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아무리 보아도 기껏해야 이제 약관을 지났을까.
놈들이 무공은 제법 배웠을지언정, 사내 역시 무공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이다. 더구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금껏 저런 호기만으로 덤벼든 놈들치고 제대로 자신을 상대한 이는 없었다.
‘내가 비록 칠 대주 중 가장 낮은 위치이긴 하나 저깟 젖비린내 나는 놈들 따위 상대 못 할까.’
그런 놈들 따위에게 얕보였다는 생각에 사내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서둘러 일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머릿속 저편으로 사라진 지 오래.
지금 사내에겐 이 일이 우선이다.
만일 훗날 왜 일이 늦었는지 묻는다면 이 이야기를 그대로 전해주면 되는 것이다.
“어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여기까지 쫓아온 이상 봐줄 것 없이 둘 다. 죽인다.”
“예.”
“죽여라!”
채쟁-!
한쪽에서 검을 뽑아 들면서, 주변 일대는 삽시간에 개판으로 변했다.
“타핫!”
쐐애액-!
카캉!
“끄악!”
“크으윽……!”
실력이 그리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계속해서 사각팔방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검을 막기엔 당무옥은 조금 벅찼는지 점점 숨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이류급은 수월하였지만, 대다수가 일류급이다 보니 상대하는 게 만만치 않았다.
“헉, 헉……. 빌어먹을……. 뭐가 이리…… 많아! 헉, 헉.”
당무옥은 이러한 상황에서조차 송운이 신경 쓰였는지 눈은 계속해서 그를 향해 쫓고 있다. 그 때문인 건지 뭔지 모르게 시선이 분산되어 자꾸만 허점을 내주고 있었다.
그때였다.
“애송이 주제에 목숨 줄이 여러 개인가 보구나.”
“……어, 언제……?”
자신도 모르게 다가온 적의 기척에 당무옥이 당황한 채, 두 동공이 흔들렸다.
무공으로 다져진 체구에 단정한 머리.
그리고 얼굴 전체를 다 덮어버린 가면 사이로 비친 칠흑같이 어두운 두 눈동자를 가진 자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머리가 띵해질 만큼 진득하고도 씻어도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혈향이 당무옥의 전신을 감싸며 돌았다.
키기긱-!
카앙!
상대의 검을 간신히 빗나간 당무옥은 서둘러 자세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단 한 번이지만 당무옥이 살면서 여태껏 부딪힌 검과는 전혀 다르다. 지금까지는 굳이 목숨을 앗아가지 않아도 겁만 주거나 기절만 시키는 정도로도 충분했다.
살인하지 않아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말이다.
하나, 이번은 아니다.
‘이 녀석은…… 진짜다.’
씨익.
순간 상대방의 입가가 말려 올라갔다.
비웃음이 잔뜩 담긴 조소였다.
온몸으로 그의 이성과 감각이 외치고 있었다.
놈을 도망치거나 죽이지 않으면 정말 나 자신이 죽을지도 모른다고.
덜덜덜덜.
미세하게 떨리던 몸이 점점 더 심하게 떨려오기 시작한다. 좀 전까지 상대하던 녀석들처럼 어중이 띄는 살기가 아니다. 적이 든 칼끝이 하늘의 달빛을 받아 맹수의 이빨처럼 번뜩였다.
‘우, 움직여……. 이 멍청아, 어느 쪽이든 좀 움직이라고 제발!’
점점 가까워지는 검은 그를 찢어 죽일 듯 다가오고 있었고, 그대로 몸이 굳어버린 당무옥은 결국 버티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푹.
그러곤 무언가 묵직하게 두터운 살을 찢고, 근육과 혈맥을 가로지르며 끊어 나가는 소리가 그의 귀를 깊숙이 파고든다.
“컥…… 쿨럭……!”
찰그랑.
애꿎은 검만이 주인의 손에서 흘러내려 힘없이 땅으로 떨어지면서 애처로운 소음을 냈다.
털썩.
더 이상 버티지 못한 당무옥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잠시 후.
그의 질끈 감았던 눈이 떠짐과 동시에 펼쳐진 모습에 당무옥은 안도의 한숨보다는 먼저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그 매서운 검에 찔린 것은 자신이 아니라, 조금 전까지도 살기를 풀풀 내뿜어내던 적이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인지라 당무옥은 어안이 벙벙했다.
“당 소협. 제게 등을 맡기시지요.”
송운이 그를 대신해 적을 떼어내고 당무옥의 등 뒤에서 일으켜 세운 것이다.
어느새 당무옥의 손에는 검이 다시 쥐어져 있었다.
다른 점이라 하면 이상하게도 조금 전 일이 거짓말처럼 손의 떨림은 멈춰있었다.
“결론적으로 제가 하자고 꼬드긴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책임도 제가 져야지요.”
처음으로 당무옥의 눈에 송운이 다르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 * *
그 뒤로 반 각도 채 지나지 않아 상황은 빠르게 종결되고 있었다.
그것도, 단 한 명에 의해서.
심지어 싸우는 내내 송운은 들고 있던 검은 어느새 집어넣고 맨 몸이었다.
‘아……!’
당무옥이 처음으로 제대로 지켜본 송운은 감탄사를 절로 내뱉게 만들고 있었다.
송운의 몸은 유연했다.
하나 단순히 유연하지만은 않았다.
그의 동작은 하나하나 이어질 때마다 뚝뚝 끊어지는 듯한 느낌도 없었으며, 부드러우면서도 거칠었고, 묵직하지만 서도 가벼웠다. 모든 동작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의 쾌와 정확성까지 갖추었다.
한마디로 그는 밤하늘에 한 마리의 고고한 새처럼 허공을 휘저으며 지배하고 있었다.
가장 난관이라 생각했던 상대인 녀석마저 그의 손에 놀아났다.
그렇게 모두가 제압당하고 난 후, 남은 건 단 한 명.
그마저도 송운이 재빨리 그의 혈도를 모두 짚은 상태였다.
“마지막 남은 한 명이군요.”
송운과 당무옥을 중심으로 한 주변은 모두가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그러나 그중 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까 송운의 검에 의해 손이 찢겨나간 녀석만이 유일하게 피를 흘리고 있었다.
다른 모든 적들은 단전이 깨졌을 뿐이다.
어쩌면 무인에게 무공의 근원(根源)을 잃은 것은 생명을 잃은 것보다 더한 고통일 테지만.
‘……죽이지 않았어.’
당무옥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 해두면 두 번 다신 무공으로 이런 나쁜 짓을 하고 다니진 않겠지요.”
“…….”
태연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송운의 모습에 당무옥은 마지막 할 말조차 잃어버렸다.
그의 몸에는 어떠한 생채기도 나 있지 않았다.
자신에게 살기를 내비친 이를 죽이지 않고 적을 제압하는 것은 죽이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것도 상대방이 전부 무기를 들고 있다면 말이다.
그 예로 조금 전 자신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아니, 난…… 애당초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이 멍청이 같으니라고! 그런 주제에 오룡일봉은 무슨 오룡일봉이야?’
꽈악.
당무옥의 두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 힘이 어찌나 강했는지 손등의 핏줄이 튀어나오고 손바닥과 손톱이 맞물려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송운을 거부해왔다.
온몸으로, 마음으로 그를 튕겨 내왔다. 그건 그저 상대방이 미워서만이 아니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그 실력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믿지 못하였고, 따르지 못한 것이다.
가뜩이나 오룡일봉 중 가장 뒤처지는 것도 부아가 치미는데,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온 놈이 나와서 대장 노릇을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겨우 한 살 차인데…….’
그는 자신보다 너무나도 많은 것을 앞서나가는 사람이다.
이제는 그것마저도 변명거리를 잃어버렸다.
고개를 푹 숙이고선 주먹을 쥔 채, 당무옥이 송운을 향해 물었다.
“……한 가지만 물어봐도 됩니까?”
“백 가지는 더 물어보셔도 됩니다.”
“왜…… 왜 절 도운 겁니까? 제가 밉지도 않습니까? 오히려 눈엣가시 같은 놈이 사라질 좋은 기회 아니었습니까?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싸움에 말려 놈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등, 변명할 여지는 사방천지 널린 것 아니었습니까?”
당무옥 특유의 꽤나 독설적이고 날카로운 가시가 박힌 말투였으나, 그 끝에는 약간의 물기가 담겨 있었다.
송운은 망설임 없이 미소 지으며 답했다.
“아까도 말했겠지만, 무엇보다 제가 벌인 일이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제가 이끄는 한 대의 대원을 그대로 놔둘 수는 없었습니다. 아, 혹시라도 그 일로 인해 자존심이 상하신 거라면…… 사죄드리겠습니다.”
그와 동시에 송운이 공손히 그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더는 그를 미워할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니, 미워하는 건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는 이미 자신을, 오룡일봉 모두를 동료로서, 좋은 벗으로서 생각하며 마음속에 품고 있다는 걸 깨달아버렸으니까.
무엇보다 그만큼의 실력과 인품을 가졌으니까.
“……얼른 신호를 올리죠. 다른 사람들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주.”
“음……?”
송운은 순간 당무옥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말이 자신이 잘못 들은 줄로만 알았다. 하나 다시 되새겨 보아도 영락없는 그 말이었다. 그것도 당무옥에게선 절대 평생을 가도 들어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
‘대주라……. 허허. 드디어 당 소협이 조금 마음의 문을 연 것인가?’
이에 송운이 마음속으로 차마 내뱉지 못할 실소를 터뜨렸다.
“그럽시다. 당 소협.”
* * *
피유웅-
퍼벙-!
둘은 곧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혹여라도 일이 마무리되었을 경우 보내기로 한 표식이었다.
그걸 본 다른 두 조도 모두 표식이 올라온 그곳으로 달려왔다.
“뭡니까? 설마 정말 찾아낸 겁니까 형님?!”
“아마도 그러신 듯합니다. 아미타불…….”
백길은 상황을 둘러보며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송운과 당무옥의 주변으로 널브러진 이들이 시체가 아닌 살아 있는 자들의 온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아무리 그가 무공을 익히고 검을 손에 댄다곤 하나 백길은 그 전에 소림승이다. 필요에 의해 무기를 손에 잡았으나, 결코 살상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일이 끝났다는 표식을 듣고 허겁지겁 달려왔으나, 예상과는 달리 죽이지 않은 모습에 한편으론 안도감이 든 것도 사실이다.
“하면 이제 저 녀석에게 혈교의 핵을 물어보는 일만 남은 건가요?”
팽후영이 사지가 혈이 짚여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땅에 내동댕이쳐진 이미 세상을 다 잃은 것과도 같은 눈을 하고 있는 녀석을 향해 가리켰다.
‘멀쩡할 리가 없지.’
“그렇지 않아도 계속해서 묻곤 있지만 아무리 물어봐도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고.”
그 말에 당무옥이 표정을 찡그리며 답했다.
“애초에 쉽게 말할 거라는 건 생각도 안 했잖아. 안 그래요? 그 녀석들의 처우만 보아도 대강 알지 않습니까?”
그때, 가만히 누워만 있던 이 중 한 명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