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원활하게 몸의 혈들이 서로 소통이 되니, 더욱 빠르고 안전하며, 더 많은 선천지기가 모이기 시작했다.
‘설마 선천지기를 모으는 것까지 도움이 될 줄이야!’
비록 현경(玄境)까지 한 번에 길을 뚫지는 못하였으나, 조화경의 초입의 경지에서 끝자락까지 중간을 걸치지 않고 곧바로 닿은 셈이다.
이 모든 것이 독고백과의 대련에서 단 한 방에 이루어졌다는 생각에 송운은 잠시 멍해졌다.
그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송운은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 번째로는 마지막으로 무아지경에 들기 이전, 자신은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벌떡-!
“백 형!”
끼익.
“일어나셨습니까? 백 형이시라면…… 그분은 아까 이미 이곳을 떠나셨습니다.”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오던 곽철우가 그의 물음에 답을 했다.
“아…… 떠나셨단 말씀이십니까?”
송운이 저도 모르게 아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예상했던 일이었다.
‘후우……. 내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벌써 갈 길을 가신 게로군.’
송운은 아쉬운 마음을 가라앉히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송운의 모습을 보던 곽철우가 작은 서신을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기상하시면 곧바로 목욕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미리 물을 좀 받아두라 일렀으니, 물을 데우기만 한다면 씻으시는 데 무리가 없을 겁니다. 아, 그리고 이건 그 백 공자께서 송 소협에게 남겨두고 가신 겁니다.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곽 소협.”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쾅.
문이 닫힌 이후, 더 이상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역시 아무리 곽 소협이라 한들 이렇게 냄새나는 데 오래 있고 싶진 않았겠지.’
오감이 크게 발달한 무인으로서는 더더욱 견디기 힘들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참고 있었던 게 용할 만큼 말이다.
‘내 몸에서 나는 냄새지만 나도 싫은 것을. 남이라고 좋아할 리가 없을 테지.’
곽철우가 나간 후, 송운은 자신의 앞에 놓인 곱게 접혀 있는 서신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처음 보는 백 형의 필체는 곱고 부드러웠다.
나는 이만 다시 가던 길을 떠나려 해. 송 아우의 한 걸음 나아가는 모습을 이번엔 직접 지켜볼 수 있어서 기분이 좋더군. 기쁜 마음을 가슴에 품고 떠나는 걸음이니 너무 서운해하지 말았으면 해.
우린 인연으로 만난 사이니 언젠가 또다시 볼 날이 올 테지.
백.
송운은 다 읽고 난 후, 의아한 마음에 고개를 잠시 갸웃거렸다.
서신에 남겨진 한 마디가 마음에 살짝 걸린 것이다.
‘이번엔……? 이 일 전에 내가 또 보인 적이 있던가?’
송운은 왠지 모를 서운함과 허탈함이 마음에 맴돌았다. 그와 함께 한 시간이 제법 길다고 느꼈었다.
그에 대해 제법 많은 것을 알고 공유하였다고 생각하였거늘…….
‘난 백 형에 대해 아는 것이 없구나.’
두 번째로 깨달은 사실은, 백 형의 무공은 자신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이다.
이번 만남에서 본 그의 모습에는 자신이 아는 백 형은 없었다. 순수한 얼굴로 치료해주며 미소 지어주던 그러한 사람은 자신과 대련하는 순간 사라졌다.
그저, 차와 요리.
치료에 능통한 고립된 곳에 홀로 사는 심성이 고운 청년. 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듯싶다.
‘백 형이 설마 무인이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역시 사람은 오래 지켜보아야 아는 것인가? ……되었다. 어차피 네가 더 이상 캐지 않겠다 다짐한 것이 아니더냐? 운아.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버리자.’
송운은 자꾸만 드는 생각을 서신과 함께 접어버리고선 독고백의 서신을 환성의 옆에 고이 내려놓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무엇 보다 서둘리 이 몸에 묻은 찝찝함을 날려버리고 싶었다.
* * *
벌컥-!
“형님. 서신이 도착했답니다!”
정신없던 하루가 흐르고, 아침의 해가 밝자마자 드디어 목이 빠져라 기다렸던 제갈염으로부터의 서신이 당도한 것이다. 그 사실을 송운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남궁장후의 커다란 목소리로 들을 수 있었다.
“알겠어. 나가보자.”
잠시 후.
송운과 남궁장후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송운 일행이 함께 지켜보는 가운데 송운이 새 다리에 묶여있는 서신을 차분히 펼쳐낸다.
촤락.
모두에게 생각보다 시간이 조금 오래 걸려 미안하네.
그럴 만한 연유가 있었지.
아주 조금이라도 혹여나 모를 일에 대비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는 도중 만리추종향(萬里追從香)을 사용했었네.
그들이 갈 만한 곳에 말이야.
한데, 마침 놈들이 그것을 뒤집어쓴 모양이더군. 만리추종향 중에서도 최고의 향을 내는 것일세. 아마 달포는 갈 정도의 향이니 시간은 이 녀석이 도착하고 난 후에도 아직 넉넉할 걸세. 또한, 지금 이 서신을 전하는 새가 그 향을 맡을 수 있으니 도움이 될 거라 믿네.
그럼 몸 건강히 다음번엔 반드시 무림맹에서 보도록 함세.
염.
“마, 만리추종향……!”
서신을 읽은 이들 모두가 감탄을 자아냈다.
만리추종향이란 무색무취인지라 사람의 오감으로서는 그 향을 맡을 수도 볼 수도 없다. 뿐만이 아니라 한 번 묻은 만리추종향은 만들어진 재료와 상태에 따라 최소 보름에서 최고 달포까지 유지되어 그 기간 안에는 무슨 짓을 한다고 하여도 이미 묻은 이상은 향이 남는다.
심지어는 피부를 벗겨낸다 한들 이미 몸속에 스며든 만리추종향은 사라지지 않는다.
하여 일반 시장에선 쉽게 팔지도, 살 수도 없는 물건이거늘, 그런 고가의 물건을 용케도 제갈염이 스스럼없이 이번 일에 사용한 것이다.
“보나 마나 이거 돈깨나 들어갔겠는데요?”
“쪼잔 이라면 둘째가라 하시는 분께서 어찌…… 총군사님께서 속 좀 타셨겠네. 안 보아도 뻔하지.”
암시장에서야 그나마 구할 수 있는 물건이니 이미 말 다 한 셈이다. 게다가 그 향을 맡고 쫓을 수 있는 동물까지 함께 얻어야 하니, 돈은 정말 상상 이상으로 사용됐을 터.
송운을 비롯한 여기 있는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그래도 덕분에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지도 모르겠군.”
곽철우의 말에 무표정으로 서 있던 팽후영이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이 정도라면 녀석들을 놓칠 일은 없겠네요.”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렇겠지. 팽 소저 말대로 잡는 것까지는 다시 기회가 왔다. 문제는 놈들이 다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지 않게끔 묶어놓는 것인데…….’
이미 코앞에서 두 번씩이나 놓친 상대다.
아무리 만리추종향이라 할지언정 안심하긴 이르다.
송운의 왼손이 관자놀이를 지그시 누르기 시작했다.
어렵게 다시 얻은 기회인 만큼 이번엔 결코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라, 송운 역시 깊은 고뇌에 빠진 것이다.
으득.
혈교의 이야기를 들으니 다시 열이 뻗쳐오는지 당무옥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이놈들 잡히기만 해봐라. 이번엔 기필코 내 손으로 박살을 내어줄 테니!”
다들 의지가 불타오르는 듯 보이자, 백길이 그 사이를 조용히 나섰다.
“아미타불. 이곳까지 날아오느라 새도 많이 지쳤을 겁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잠시 쉬도록 하는 것은 어떠하실는지요? 송 시주님.”
“무슨 소립니까? 길 형님! 아무리 생명이 소중하다곤 하지만…….”
“꼭 그리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송운이 나서는 탓에 남궁장후는 울상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그것은 송운 역시 같은 생각이다.
먼 길을 온 만큼, 체력을 보충해주어야 실수 없이 혈교를 다시 찾아낼 수 있을 터.
“그게 좋겠습니다. 백길 스님 말대로 할 테니, 그사이 다른 분들은 곧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이곳을 정리하도록 하죠.”
“예에. 알겠습니다.”
어찌하겠는가?
지금 이곳에선 송운의 말이 곧 법인 것을.
곧, 모두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다.
송운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 주먹을 꼭 쥐었다.
“이번엔 인간미라고는 전혀 없는 혈교놈들, 반드시 잡고 말 겁니다.”
* * *
“새가 안내하는 길로만 가면 된다는 거 맞겠죠? 형님.”
“총군사님께서 그리 말씀하셨으니, 맞겠지.”
끼이익-!
드넓은 창천에 뜬 새는, 어찌 안 것인지 송운 일행의 속도에 맞추어 날아가다가도 다시 돌아보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참으로 영리한 새로다.’
엄청난 훈련을 통한 결과물일 터였다.
“지금 가는 방향이라면…… 사천성(四川省)이 아닙니까?”
“아마 맞을 겁니다.”
조용히 송운과 곽철우의 대화를 듣던 당무옥이 더욱 입을 다물고 달리는 데 집중한다.
‘그러고 보니 청성파가 있는 곳이 사천성이었던가.’
송운은 왠지 모르게 당무옥이 신경 쓰였다.
계속해서 엇나가려는 동생을 바로 잡아주고 싶은 형의 마음이랄까. 본디 친동생이 둘이나 있는 탓에 생긴 병일지도 몰랐다.
혹여나 있을 식솔들의 안위가 걱정되는 것인지 아까부터 당무옥의 표정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안 송운은 그때부터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앞서 나가던 송운이 발걸음을 좀 더 늦춰 당무옥의 곁으로 다가갔다.
“별일 없을 겁니다. 당 소협.”
“……딱히 걱정하는 거 절대 아닙니다.”
대주라고 부르고는 있으나, 여전히 틱틱대는 그의 말투에도 송운은 여전히 친절히 답했다.
“혈교가 알게 모르게 제법 널리 퍼져있긴 하나, 놈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인 것도 아니고 사천성에는 아미파(峨嵋派)와 사천당문(四川唐門) 역시 함께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건 제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대화가 한창일 무렵.
드디어 멈추지 않을 것만 같던 새가 하늘에서 한 곳을 향해 뱅뱅 맴돌기 시작했다.
이에 모두가 동시에 달리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주변은 사방이 빽빽한 판자로 뒤덮인 판자촌이었다.
“이러한 곳에 숨어있다고?”
그 모습에 어이가 없었는지 남궁장후가 한탄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로 빈민가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잘 아는 법이다. 호화스럽고 큰 집에 갇혀 사는 이들보다는 판자촌처럼 옆집 소리가 제집 소리처럼 들려오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여 저 집에 무엇이 있는지 아이는 몇인지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 모든 것에 빠삭하다.
한데 그런 곳에 혈교 녀석들이 숨어들었다면 누군가는 알아챘어야 정상일 터.
이건 남궁장후만의 생각은 아니었는지 다른 오룡일봉의 표정 역시도 모두 의아함이 가득 한 채였다.
“이런 곳에 정말 놈들이 숨어들었을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정녕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때, 팽후영의 한 마디가 그들의 생각을 끊어냈다.
“아니. 어쩌면 이곳 전체가 이미 혈교의 소굴일 지도 모르지.”
피잉.
그 말을 듣고 보니 그제야 이곳의 위화감이 느껴오기 시작한 것인지 다들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녀의 말을 뒷받침해주는 것은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입을 다물고 있었던 송운이었다.
“팽 소저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발을 들여놓는 순간부터 공기가 조금 미묘합니다. 제가 그때 느꼈던 그것과 비스름한 것이 진득하고, 더러운 공기 말입니다.”
꿀꺽.
“그, 그렇다면 형님. 설마 지금 이곳 전체가…….”
제법 긴장한 듯한 남궁장후의 물음에 송운이 친절히 답했다.
“예, 혈교의 소굴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