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156화 (156/275)

제156화

소수신녀(素手神女) 여위(呂委).

아미파를 대표하여 나온 아미파의 장문인이었다.

사내들이 한참 동안 서로를 물어뜯을 동안,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기에 오히려 그 말의 파급력은 컸다.

“크흠……!”

“큼!”

“예부터 말하길 등하불명(燈下不明)이라 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결국 우리의 불찰입니다. 이제 와 서로의 잘잘못을 따지면 무엇 하겠습니까? 이렇게 서로 손가락질해 봤자 변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보시오, 여 장문! 이것은 필히 우리 세 문파의 수치로 역사에 길이 남을게요. 무려 세 문파가 지키는 사천에서 이런 무도한 일이 벌어지는 걸 몰랐다는 사실을 강호의 무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소! 여 장문은 이 일이 정녕 아무렇지 않은 것이외까?”

독사처럼 날카롭게 쏘아붙이는 당천립의 말에 여위의 곱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하나 언제 그랬냐는 듯 온화한 얼굴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그러곤 아직 채 김도 사라지지 않은 뜨거운 차를 입에 한 모금에 삼켜 버렸다.

호록.

‘저, 저, 저……!’

‘윽……!’

달그락.

“하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두 중년 사내들과는 달리, 부처와도 같은 온화한 얼굴의 여위가 들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뒷말을 이었다.

“……?”

“제가 모르는 사이 당 가주께선 이미 흘러간 시간을 돌리시는 술수라도 배우셨나 봅니다. 그것참, 탐이 나는 술수로군요.”

말하는 여위의 입에선 뜨거운 김이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한데도 정작 본인은 아무렇지 않아 보이니 두 사람이 오히려 할 말을 잃어버렸다.

마땅히 반박할 말도 없었을뿐더러, 자신의 목구멍이 다 데인 것 같은 느낌에 눈살마저 찌푸려질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체 왜……?’

그녀는 화를 낸 것도, 재촉을 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외모가 험상궂게 생겼다든지, 살기를 내비친 것도 아니다.

한데 이상하게도 그녀가 내뱉은 말은 묘하게 당천립을 압박해 왔다.

돌이켜보면 여위는 예전부터 그랬다.

결국 그녀의 눈초리를 이기지 못한 당천립이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 그런 건 아니오만……! 크흠.”

“이런 식으로 서로 물어뜯고, 싸우자고 모인 것이라면 저희 아미파는 이쯤에서 일어나도록 하겠습니다.”

“허어! 이거 참!”

“뭐, 여 장문이 나서니 이제야 대화가 되는구려. 우리가 싸우려고 만난 것은 아니지.”

독비량이 여위의 말을 거들며 턱을 치켜들자 여위가 속으로 혀를 찼다.

평소 온화한 성격으로 명성이 자자한 그녀로서도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기 때문이리라.

‘……어찌 이리도 이기적이란 말인가. 각 파의 머리라는 자들이 이러니 사천성에 구멍이 뚫리는 것 아니겠는가?’

속으로 씁쓸함을 삼킨 여위가 말을 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독 장문인께서도 딱히 잘하신 건 없는 것 같군요.”

“큼……! 아니, 내가 지금 잘잘못을 따지자고 하는 게 아니잖소?”

“뜻이야 어찌 되었건 이번 사건은 세 문파 모두의 불찰임은 변하지 않는 사실입니다. 해서 앞으로 사천성에 있을 큰 불화에 대응하기 위해 세 문파 모두가 힘을 합쳤으면 합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오?”

그녀의 제안에 당천립과 독비량 둘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동시에 여위를 바라보았다.

“당금 무림맹은 겉으론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두 개의 파로 갈린 지 제법 되었지요.”

그 말에 두 사람 모두 동시에 고개를 주억였다.

말 그대로 현재 무림맹은 단단해 보이는 겉모습과는 달리 속은 점점 썩어 가고 있었다.

평화가 지속될수록 말이다.

다행이면서도 신기하게도 이번 대 후기지수 모두가 속한 문파와 세가들은 무림맹주의 편이었으나, 그 외 문파나 세가들 상당수가 반대편에 서 있었다.

어쩌면 오랫동안 이어져 온 맹주의 권세(權勢)를 시기하거나, 질투해서일지도 모른다.

‘그 관점에서 본다면…….’

어쩌면 이번 일은, 누군가 의도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여위였다.

정파의 누군가가 작정하고 뒤를 봐주지 않은 이상, 혈교가 이토록 조용히 사천 땅에 스며들어 머무를 수는 없었다.

“어쩌면 우리의 반대편에 선 자들이 암암리에 혈교를 도왔을지도 모릅니다.”

“뭐라?! 이이……! 이런 파렴치한 놈들 같으니!”

콰앙!

당천립의 커다란 포효와 함께 내려친 탁자가 맥없이 반으로 갈라졌다.

“아무리 반대편이라 한들 어찌 정파의 기치(旗幟)를 걸고 악랄한 혈교와 손을 잡는단 말이오! 그게 도대체 누구요?! 내 당장 놈들을 갈기갈기 찢어야 속이 풀리겠소!”

이번에도 당천립과 독비량이 길길이 날뛰었다.

혈교라는 공통의 적 때문인지, 좀 전의 싸웠던 모습을 뒤로하고 둘의 의견이 찰떡처럼 들러붙는 순간이었다.

무림이 열리고 정파가 늘 협과 정의의 편에만 섰던 것은 아니다.

하나, 아무리 그렇다 할지언정 본질만큼은 잊어 본 적이 없다.

그만큼 그들의 입장에서는 치욕적인 일이었다.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여위의 입에서 여태껏 들어 보지 못한 깊고 무거운 한숨이 천장을 가득 적셨다.

“후…… 저도 아직은 추측에 불과합니다. 해서, 조만간 맹주님께 조용히 들러 보고 할 생각입니다.”

“허……! 이 어찌……!”

연달아 탄식을 내뱉는 그에게 여위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비록 이미 일은 터졌고, 세 문파 모두 무림맹에 포함되어 있다고는 하나, 무림맹에 속하기 전부터 이곳 사천성은 우리의 기반 아닙니까? 후대를 위해서라도 힘을 합치는 것이 맞다 생각하여 우리 아미파에서는 그리 결정을 내렸습니다만…….”

이건 또 무슨 말이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두 사람을 향해 여위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물론 우리 아미파만 원한다고 하여 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요. 하여 나머지 두 문파는 어찌 생각하시는지 오늘, 그 의견을 듣고자 이 자리에 나온 겁니다.”

그제야 그녀가 자신의 본심을 꺼냈다.

여위의 말은 말 그대로 여태껏 각자 해 왔던 대로의 방식이 아닌 하나로 뭉치자는 의견이다.

아무리 조용히 나타나 처리하였다고는 하지만, 이것은 세 문파 어느 쪽도 납득 할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다.

지금까지 가까운 세 문파가 중구난방으로 각자 ‘자신의 집 앞은 자신이’라는 방침을 가지고 보안 활동을 해 왔다.

사천성은 땅이 넓지만 세 문파의 중심지는 비슷한 위치에 몰려 있다.

그러다 보니 그 경계가 애매모호하여 서로가 서로의 보안 구역을 넘나들다 보니, 불필요한 부딪힘을 피하고자 언제부턴가 조금씩 틈이 벌어진 것이다.

아마도 이번 사건은 그 틈을 아는 이들이 파고든 것일 터. 더불어 이 사실은 겉으로는 드러난 바가 거의 없었다.

하니, 그러한 것까지 모조리 꿰고 있는 정보 단체나 내부인의 도움을 받았어야 알 수 있는 장소라는 말이다.

만일 영향력 있는 타 문파나 세가의 도움이 없었다면 남는 것은 오롯이 사천의 세 문파 중 하나일 것이다.

어느 쪽이든 여위의 제안에 응하지 않는다면 흉수로 지목당할 것은 뻔한 일이었다.

여위는 바로 이 점을 꿰뚫은 것이다.

당천립과 독비량의 표정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진중해졌다.

비록 이번 사건의 치욕은 잊지 못할 테지만, 앞으로 또 있을지 모르는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함은 여기 있는 세 명 모두 똑같은 심정이었다.

얼마간의 침묵이 이어졌을까.

입안이 잔뜩 메말라 갈 때쯤, 먼저 답을 한 것은 당천립이었다.

“크흠…… 경계와 보안 정도라면 서로 협정(協定)을 맺는 것에 대한 의의는 없소. 하나, 다른 장로들의 의견을 듣고 난 다음에 다시 연락을 드리리다.”

그러자, 지지 않겠다는 듯 독비량 역시 답해 왔다.

“그것은 우리 청성파도 마찬가지오. 아미파의 뜻이 그러하고, 사천당문 역시 그러하다면 우리 청성파 역시 반대할 처지는 아닌 것 같구려.”

여위가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각 문파의 장문인으로서 그 정도의 대답은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을 테지만 서둘러서 될 일은 아니었다.

‘여기까지.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결코 쉬이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문제는 이 이후의 모습이다.’

이것은 서로의 자긍심을 건드린 문제였다.

만일 혈교와 손을 잡은 이가 있다면 뒤가 구릴 테니 분주해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흔쾌히 협상에 손을 내밀 것이다.

애당초 그것을 알아보기 위해 꾸려진 자리이니 급할 필요가 없다.

“그럼, 이로써 세 문파의 정담(鼎談)을 마무리 지어도 되겠군요.”

여위는 만족한 것인지 그제야 세 명이 모인 뒤 처음으로 진심이 담긴 미소를 그렸다.

* * *

불빛 하나 없이 어둠으로 둘러싸여 물체의 윤곽만이 간신히 보이는 곳에, 두 명의 인영이 서로를 바라보며 앉아 있었다.

단지 어둠 속에서 바라만 보고 있음에도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운은 극과 극에 달하는 터라, 주변의 대기는 식었다가 다시 달아오르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촤라락-!

그 순간, 한 인영이 몸을 일으켜 커다란 창문을 가리고 있던 검고 두꺼운 천을 걷어 재꼈다. 그러자 순식간에 바깥 하늘에 두둥실 떠 있던 햇빛이 어둠을 가로질러 둘을 향해 비추었다.

볕에 비친 두 인영의 모습은 백발노인과 노인에 비해 한결 젊어 보이는 사내였다.

“그래, 날 이곳까지 오게 만든 연유가 무엇인가?”

노인이 먼저 사내를 향해 물었다.

“알다시피 내가 그 험난한 곳을 뚫고 들어가려니, 온통 감시하며 경계하는 이들 뿐인지라 차마 들어갈 수가 없더군. 아무리 나라고 한들 말이야. 그것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나보단 당신이 더 잘 알 테지.”

차분한 노인의 음성과는 달리, 한 마디 한 마디에 감정의 기복이 심한 사내의 목소리엔 조롱이 가득했다.

하나, 노인 역시 만만치 않았다.

“물론, 협에 몸담은 이들이 시퍼렇게 두 눈 뜨고 경계하고 있으니, 어둡고 깊은 곳에 몸담은 당신이 쉬이 들어오기란 쉽지 않았을 터. 과거에도 당금에도, 먼 훗날에도 그렇게 호락호락할 곳이 아니니 말일세.”

노인의 차분히 가라앉은 음성 속에는 굳이 해석하려 하지 않아도 밝은 세상은 너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질책이 담겨 있는 게 단박에 느껴졌다.

이에 사내의 얼굴이 짜증으로 잔뜩 물들었다.

“여전히 재수 없는 목소리와 말투는 그대로군, 영감. 세월이 흐르면 좀 변할 줄 알았는데.”

“그럴 거라 생각했다면 자네가 평생 해 온 생각 중 가장 큰 오산일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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