득실이 맞아떨어진다고 해도 덥석 마교와의 손을 잡는다면 정파의 위신이 땅에 떨어지는 건 순식간이다.
흔히 말하는 명분이 주어졌다 하여도, 사정을 모르는 일반 사람들의 눈으로 보자면 악은 악일 뿐일 테니 말이다.
해서 계속 구천악의 속을 긁어 대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혈교라는 거대한 공공의 적이 나타났다고 한들, 그러한 사정을 알지 못하고 떠들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에게는 그저 씹기 좋은 먹잇감이 될 뿐이니…….’
백능의 걱정은 오롯이 그것뿐이다.
하늘 아래 무림이 형성된 이래, 찾아볼 수 없는 전대미문의 일인 만큼 백능은 조심의 조심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 그는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때를 노리는 중이었다.
‘이 정도 했으면 천마 녀석도 충분히 파악했을 테지. 나 역시도 이 이상의 밀고 당기기는 위험한 줄타기와 같으니.’
만일 구천악이 성격이 급한 자였다면 이 정도로 끌지도 못했을 것이다.
백능이 조심히 눈을 감았다 떴다.
진중하게 고민을 해야 할 일이 생길 때마다 보이는 그의 버릇이자 습관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편안히 쥔 듯한 두 주먹 속에는 겉에선 보이지 않는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웬만한 일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백능의 성정을 떠올리면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그가 긴장하고 있다고 볼 수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는 기 싸움.
어느새 세상의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공간 속에 백능과 구천악만 남은 것 같은 착각이 들 만큼 고요했다.
계속된 정적은 서로를 점점 긴장의 끝까지 밀어붙였고, 결국 먼저 백기를 든 쪽은 다름 아닌 구천악이었다.
“좋아, 좋다고! 영감탱이, 그 동맹인지 뭔지! 까짓것 한번 맺어 보자고 우리도.”
하나 어렵사리 먼저 말을 꺼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되는 고요한 방 안의 정적은 점점 구천악의 속을 타들어 가게 했다.
‘뭐야, 설마 이래도 안 하겠다고……?’
쾅-!
쨍그랑!
“아니, 대체……!”
제법 길었던 이성의 끈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
굳게 닫혀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던 백능의 입에서 오랜 시간 끝에 드디어 답이 흘러나왔다.
“좋네. 그 동맹이라는 것. 어디 한번 해 보도록 함세. 하나, 그 전에 자네에게 요청할 것이 있네.”
‘끙…… 저 영감탱이가.’
속이 아리다 못해 이젠 피가 거꾸로 치솟을 것만 같았으나, 먼저 숙이고 들어온 쪽은 자신이었다.
마지못한 구천악이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열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뜸 들이지 말자고.”
긴 무림의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정파와 마교의 동맹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 * *
정파와 마교의 동맹 소식이 퍼지는 건 정말 순식간이었다.
백능이 무림맹으로 돌아온 지 몇 시진 지나지 않아 마교에서 먼저 동맹을 원한다는 서신이 날아왔고, 이에 긍정적인 답변을 내렸다는 이야기가 떠돈 것이다.
그로 인해 가장 시끄러운 측은 각 문파의 수장들과 무림맹의 장로들이었다.
다만, 반대의 의견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아니, 이게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그러하오. 맹주께서 직접 결정하신 일이라고 하더이다.”
“끙…… 결국 맹주께서 사건을 하나 거하게 치셨군그래.”
곤륜파(崑崙派) 장로가 고개를 내저었다.
“난 이해할 수 없소. 어찌 이런 중대한 사항을 아무리 맹주라 할지언정 혼자 정하고, 홀로 동맹을 맺어 버릴 수 있단 말이오!”
반대의 이야기가 크게 터져 나올 무렵, 누군가 그 의견에 이의를 표했다.
“크흠! 무림 역사상 최초의 일이긴 하나, 나는 맹주님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오만.”
“허어, 양 장로! 아무리 맹주의 편에 섰다고 한들……!”
“이보게, 말을 가려서 하시게! 감히 맹주님을 그렇게 함부로 부르다니!”
쾅!
“설마 맹주님께서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런 중대 사항을 결정을 내렸겠소이까? 이는 분명 이해득실이 분명하니 이루어진 동맹이라 생각하오.”
“맞소이다. 애당초 혈교가 이렇게까지 나온 마당에, 우리의 힘만으로는 결국 이전의 꼴이 날 게 뻔하지 않소?”
누군가 꺼낸 혈교의 이름은 순간적으로 모두의 분위기를 차갑게 얼려 버렸다.
서로 알면서도 쉬쉬하고 있던 이름이다.
반대만 하고 있던 측에서 당황하고 있을 그때.
굳게 닫혀있던 문틈 사이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또한, 제가 맹주님의 의견에 힘을 실어 드렸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번 전투에서만큼은 우리 측 사상자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함입니다. 이미 한 번 크게 휘청였던 무림맹이 아닙니까?”
장로들 모두 익히 알고 있는 이의 목소리였다.
무림맹의 두뇌 중 최상위에 서 있는 자, 바로 제갈염이었다.
“총군사!”
“사정이 생겨 조금 늦었습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주십시오.”
제갈염이 고개를 숙이며 양해를 구했다.
그 모습에 반대파에 놓였던 이들은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는 것이 당연했다.
이렇게 된다면 무림맹주의 독단으로 인해 생긴 동맹이 아니라, 총군사의 의견까지 반영된 것이 되어 버린다.
그렇다면 반대의견을 내세우던 그들에게 명분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