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저 둘 모두 최소 초절정 이상의 고수입니다. 주변에 감지되는 혈교의 무인들이 더 이상 없다고는 하나, 강시술이라도 부렸다면 제가 함부로 감지하기 어려운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상황에 벌써 그것들을 내보냈을 거라 생각하진 않지만, 설마하니 저 정도 실력자를 내보낼 줄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것은 지금까지 상대했던 녀석들과는 차원이 다를 겁니다. 만에 하나 놈들이 숨어 있는 인원이 전부가 아니라면 더욱더 위험하겠지요.”
“그럼 다 같이 덤벼도 안 될 수도 있다는 말씀 아닙니까?”
“예. 이미 다들 많이 심신이 지친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한 명이라도 무사히 무림맹에 도착해서 놈들의 위치를 알리는 편이 낫지 않겠습니까? 되도록 저의 선에서 끝내도록 할 테니 걱정들 접어 두세요. 그럼 뒤를 부탁합니다.”
송운이 어설픈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곽철우는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모습에 잠시 멈추었다.
워낙 인상이 깊었던 모습이기에, 그리고 어쩌면 그의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머릿속에 단단히 기억해 두었던 것이다.
‘그래! 떠올랐다. 이 모습…… 그때의 송 소협과 똑같구나.’
무황비고 때 그의 모습.
홀로 죽음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었었다.
송운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차마 나설 수 없었다.
더구나 여기서 더 싸우겠다며 나서기엔 이미 모두가 지칠 만큼 지쳐있었다.
되레 그의 진로에 방해가 되지 않는다면 다행이었다.
* * *
또다시 시작된 투덕거림을 반복하던 중 푸른 코의 노옹이 송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번쩍!
아주 찰나지간이었으나, 그의 눈빛 속에는 송운조차 놀랄 만큼 날카로운 살기와 죽음의 기운이 실려 있었다.
그렇다고 한들 움찔할 송운도 아니었으나, 그 기세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크흠, 내 실례가 많았군. 젊은이 자네가 보다시피 하나밖에 없는 혈육이라고 있는 게 이 모양이라 말이야. 쯧쯧.”
푸른 코의 노옹이 혀를 세차게 차며 한심한 듯 곁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시선의 끝에는 겉으로 보이는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게 여전히 입이 댓 발 튀어나온 붉은 코의 노옹이 여전히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튼, 이 늙은이가 서론이 길었구나. 듣자 하니 이번에 본좌가 몸을 담은 곳에 사람 참 귀찮게 하는 녀석들이 있다던데……. 보아하니 앞에 녀석들도 맥없이 당했군. 그 외의 쥐새끼들은 저기 숨어 있는 것 같고 말이야. 재미있구나, 재밌어. 클클.”
울컥.
‘저 자식이……!’
그 상대방을 자극하는 말투는 곧 직격으로 반응이 이어졌다.
제대로 통했다.
송운의 말대로 숨을 죽이며 앉아있던 남궁장후가 튀어 나갈 뻔한 것이다.
다행히 당무옥과 백길이 굳건히 그의 팔을 잡았기에 송운이 우려하던 불상사는 피해갈 수 있었다.
그 외에도 곽철우는 속으로 화를 삭였고, 양풍완은 바짝 다가온 그들의 기세에 몸이 굳은 상태인지라 백길이 그의 어깨에 남은 한 손을 얹고 있었다.
유일하게 표정의 변화가 없는 건 역시나 팽후영뿐.
그런 상황 속에서 당무옥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두 노옹은 그날 마주했던 그 사내보다 훨씬 더 고강한 무공을 지닌 이들이었다.
척 보아도 이 둘이 보낸 세월이 훨씬 길어 보였으므로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저 노인네들, 최소 초절정이라 했지. 그렇다면…… 정말 최악의 경우 그보다 위인 조화경일지도 모르겠어.’
당무옥이 이를 꽉 깨물었다.
겉보기엔 바로 맞물려 있는 초절정과 조화경의 경지라 할지언정, 두 경지 사이의 격차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적어도 무를 배운 무인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이류 고수 열 명을 일류 고수 한 명이 상대할 수 있다면, 일류 고수 오십 명은 절정 고수 한 명이 상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절정 고수 백 명을 홀로 상대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초절정 고수…….’
물론 상황에 따라 달라지기도 할 테지만, 단순 이론상으로 그렇게 계속해서 올라가다 보면 그 격차는 점점 격심하게 커지게 된다.
초절정만 해도 이미 눈앞이 아찔한 데, 만일 저들이 조화경이라면 그 사실만으로도 이미 온몸이 굳어 버릴지도 모른다.
희망이 없었다.
‘이성적으로 따져 보니 생각보다 더 끔찍하군. 젠장!’
송운과 함께하게 된 이래로 자신의 실력이 비교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작금, 오룡일봉의 평균 실력은 고작 절정이었다.
‘그리고 대주는 분명 그날, 초절정에 이른 놈을 단 하나의 생채기 없이 단박에 제압했다. 물론 초절정이라고 해서 다 같은 초절정은 아니겠지만…….’
이미 이 자리에 한몫 거들 수도 있다는 그런 같잖은 생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송운에 대해 확신이 들었다.
당무옥이 노옹들과 대치 중인 송운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동자 속에는 신뢰가 가득했다.
‘다시 한번 당신을 믿겠습니다, 대주.’
* * *
‘혈교인 것은 확실한 모양이구나.’
오룡일봉, 정확히는 남궁장후의 반응에 비해 송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정도 도발은 충분히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주억이기까지 했다.
어차피 숨어 있다 해서 이들에게도 통할 거라는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으니까.
다만 그가 놀란 것은 속도였다.
‘예상보다 훨씬 더 빠르군.’
하나 겉으로는 절대 놀란 티를 내지 않았다.
“뭐, 어르신 말대로 이미 들킨 것 같군요.”
그런 송운의 너무도 태연한 반응에 실망이라도 한 것일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싱글벙글하던 푸른 코의 노옹이 표정을 찡그리며 입맛을 다셨다.
“떼잉.”
그렇지 않아도 독특한 인상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데, 표정까지 구기니 외관상 더욱더 보기 좋지 못했다.
‘저저저, 재미없는 녀석 같으니라고.’
푸른 코의 노옹은 순식간에 재미없는 놈으로 송운을 치부해 버렸다.
“쩝, 그렇다고 해 두지. 그나저나 잠깐이지만 네놈을 보고 있자니 만만치 않은 자신감을 지녔구나. 참으로 오랜만이야, 이런 즐거움은. 흘흘, 무슨 생각으로 너 혼자 나선 것이냐? 우릴 잡고 홀로 영웅이라도 될 셈이더냐?”
“그것까지는 제가 굳이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계속해서 속을 긁으려는 심산인지 빈정거리며 물어오는 푸른 코의 노옹이었으나, 송운 역시 지지 않고 같은 반응을 보인다.
그 모습에 점점 붉은 코의 노옹은 송운에게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클클, 이쯤 되니 네 녀석의 실력도 그 큰 배포와 자신감만큼 클지 궁금하구나. 본좌는 천지쌍비(天地雙鼻) 염청장(閻靑粧)이니라.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
결국 염청장은 그가 마음에 든 것인지 먼저 성명을 밝혔다.
송운은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아……!’ 하며 저도 모르게 속으로 탄성을 토했다.
천지쌍비 염청장!
아주 오래전, 혈교가 몸을 숨기고 사라지면서 함께 자취를 감추었던 중원의 젊은 신진(新進) 고수 중 한 명이었다.
실력이 워낙 뛰어나 난투 중에도 유명세를 탔으나, 때가 때인지라 그 여파로 죽은 줄로만 알았던 그가 이렇게 버젓이 살아 있을 줄이야!
송운의 마음에 희비(喜悲)가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실제로 전대의 유명한 고수인 자들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다는 ‘희’와 너무도 아쉽게 적으로 만나게 되었다는 ‘비’였다.
송운의 미간이 활짝 펴졌다가 다시 찌푸려졌다.
‘젊은 나이에 요절하기엔 재능이 너무 아깝다고 그리 천하가 떠들어 댔건만, 이제 보니 죽은 것이 아니라 혈교에 붙어먹은 것이었군.’
그렇다면 곁에 있는 저 붉은 코의 노옹은 천지쌍비의 나머지 한 명인 염홍장(閻紅粧)임이 분명하리라.
둘의 똑같은 생김새도 생김새지만, 코의 색깔이 너무도 독특하여 그것으로 별호까지 붙을 정도였다.
한데 그것을 송운이 유추해내지 못한 것은 너무 오래 지난 세월과 정파에서 명예롭게 죽었다고 기록했던 그들이 설마 살아남아 혈교에 투신했을 거란 생각은 하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하필 가장 추악한 혈교에 발을 들였단 말인가……!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없구나.’
송운은 속으로 쓰린 마음을 가다듬었다.
만일 염청장과 염홍장이 혈교로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그 둘과 송운은 같은 편에 서 있었을지도 모를 터였다.
꿀꺽.
송운이 속으로 마른침을 삼켰다.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려울지도 모르겠구나.’
송운은 잠시나마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킨 후, 여전히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송구하나, 저에게는 별호가 아직 없습니다. 아쉬울 대로 선배들께 이름이라도 밝히자면 송운이라 합니다.”
그런 예의 바른 모습에 더욱 감탄을 표하는 염청장이었다.
“송운…… 송운이라. 흐흘, 제법 좋은 이름이로구나.”
염청장은 아주 오래전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얼굴을 떠올렸다.
‘적에게까지 예의가 바르다라……. 게다가 아직까지도 우리를 아는 놈이 있다니…… 신기한 일일세? 필히 반로환동(返老還童) 따위는 아닌데. 요새 놈들답지 않게 특이한 놈이로세. 백능! 네놈이 제법 재밌는 아이를 키워 냈구나. 클클클, 이미 감정이 메말라진 지 오래됐다 생각했거늘, 이 늙은이의 가슴이 다 뛸 줄이야. 그것도 저 시커먼 사내놈에게 말이지.’
속으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염청장이 잡생각을 떨쳐 버리겠다는 듯 고개를 휙휙 좌우로 내저었다.
“통성명은 다 했으니, 그럼 우린 이제 서로 피를 볼 일만 남은 겐가? 피차 이곳까지 친히 밀회를 나누자고 온 것은 아닐 테니.”
그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염홍장이다.
“아니, 형님 그게 무슨 말이오? 내 이름은 아직 한 자도 안 꺼냈는데!”
하나 염청장이 매우 자연스럽게 열을 내며 허공에서 노발대발하며 펄펄 뛰는 염홍장의 어깨를 가볍게 툭툭 두드렸다.
“네 소개는 이미 다 된 것 같구나, 아우야.”
염청정의 주름이 잔뜩 진 입가의 끝이 자연스레 하늘로 향했다.
오랜만에 바라본 하늘은 유독 맑았다.
스르릉.
스르릉.
‘……유엽도(柳葉刀)로구나.’
염청장과 염홍장이 동시에 꺼내든 무기는 일반적으로 쓰이는 도(刀)보다 짤막하고, 도의 등 부분보다는 도신이 굽어서 곡선을 이루는 유엽도였다.
거기에 이 둘이 사용하는 유엽도는 일반 유엽도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길이가 좀 더 길고 면적이 더 넓다는 것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