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그 모습에 잠시 실소가 터져 나왔지만, 곧 송운 역시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여기서 고민한다고 해봤자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어.’
당장에라도 놈들을 다시 쫓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더 이상 실마리가 보이질 않는다.
“우선은 서신을 넣었으니 기다려보도록 하죠.”
휘잉-
푸드득!
그때 송운의 그 말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때마침 높은 청공을 빙빙 맴돌던 새가 송운의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다리엔 하얗게 둘둘 말린 종이가 매여있었다.
종이를 풀어내자, 익숙한 묵향(墨香)의 그윽함이 코를 찌르며 정갈하지만 조금은 딱딱한 필체가 송운을 반겼다.
이야기는 전해 들었네.
참으로 아쉽겠지만, 조금 더 힘을 내주었으면 하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로 물러날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 역시 자네들이 원치 않으리라 생각하고 있네만…….
해서, 내가 자네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모든 것을 동원하여 단서를 모색 중이네. 아마 이 서신이 도착하고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낼 테니 조금만 기다려주게나.
그들과 직접적으로 맞닿고 싸워본 자네들이라면 반드시 해내고 말 거라고 나와 맹주님은 그렇게 믿고 있네.
부디 모두 다시 만날 날까지 몸조심하고, 마지막까지 잘 부탁하네.
염(廉).
마지막에 박힌 염자는, 누가 보아도 확실한 총군사, 제갈염의 것이었다.
하나 당금 송운의 관심사는 그것보다 다른 것에 쏠려있었다. 의아한 그의 표정에 주변에 쉬고 있던 당무옥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뭐라 적혀있습니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십니다. 방안을 모색 중이시라고요.”
“총군사님께서 단서라도 찾으셨답니까?”
“아무래도 그러하신 것 같습니다.”
양풍완이 황당한 얼굴로 송운에게 연신 물었지만, 답변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것 역시 부처님의 뜻인 게지요. 아미타불…….”
“왈가왈부한다 해도 변할 것도 없을 텐데 뭐. 그러하시다니 우선은 기다려보는 것이 맞겠네요.”
“아니, 이게 뭐 말이나 됩니까? 이미 몇 주야 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기다리기만 하지 않았어요? 총군사님께서도 너무 하십니다. 정말!”
길길이 날뛰고 있던 양풍완의 목을 당무옥이 손으로 걸어 재꼈다.
스윽.
텁.
“케, 케겍! 혀, 형님 이것…… 콜록!”
“조용히 있어라. 막내야. 총군사님께서도 무언가 생각이 있으시니, 그리하셨겠지. 우리라고 딱히 지금 방안이 있는 것도 아니잖아?”
당당하게 외치던 양풍완은 당무옥이 은근슬쩍 협박적인 말투로 말하니, 깨갱거렸다.
역시 양풍완에겐 당무옥이 약이다.
“그, 그건 그렇지만…… 이것 좀 놔주시고…… 켁.”
서신 한 통에 급작스럽게 시끌벅적해진 상황 속에서도 송운은 차분히 머릿속으로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당 소협의 말대로 지략을 짜내시는 데에는 무림맹에서 가장 능숙하고 능통하신 분이시다. 그런 총군사께서 결코 손해를 보거나 실패할 일은 쉽사리 하지 않으실 거란 말이지.’
“대체 그 단서가 뭘까요? 형님.”
남궁장후가 표정을 일그러뜨린 채로, 한참을 서 있더니 결국 송운에게로 다가와 묻는다.
“글쎄. 내가 총군사님이 아니다 보니, 직접 봐야 알 것 같아. 총군사님께서 그리 호언장담을 하셨으니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무엇이든 단서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을 제갈염이 찾고 있다고 하니 무언가 든든해지는 기분이다.
어차피 지금 여기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놓치고 없는 상태다.
기다리는 게 답일 터.
“기왕 이렇게 된 것 차분히 좀 더 쉰다 생각하고 기다리도록 하죠.”
* * *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지루함에 몸부림치던 그들의 눈앞에 신선한 무언가가 뚝 하고 떨어져 내렸다.
툭툭.
“형님 저 사람들 대체 뭘까요……?”
남궁장후가 입에 물고 있던 당과를 떨어트리며 말을 흐리자 양풍완이 그 뒤를 받아쳤다.
“아 형니임! 자고로 옛적부터 남녀가 한 쌍이면 하나 아닙니까?”
퍽.
그로 인해 뒤통수를 맞아야 했지만 말이다.
“에라이, 아직 어린놈의 자식이 눈은! 한데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대체 왜 이러한 곳에……?”
그들이 보고 놀란 것은 단순히 한 명이 아닌 둘이라서 뿐만이 아니었다. 앞에 놓인 보기 좋은 한 쌍의 외관 때문이었다.
“이곳이 맞나보군.”
“그러한 것 같습니다.”
사내는 훤칠한 키에 다부진 체격.
그에 비해 잘생긴 외모에 누구나 보면 선하다고 볼 수 있을 인상을 지녔다. 그리고 마치 사내를 보필하듯 그 뒤에 선 여인은 백이면 백 남자가 본다면 홀려 넘어갈 만큼의 아름다움과 묘하게 흘러나오는 그 기운은 참으로 대단했다.
하나, 개중에서도 가장 크게 놀란 이는 따로 있었다.
* * *
“무슨 말이야? 정녕 아무도 없었다고?”
“그렇습니다. 말씀하신 그곳에 가보았지만, 그저 사람이 살았을 법한 집터만이 남아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걸 제외하고는 사람은커녕 동물조차 잘 다니지 않는 길목이었습니다. 혹, 송구하오나 큰 공자님 지명을 잘못 기억하고 계신 것은 아니신지…….”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그곳이 맞을 텐데……!”
송운의 두 동공이 흔들린다.
‘아니야. 내 기억은 정확하다.’
하북성 선화현 오림촌.
거기에서도 훨씬 더 안쪽 깊숙한 곳.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행여나 그가 사는 곳을 잊어버릴까 봐 종이를 구해 적어놓고도 수십 번을 되새겼던 지명과 길이다. 결코 틀릴 리가 없다.
‘내가 틀린 것이 아니라면…….’
백이 지명을 잘못 가르쳐준 것이거나, 이미 그곳을 떠나고 없다는 것밖에는 의문이 풀리지 않는다.
하여 그 뒤로 다시 한번 확인하기 위해 시간을 내어 직접 가본 후에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혹여나 길이 틀렸을까도 싶어 샅샅이 돌아다녀 보았지만 틀린 것이 아니라 그곳을 떠난 것이 맞았다.
해서 몇 년 동안 그를 찾아보려 노력을 했으나, 결국 바쁜 일상에 치여 기억 속에 묻어두었던 인물.
그 사람이 지금에서야 그것도 자신의 발로 직접 송운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던 송운의 입에서 그의 정체를 밝혀냈다.
“백…… 형?”
“음? 이거……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송 아우.”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본 사내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올랐다.
* * *
“잘 지냈어? 어디 더 다친 곳은 없는 게고?”
몇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변치 않은 외모를 지닌 그는 너무도 태연하게 송운에게 안부를 물어오고 있었다. 마치 바로 어제도 보았던 사람처럼 말이다.
‘살아 있었어.’
그가 사라졌다고 해서 죽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어디서 샘솟은 것인 진 몰라도 그러한 믿음이 마음에 깔려 있었다. 살다 보면 언젠가 한 번쯤은 만나지 않겠냐는 기대도 해왔었다.
비록 이 넓디넓은 중원이나, 의외로 세상은 좁았으니까. 그가 심상치 않은 인물이라는 것 역시 이미 느끼고 있었다.
한데, 그 언젠가 한 번쯤이 이렇게 급작스럽게 찾아올 줄이야!
그것도 임무 중에, 이런 곳에서 길을 가다 마주할 거라곤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정말 백 형이 맞아?”
연신 눈웃음을 짓고 있던 독고백이 조용히 고개를 주억인다. 아무리 다시 보고 또다시 보아도 그는 송운이 아는 그 백이 맞다. 상처를 입고 만신창이가 되었던 자신을 살뜰히 돌보아 주었던 그를 어찌 잊는단 말인가!
송운의 질문에 독고백이 그 앞에 가느다랗고 하얀 손을 내밀었다.
“다시 보게 되어 반갑다. 날 잊었을 줄로만 알았는데…… 이리 기억해주다니 기분이 좋구나.”
환히 웃는 그의 미소는 여전했다.
송운이 고개를 연신 내저었다.
“설마, 설마 내가 형을 잊었을 리가 없잖아.”
둘 사이에 오가는 대화를 엿듣고 있던 남궁장후가 송운의 옆으로 다가왔다. 뭔가 둘 사이에 어색함과 함께 공존하는 친근함이 부러웠던 것일까?
심통이 난 듯 경계를 내비치는 표정이 썩 좋지 못했다.
“운이 형님. 대체 누굽니까? 아시는 분입니까? 갑자기 우리가 있던 곳에 나타나서는 이상한 말이나 잔뜩 하고 있었다니까요?”
“그게…….”
송운이 입을 열기도 전에, 독고백이 먼저 미소 지으며 재빠르게 그 말을 받아쳤다.
“아, 물론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 소개를 하려 했는데, 조금 늦었군요. 다들 운 아우와 친한 사이신가 봅니다. 반갑습니다. 백이라 합니다.”
싱글싱글 웃으며 살갑게 다가오는 독고백을 향해 누가 감히 돌을 던질까.
물론 그것을 맞을 독고백도 아닐 테지만.
이에 차례대로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냥 길 가다 마주친 낯선 이라면 모를까, 송운이 아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예의일 테니.
“쳇. 남궁 세가의 남궁장후라 합니다.”
“종남파의 양풍완이라 합니다.”
“……청성파 당무옥입니다.”
“하북 팽가의 팽후영이라 해요.”
“화산파의 곽철우라 합니다. 아이들이 아직 철이 없어 그런 것이니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사 합니다.”
“모두 혈기 왕성한 것이 보기가 좋습니다. 저는 괜찮으니 너무 나무라지 마세요. 하하.”
그때, 송운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질의를 던졌다.
“한데, 백 형. 뒤에 계신 그 여인께서는 혹여 그사이에……?”
백은 그제야 자신의 뒤를 향해 돌아보았다.
송운뿐만이 아니었다.
뒤에 있는 여섯 명 역시 아닌 척하고 있으나, 다들 제법 궁금한 눈빛이었다. 사내들은 모두 여인의 존재가 궁금했을 뿐 일터나, 그 속엔 백길과 팽후영 역시 포함되어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쿡쿡. 재미있군. 재미있어. 이제 겨우 막 마주했을 뿐인데, 벌써부터 이리 즐거워서야. 내가 안 나설 수가 있나. 역시나 나오길 잘했어.’
독고백이 뒷짐을 쥐고 있던 손을 풀며 몸을 틀었다.
“그것이…….”
꿀꺽.
침 삼키는 소리마저 들릴 만큼 모두가 집중한 시점.
“송 아우가 생각하는 그러한 사이는 아니야. 내 호위 겸 함께 다니는 말벗이니 말이야. 굳이 이렇게 따라다니니 자꾸 사람들에게 집중 받게 되지 무어냐.”
“아…….”
“흠.”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다양한 탄성은 독고백에게 더할 나위 없는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왜인진 몰라도 안도한 듯한 느낌의 것이 더 많았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