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쓸데없는 한담은 여기서 끝이다. 무인이라면 무인답게 각자의 무기로 대화를 나누는 게지. 누구처럼 징그럽게 말장난하는 건 내 취미가 아니란다, 아해야. 기회를 주마. 검을 뽑아라.”
여태껏 장난스러운 말투로 대하던 염청장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그와 동시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덜떨어진 것 같은 모습이었던 염홍장마저도 표정이 변했다.
마치 방금 전까지 나누었던 대화들은 ‘모두가 꿈이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들의 무공은 둘이 함께 있어야 온전히 발현된다고 하였던가?’
송운은 어렴풋이 기억나는 그들의 무공을 머릿속에서 강제로 끄집어냈다.
조금이라도 싸움을 유리하게 끌고 나가기 위해서는 그것이 최선의 방법일 테니까.
천지쌍비의 무공은 무척 독특했다.
검이 아닌 유엽도를 사용하며, 거기에 둘이 하나가 되어야만 진가가 발휘됐다.
풍문에 따르면 둘의 합공이 극에 달하는 순간 번쩍하고 빛이 난다고 했다.
그리고 그 빛을 보는 순간은 무공의 실현자인 천지쌍비가 죽거나 그것을 본 자.
둘 중 한쪽은 반드시 죽는다고 했다.
단홍청참마도법(斷紅靑斬魔刀法).
그것이 바로 그 무공의 이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결코 개개인의 무공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의 이름이 천하에 알려지는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당대에 도를 다루는 재능에 있어서는 이 둘을 따를 자가 없었다고 했지. 한데 어찌하여 모든 것에 등을 돌리면서까지 혈교에 들어간 것일까.’
송운이 이런 저러한 의문에 빠져 움직이지 않자 염청장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외쳤다.
“뭣 하는 게냐? 설마 싸우려고 보니 무서워서 내빼려고 궁리하는 건 아니겠지? 내 친히 두 수를 양보해주마! 어떠냐? 너도 이의 없지?”
염청장이 염홍장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염홍장이 묘한 얼굴로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쳇. 내가 불만을 가진다고 무를 것도 아니잖수? 빌어먹을!”
“말 한번 예쁘게도 하는구나! 암, 이래야 내 아우지. 송운이라 하였던가? 내 오늘은 기분이 몹시 좋으니 약조 하나를 더 하마.”
“무엇을 말입니까?”
송운은 마치 새로운 놀잇감을 만난 아이처럼 신나 보이는 염청장을 향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만일, 아주 혹시 눈곱만큼의 가능성이라도 네가 우리를 이긴다면 저 뒤에 있는 쥐새끼들은 절대로 손대지 않겠다고 이 염청장의 이름을 걸고 약조하마.”
“굳이 약조하실 필요가 있으시겠습니까? 어차피 제게 진다면 두 선배 모두 이미 이승을 떠나셨을 텐데요. 그것보다야 혈교가 어디로 어떻게 이어졌는지, 그것을 제게 낱낱이 설명해주셔야겠습니다.”
송운의 말을 듣고 있던 염청장이 썩은 이를 드러내며 파안대소했다.
“클클클! 역시 재밌는 아해로다. 이놈아!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하늘 같으신 강호의 선배님이 하는 말씀에 토를 다느냐. 이럴 땐 그저 감사합니다, 하는 게야.”
말을 하는 내내 누런 이를 내보이며 웃는 염청장을 향해 송운이 고개를 슬쩍 주억였다.
“그럼…… 그 약속만이라도 꼭 지키셨으면 합니다.”
“타핫!”
파바박-!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송운을 향해 염청장과 염홍장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채쟁-!
수십 번에 걸쳐 검과 도가 오가며, 서로를 갉아먹고 밀어내기를 반복했다.
염청장을 내치면 곧이어 염홍장이 다가오고, 염홍장을 막아 내면 뒤이어 염청장의 도가 날아들었다.
카가각-
캉!
촤라라락!
한참을 뒤로 밀려난 염청장이 태연하게 땅을 박차고 일어나며 옷을 툭툭 털어 낸다.
“에잉, 이미 늙고 힘없는 늙은이를 이리 세게 받아치다니…… 참으로 너무하는구먼.”
“절 나무라시기 엔 선배님의 손속 역시 자비가 없지 않습니까?”
송운이 내뱉은 말을 대변이라도 하는 것처럼 염청장의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다는 뜻이리라.
“……이런 상황에 웃음이 나와?”
그런 염청장의 옆을 스쳐 지나가며 염홍장이 나무랐다. 물론 염홍장 역시 아직 지친 기색이 없는 편안한 모습이었다.
하나, 둘이 동시에 떠올리는 생각은 같았다.
‘이 아이. 제법이로고?’
그의 일생 삼분지 이에 달하는 몇십 년을 부닥치며 살아온 혈교의 검과는 달랐다.
맑고 청명함이 느껴지는 그 기운은 마치 예전 전성기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게 하는 것 같아 기분이 몹시 묘해지기 시작했다.
알 수 없는 흥분감이 그의 피를 뜨겁게, 그리고 펄떡이며 뛰게 만든다.
‘무림맹이 드디어 정신을 좀 차린 모양이로군. 진즉 그리하였다면 참으로 좋았을 것을. 쯔쯔…… 어쩌면…….’
염청장의 얼굴에 잠깐 씁쓸함이 피어올랐지만, 언제 나타났냐는 듯 금세 사라졌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에게 그럴 만한 여유가 사라진 것이다.
송운은 둘을 상대하면서도 여전히 편안한 호흡을 유지 중이었다.
그뿐만일까?
둘을 상대함에도 전혀 밀리는 기세도 없었다.
‘킁…… 이거 생각보다 더 고투(苦鬪)하겠군.’
깡-!
송운의 검이 달려들던 염홍장의 검을 깔끔하게 쳐 낸 후, 조심스레 다시 입을 열었다.
“해서 말입니다.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무엇을 말이냐?”
염홍장이 쓸데없는 말이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어찌하여 정파를 떠나 혈교와 손을 잡으신 겁니까?”
송운은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예상외의 질문이었는지, 염청장이 잠시 허를 찔린 표정을 비췄으나, 이내 처음 그 장난기 그득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협(俠)이 아닌 협(愶)을 추구하는 세상에 흥미를 잃었다고 할까?”
“단지 그뿐입니까?”
송운은 들려오는 대답에 되물었지만, 답은 똑같았다.
“에잉, 귀찮구나. 이런 농을 주고받는 건 내 성정에 맞지 않는대도?”
“……그렇다면 저 역시 그만하겠습니다. 더 이상 손속에 자애를 두지 않을 테니, 제대로 도를 잡으시지요.”
그 말과 동시에 염청장과 염홍장 둘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 속에서 백전노장다운 깊고도 노련미가 스쳐 지나갔다.
“흥! 죽고 싶지 않다면, 너야말로 우릴 죽일 각오로 싸워야 할 게다.”
살기가 가득 밴 음성으로 마지막 말을 전한 염홍장이 도를 움켜쥔다.
채재쟁-!
재개된 싸움은 좀 전과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듯, 세 사람 사이에 끼어들면 가루가 되어 부서질 것만 같은 흉험한 기세다.
예리한 검기는 스치기만 해도 모조리 베어 없앨 것처럼 적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과과광-!
대기가 흔들리고 주변의 땅이 갈라졌다.
푸드득-!
나무 사이를 평화롭게 노닐던 새들이 화들짝 놀라 날아올랐다.
우르릉-!
그 엄청난 위력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판잣집이 무너져 내리며 땅이 패여 나갔다.
하나, 쏟아지는 두 명의 도의 폭풍 속에서도 송운은 묵묵히 자신의 검을 펼쳐 나갔다.
한참 동안 눈앞을 어지럽히던 송운의 검이 부드럽지만, 날카롭게 염청장의 소매를 훑으며 지나갔다.
끝도 없이 펼쳐지던 팽팽한 공방전에 금이 가는 소리였다.
서걱.
푸슉!
“크억……!”
쨍그랑!
“형님!”
염청장의 소매에서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고, 동시에 들고 있던 도마저 땅으로 떨어졌다.
피를 억지로 멈추어 보려 혈맥을 짚어 보았지만, 속수무책으로 흘러내렸다.
이미 절반 가까이 잘려 나간 팔에서 흐르는 피를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근육이 조금만 덜 질겼더라면, 송운이 조금만 더 깊게 파고들었더라면 이미 떨어져 나갔으리라.
힘을 잃고 축 늘어져 내린 팔에 염청장이 잠시 머뭇거리는 듯 보였으나, 그는 곧장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던 팔을 쥐어뜯었다.
우드득.
“끄으으…… 으아아아악……!”
살점과 근육, 뼈가 뜯겨 나가는 고통에 염청장의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갔지만, 서둘러 남은 팔의 절단 부분에 혈을 짚어 지혈시켰다.
뚝, 뚝…….
하나 이미 바닥엔 흥건히 검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뜯긴 살점 끝에서 굵은 핏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참으로 독한 사람이군.’
그 모습에 송운이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송운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보던 오룡일봉 역시, 마치 자신의 팔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오싹한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하나 정작 장본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 더욱 눈을 크게 부라리며 염홍장을 향해 외쳤다.
“끄윽…… 별것 아닌 걸로 호들갑 떨지 마라, 이놈아! 쿨럭…… 비록 내 오른팔은 이리되었으나, 저 녀석 덕분에 오래간만에 아우와 합을 펼쳐 볼 수 있겠어. 쿨럭…… 클클!”
목소리가 한껏 격양된 염청장이 땅에 떨어졌던 자신의 도를 왼손으로 바꿔 쥐었다. 곧 그의 도를 쥔 손과 팔뚝의 핏줄이 투둑투둑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 말에 지금까지와는 달리 울먹이는 건지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의 염홍장 역시 검을 굳게 움켜쥔다.
“……난, 난 절대 이대로 죽어 줄 생각 따윈 없으니 형이나 실수하지 마시우.”
염홍장의 멍청해 보이던 목소리와 눈빛은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젖은 목소리에는 오로지 살기와 분노가 가득했다.
‘큭, 역시나 만만치 않은 상대로구나.’
송운은 둘을 마주하는 내내 사방팔방에서 날아오는 도에 정신이 없었다.
오른손을 잃었으나, 그에게는 뛰어난 또 다른 도가 있지 않은가?
둘의 공방은 뛰어났다.
공격도 두말할 것 없이 뛰어났지만, 무엇보다 둘의 합공으로 인해 만들어 내는 방어는 단단하기 그지없었다.
고작 둘이라면 둘일 테지만, 상대는 천지쌍비다.
그 둘이 함께하고 있으니 송운 역시 벅찬 건 사실이다. 게다가 송운의 생각보다 염청장과 염홍장의 무위는 더 고강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이기지 못할 거라는 생각 역시 들지 않았다.
필시 최선을 다한다면 저 둘의 무공을 타파할 길이 있을 터.
‘또…… 한 번 더 성장했기 때문인가?’
어디서 차오르는 자신감인진 모르겠으나, 왠지 그럴 거라는 생각이 송운을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것을 뒷받침해 주려는 듯 얼마 지나지 않아, 온 신경을 집중하여 방패를 뚫어낸 결과 염청장의 팔 하나를 가져왔지 않은가?
우웅-
송운은 곧 조용히 온몸에서 끓어오르는 선천지기를 느꼈다. 고요하지만 거대한 무언가가 몸속을 휘젓고 다니는 듯한 기분이다.
송운은 둘이 아닌 혼자였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많고, 촘촘하며, 방대해진 선천지기가 송운을 든든히 뒷받침해 주고 있었다.
‘이 정도 양이라면 시공검을 사용하는 것 역시 조금 부담이 덜 갈 터.’
더는 시간을 끌어선 안 된다.
“……?”
송운이 그리 마음을 먹은 순간.
화아악-!
염청장과 염홍장의 도가 서로 맞닿았다.
그러자 붉은 기운과 푸른 기운이 눈에 보일 만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