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이대론 놓칠 수 없다.’
깊은숨을 들이켠 송운이 다시 천천히 내뱉으며 말을 이었다.
“이번에도 조는 저번과 같이 나눌 겁니다. 어제의 그 기운. 잊지 않으셨으리라 믿습니다. 그 길의 끝을 쫓으면 무엇이든 나오겠죠. 이 송 모, 반드시 찾아낼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으음.”
무슨 거창한 말은 아니었지만, 이미 몇 날 며칠 밥은커녕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계속해서 기운만 소모하고 있는 오룡일봉이었지만, 그것은 지쳐가는 그들에게 힘이 되기엔 충분한 것 같았다.
포기하지 않으면 희망은 있다.
송운이 그 잠시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를 되살려낸 것이다.
“……그래, 뭐 이까짓 거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찾으면 되는 거 아니야? 찾자고. 형님들. 어차피…… 다들 나보단 뛰어나잖아? 벌써 몸통 코앞까지 찾아냈다고. 우리가 지금까지 못 해낸 게 있었나? 어차피 되든 안 되든 해봐야 하는 거고. 이 정도야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거라고. 거 갑시다.”
계속하여 쳇바퀴 굴러가듯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당무옥이 먼저 나섰다. 그러자, 이번엔 팽후영이 한 번 더 거들었다.
“……미루적거리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이럴 시간에 가시죠. 백 스님.”
“아미타불, 그럼 후에 뵙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그 한마디에 팽후영과 백길이 떠나고, 송운과 당무옥마저 떠난 후, 남은 두 사람 역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다 곧 발걸음을 떼었다.
* * *
어느새 해가 진 저녁.
어둠에 또 한 번의 어둠을 더해 자신의 모습을 극한으로 숨긴 그들은 그것조차도 불안한지 기척마저도 모조리 없앤 채 움직이고 있었다.
가장 먼저 선두를 달리는 이가 손짓으로 신호를 주면 그 뒤를 뒤따르고, 또 그 뒤를 뒤따르는 그런 형식의 모습이었다.
휙.
‘저쪽으로.’
한참을 달렸을까.
멈칫.
갑자기 선두에 가던 이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었다.
‘흡!’
파바박!
촤락!
일이 벌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달려가던 그들의 눈앞에 매캐한 흙먼지가 허공을 휘감았고, 곧 그것이 가라앉으면서 먼지를 만들어낸 정체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선두에 섰던 사내가 어이없다는 듯 앞을 바라보았다.
검은 두건을 두른 이들은 총 열 명, 그 앞에 나타난 이는 총 둘이다.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놈들이.
‘알량한 재주는 조금 가지고 있을지언정, 적어도 귀찮은 녀석들은 아닌 것 같군.’
선두에 섰던 사내가 빠르게 가로막은 이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지만,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 딱히 이렇다 할 외형적 특징은 나타나지 않는다.
‘무공은 조금 익힌 것 같지만…….’
웃음이 나올 뿐이다.
그의 눈앞에 드러난 이들은 약간 왜소한 체격의 아직은 소년으로 보이는 이와 나머지 한쪽은 커다란 도포의 옷깃 때문인지 약간 여리여리해 보이는 것에 비해 키가 유달리 크다는 것뿐.
정말 그게 전부였다.
해서 허무할 정도다.
허리춤에 둘 다 검을 매달고 있지 않았다면 그냥 길을 가던 나부랭이로 알 뻔했지 않은가.
적낭아혈(赤狼牙血) 우낙(禹洛).
혈랑대(血狼隊) 대주이자, 여태껏 수많은 이들을 상대했던 그로서는 황당하기 그지없을 뿐이다.
그는 다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은 확실한 것 같은데…….’
어쩌면 그냥 길을 가던 협객 흉내를 내려는 세상 물정 모르는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일지도 모른다.
지금 맡아서 하는 일이 일이다 보니 혹여나 구파일방, 오대세가에서 파견을 보낸 이들은 아닐지 순간적으로 긴장했던 자신이 한심해 보일 지경이었다. 생긴 것과는 달리 안쓰러울 정도로 남루한 차림인 것을 보아하니 이 근방에서 아마 노숙이나 하던 놈들일 게 뻔했다. 하나 지금은 이런 놈들을 상대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미, 잔챙이 놈들이 들키는 바람에 일이 귀찮게 된 상태다. 서둘러 이곳을 빠져나가지 않으면 덜미가 붙잡힐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미래는 정해져 있다.
‘역시 그냥 무시하고 돌아가는 게…….’
사내가 돌아가는 쪽을 선택하려 할 무렵.
가로막은 이들이 서로 나누는 대화가 그들의 귓가에 울렸다.
“생각보다는 별거 없네.”
“그렇군요. 꼬리를 자르고 도망가는 몸통인지라 제법 기대했는데 말이죠.”
“흥. 이 정도 규모면 뭐, 이래봐야 나 혼자 충분하겠구만은…… 요.”
계속되는 둘의 다툼에 사내의 흉터 가득한 이마가 꿈틀댄다.
‘우리를 앞에 두고 무시해?’
감히 자신들의 앞길을 막은 것까지는 용서하고 넘겨주려 했다. 지금은 자신이 맡은 임무가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상관이 어떠한 인물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해서 사내의 무리에게는 철없는 어린놈들을 상대해 줄 시간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자칫 조금만 늦는다면 자신이 이끄는 소대 전체의 목이 달아날 테니까.
한데…… 말본새가 영 마음에 내키지 않는다.
게다가, ‘나 혼자서도 충분하겠다.’라니?
이는 자신을 포함한 소대 전체가 무시당하는 꼴이지 않은가.
사내의 이마가 다시 한번 흉하게 꿈틀댔다.
이때부터 이성을 잃어버린 탓에 그들이 하는 대화의 핵심은 듣지 못한 듯했지만 말이다.
아니, 알아들었다 할지언정, 이런 어린놈들이 자신들을 쫓아왔다면 콧방귀를 낄 일이다.
이런 그의 변화를 알아챈 이가, 곁에서 그를 조용히 말렸다.
“참으시지요.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들입니다. 지금은 가야 할 때입니다. 대주.”
이 내가 설마 그 정도도 모를까.
마음을 다잡으며 가라앉힌 후, 지나치려고 하던 그 순간.
“가긴 어딜 간다는 거야? 난 그쪽에게 볼 일이 있는데.”
연신 불만이 있는 듯, 말을 틱틱 내뱉으며 표정을 찡그리던 이가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사내와 둘이 눈이 마주쳤다.
‘큭, 제법이로군.’
그의 눈에서 쏘아져 나오는 그 기세만큼은 고집과 아집, 온갖 것이 똘똘 뭉쳐 단단하고 거센 것이 쉽사리 물러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를 생각하면 그 또래의 다른 놈들보다 제법이다.
‘딱 보아하니 외골수에 독불장군의 끼가 다분해 보이는군.’
게다가 다시 보니 육체 역시 오랜 수련으로 다져진 몸이다. 아무래도 보통 애송이가 아닌 것 같다는 확신이 그의 이성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하나, 그보단 그 옆에 있는 쪽에서 풍기는 위화감이 더욱 심했다.
‘뭐야…… 어째서 내가 이런 걸 눈치채지 못했지?’
뒤늦게 들어버린 생각에 우낙이 순간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하나 딱 그뿐이다.
워낙 정신이 없던 상황이라 있을 수 있는 실수라고 치부한 것이다.
“이놈들. 생각보다는 위험할지도 모르겠군.”
“예? 무슨 말씀이신지…….”
“단순히 길 가다 협객놀음 따위나 하는 혈기 왕성한 애송이는 아니란 소리다.”
못해도 정파 놈들일 가능성이 농후해 보였다.
사내는 자신을 향해 여전히 노려보고 있는 녀석을 향해 조용히 읊조렸다.
“……네 놈들. 어디 소속이냐?”
“그런 것 따위는 알 필요 있을까? 당신들, 혈교지?”
그 이름을 내뱉으면서도 너무도 당당해 보여 순간 애송이들이 말한 단어가 혈교가 그 혈교가 아니라는 생각까지 잠시 들었지만, 이내 사내는 정신이 번뜩 뜨였다.
‘……쯧. 일이 귀찮게 됐군.’
방심한 탓이다.
서둘러 소식을 접한 순간 피해서 도망 나왔다고 생각했거늘, 하필 마주한 것이 놈들이라니!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상황을 타파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냥 말 그대로 일이 조금 귀찮게 돌아가게 됐을 뿐.
‘설마하니 정파 놈들이 저렇게 새파란 애송이들을 보내올 줄이야.’
아무리 실력이 있다고 한들, 실전경험은 또 다른 이야기다.
사내는 속으로 그 둘의 배후에 있을 윗머리들에게 차가운 조소를 흘렸다.
“……근데, 우리 멋대로 이렇게 나서도 되는 거…… 요? 총군사님께선 분명 조심히 행동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요.”
여전히 어색한 존댓말을 하고 있던 이가 먼저 말을 걸었고, 그 말에 듣고 있던 다른 이가 잠시 감았던 눈을 뜨며 답했다.
“음……. 어찌 되었건,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놓칠 순 없지 않겠습니까?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지요.”
어느새 그의 입가엔 미소가 슬쩍 피어오르고 있었다.
* * *
몇 날 며칠을 몇 시진도 채 눈을 제대로 붙이지 못한 송운 일행이지만, 도주한 놈들을 잡지 못하면 또다시 놈들의 행방은 묘연해질 터.
여기서 멈출 수 없다.
그렇게 각자 흩어져 찾던 도중, 송운이 가장 먼저 놈들의 기척에 가까워진 것이다.
“후.”
송운은 겉으로 드러난 차분한 미소와는 달리 그의 속은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분노였다.
‘겉으로 드러난 상대는 총 열 명. 그리고 숨어 있는 놈들이 스무 명이라……. 그 중 초절정의 경지에 다른 놈이 하나, 절정에 다른 놈 하나에 나머지는 모두 일, 이류 고수…….’
자신들은 나름대로 꼼꼼히 숨어 있다곤 하지만 기운을 감지하는 게 남다른 송운에겐 놈들을 쫓는 건 너무도 쉬웠다. 그랬기에 더 허망했다.
송운은 더이상 지체하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조금 무모할 수도 있는 일이다.
일류 고수급만 하더라도 수가 여럿이다.
아무리 송운이 있다고는 하나, 그만큼 상대하기란 만만치 않을 터다.
‘초절정에 이른 자가 이 무리의 우두머리겠지. 그렇다면…….’
송운은 순식간에 머릿속에서 계산을 마쳤다.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송운만을 바라보고 있던 당무옥을 향해 송운이 조용히 읊조렸다.
“당 소협. 넋 놓고 있을 시간 없습니다. ……한 놈만 남기죠. 놈들은 총 삼십 명입니다. 몸조심하세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 해서든 정보를 내뱉을 놈 한 명은 남겨야 합니다. 당 소협. 제 뒤를 맡기겠습니다.”
반드시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
그래야만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다.
파밧!
그 말을 끝으로 송운은 곧바로 튀어 나갔다.
“……에이 씨.”
당무옥 역시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단순히 송운이 싫은 거지 누군가 다치길 원하는 건 아니니까.
‘저것들이……!’
자신들은 있으나 마나 한, 둘의 태도에 슬슬 열이 오르던 도중, 난데없이 놈들이 달려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