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턱.
멈추지 않고 읽고 있던 책을 닫은 송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총군사께서 여기까진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이미 알아차리셨습니까? 워낙 집중하신 듯하여 조용히 다가온 것인데……. 역시 송 소협의 귀는 못 속이나 봅니다.”
제갈염이 살짝 멋쩍었는지 어설픈 웃음을 남기며 송운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한데…… 총군사께서 다음부터는 필히 말씀을 낮추시겠다 하셨던 것 같습니다만……. 제가 잘못 들었던 것입니까?”
“아, 제가 그랬던가요? 음……. 좋네. 자네도 이리 말을 하는데 내가 어찌 계속 거절을 하겠는가? 그리하도록 하겠네.”
제갈염의 말에 이제야 마음이 편해졌는지 송운의 얼굴에도 미소가 슬쩍 피어올랐다.
‘이제야 좀 편안해지겠구나.’
아무래도 무림맹의 총군사이자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제갈염에게 계속해서 높임말을 듣는 것이 조금 불편했던 건 사실이다.
그랬기에 송운은 실례를 무릅쓰고 제갈염에게 재차 물어본 것이다.
“그래. 혈교에 대한 정보는 좀 얻었는가?”
그 물음에 잠시 밝아졌던 송운의 얼굴에 다시 그늘이 드리워졌다.
“워낙 오래된 일인지라 드문드문합니다. 그래도 이 정도의 정보라도 남아있으니 다행이라면 다행이겠지요.”
송운의 말대로 그 당시 혈교가 사용했던 강시술에 대한 정보는 거의 모두 불살라진 상태.
또다시 누군가 그것을 악용하려 든다면 골치 아파질 것은 당연지사 한 일이었기에 장로들이 고심하여 내렸던 판단이었다.
결국 그것은 누군가를 통해 다시 벌어지고 말았지만…….
‘그 당시의 판단이 지금에 와서 이리도 애를 먹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제갈염 역시 그것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새로운 시대다.
지나간 과거에 관한 판단에 연연해하고 있을 시간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들려오는 정보력에 따르면 그들은 아주 조심히 움직이고 있다고 하네. 우리 정파가 엄청난 손해를 입었었으나, 그들 역시 당시의 전력을 모두 다 잃어버렸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지. 이를 유추해 본다면 다시 나타난다고 할지언정, 그 세력이 많이 축소된 상태일 가능성이 크네.”
그의 말에 일리는 있다.
‘총군사님의 말이 맞다. 게다가 세상 이치가 그렇듯 한번 패망의 길을 걸은 이들이 다시 일어나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니…….’
송운은 제갈염의 말에 고개를 천천히 주억였다.
그런 그의 반응을 눈으로 살피며 제갈염은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실상 이번 파견의 임무는 자네도 이미 알겠지만…… 그들의 거처와 규모를 알아내는 것일세. 무엇보다 자네는 이미 한번 부대주로서 토벌을 나갔던 경력이 있질 않은가? 잘 해낼 수 있을 게야. 해서 기동력이 뛰어난 오룡일봉과 자네를 보내고자 한 것이니, 만일 일이 커진다면 연락을 취해야 하네. 이쪽 역시 대비하고 있다가 곧장 더 지원을 보내줄 터이니 말이야.”
‘그래. 이건 우리만의 일이 아니다.’
사실 그간 혈교에 대해 알아보면서도 그의 마음속 깊은 곳 어디선가는 불안한 마음이 없잖아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알면 알수록 그들의 존재는 사람보다는 괴인에 가까웠고, 놈들과 이미 한번 마주했던 송운으로서는 더욱 긴장감이 맴돌았었다.
자신에게 시공검이 있다고 한들 수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한다면?
과연 그들을 상대로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지 머릿속으로 수도 없이 계산하고 또 수련해왔지만, 그때마다 불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한데 그러한 제갈염의 말을 듣고 나니 어딘지 모르게 조금은 안정이 찾아왔다.
“우리도 절대 앞으로의 세대를 이끌어나가야 할 젊은 인재들을 다 잃을 생각은 없네. 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알겠는가?”
걱정하지 말라는 그의 말은 새삼 송운에게 든든하게 느껴졌다.
‘그래.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니다.’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큰 힘이 아니겠는가?
“예. 알겠습니다. 총군사님.”
그의 말에 송운의 얼굴에 강인한 미소가 피었다.
第八章. 꼬리잡기
오룡일봉이 모두 초출되어 모인 한자리.
그 안에는 송운과 제갈염도 함께하고 있었다.
‘보아하니 썩 좋은 일은 아닌 것 같군.’
본능적으로 분위기를 느낀 곽철우가 조심스레 제갈염을 불렀다.
“총군사님. 부르셨습니까?”
“다들 왔느냐? 우선들 앉거라.”
쪼로록.
탁.
“이만 모두들 물러가 있거라. 주변엔 단 한 명이라도 남아 있어서는 아니 되느니라.”
오룡일봉이 모두 자리에 앉자, 시녀들은 인원수에 맞추어 차를 내왔다. 시녀들이 물러가고 나서야 제갈염의 굳게 닫혔던 입이 열었다.
“……오늘 다 같이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할 임무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하시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저희를 부를 이유도 없으실 테니까요.”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남궁장후만이 툭 그 말을 되받아쳤다. 평소 같으면 곽철우가 나서서 이를 제지했을 테지만 오늘은 그조차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 수 없이 묘한 분위기 속 모두가 긴장하던 차.
달그락.
홀로 태연스럽게 찻잔을 들어 올린 제갈염은 차분히 다음 말을 이었다.
“말을 꺼내기 이전에…… 이 일은 너희를 제외하고선 그 누구도 알아선 아니 된다.”
“늘 그렇게 해왔지 않습니까? 저희가 입이 가벼운 놈들도 아니구요. 그런 걱정일랑 고이 접어두시고 말씀하시지요.”
당무옥이 자신 있게 말하자 이에 제갈염이 더는 망설이지 않겠다는 듯 편안한 목소리로 속 안에 담아두었던 말을 흘려 내보냈다.
“이번 임무는…… 혈교의 꼬리를 잡아내는 것이다.”
“……?”
“혈교?”
오룡일봉 중 누구 하나 그 이름을 아는 이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겨우 아이들의 나이는 약관을 조금 넘은 것뿐이다. 한데 이미 반백 년 전에 묻힌 그들의 이름을 알 리는 만무하리라!
송운 역시도 이번 일을 겪고 듣지 못했다면 평생 알지 못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당연한 반응이겠지. 나 역시도 그들에 대해선 자세히 아는 것이 없으니……. 평생 모르고 사는 편이 훨씬 좋았겠지만…….’
송운의 얼굴엔 순간 아무도 모를 만큼 빠르게 씁쓸함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혈교란…….”
제갈염은 예상했던 반응이니만큼 천천히 그들에 대해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찻잔에 담긴 차가 얼마나 차갑게 식었을까?
한참 동안의 이야기가 끝이 나갈 무렵.
오룡일봉의 표정은 가지각색이었다.
곽철우의 안면엔 짙은 연기가 뒤덮인 것처럼 어두워졌고, 남궁장후는 무언가 오묘한 웃음이라고 해야 할지 울상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표정이 되었다.
거기에 백길은 연신 눈을 감고선 아미타불을 외우며 손에 쥔 염주를 돌렸고, 양풍완과 당무옥은 밀가루 범벅이라도 한 것처럼 얼굴이 새하얗게 물들어있었다.
유일하게 표정의 변화가 드러나지 않은 이는 팽후영뿐.
‘뭐, 워낙에 평소에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여인이니.’
송운은 그렇게 곁에서 그들의 반응만을 살핀 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해서 너희들에게 부탁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때, 누군가 제갈염의 말에 질의를 던졌다.
“하면, 그다음 계획은요?”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 또랑또랑한 그 속에는 강단이 차 있는 고운 목소리의 주인공.
오룡일봉의 홍일점.
‘팽후영.’
하나 그녀의 목소리는 안면과는 달리 미세하게나마 흔들리고 있었다.
송운에게 그것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마냥 썩 괜찮지는 않다는 표시였다.
“너희가 출발하고 나면 곧바로 중원 각지에서 편성된 소대들이 밤낮 가리지 않고 대기를 하고 있을 게다. 그러다 너희들의 전갈이 들어오게 되면 곧바로 그 지역에 파견될 테지.”
“……만일 저희가 놈들이 있는 곳을 알아내지 못하면요?”
꿀꺽.
모두의 긴장 어린 시선이 제갈염에게로 향했다.
“십 주야다.”
“……?”
질문과는 다른 영문을 모를 법한 그의 대답에 오룡일봉 모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번에는 팽후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시일 내에 무언가 작은 것이라도 알아내지 못한다면…… 대기하고 있던 다른 소대들 역시 탐색전에 나서게 되겠지.”
“그럼 어째서 동시에 나서지 않는 거죠? 왜 하필 그 중요한 일을 저희가 맡아야 하는 건가요?”
날카로운 팽후영의 눈빛과 질문이 또다시 제갈염을 강타했다.
그녀의 말대로 이번 임무는 그 어떠한 것보다 중요한 위치였다. 뒤를 받쳐줄 소대들보다 더 말이다.
꼬리를 잡지 못하면 머리는커녕 몸통조차 찾지 못하는 법.
실력은 있지만, 아직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드러나지 않은 이들. 그러면서도 비밀을 간직할 줄 알며, 중원 곳곳을 돌아다녀도 쉽사리 의심받지 않을 만한 지위.
지위를 가진 이들이 바로 송운과 오룡일봉이다.
백능과 제갈염이 그들을 지목한 연유였다.
순간 제갈염이 속으로 웃음을 자아냈다.
‘참으로 많이도 성장했구나. 그 작고 어리던 아이가 이리도 똑 부러지게 자라다니. 하북팽가에서 오랜만에 진정 제대로 된 아이를 길러내었어. 하북팽가는 도에만 특출한 줄 알았더니 벌써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야기 방향을 끌어낼 줄 알다니……. 거기에 핵심을 짚을 줄 알아. 무의 실력이야 이미 세간의 눈을 통해 검증된 아이이니. 하하…… 어쩌면 훗날 제갈세가를 제치고 저 아이가 내 뒤를 이어 이 자리에 오를지도 모르겠구나.’
제갈염은 본가가 들으면 기겁할 만한 생각을 하면서도 태연함을 유지했다.
하나 이 정도로 당황할 정도로 그는 녹록지 않았다.
총군사의 자리에 괜히 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듯 제갈염이 막힘없이 대답을 이어나갔다.
“그건…… 혹시라도, 아주 만에 하나라도 있을지 모를 임무 실패를 대비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너희를 내보내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이들이기 때문이지. 이번 임무에 너희들만큼 적절한 이는 없더구나.”
제갈염의 답은 끝났다.
그 이상의 질문도 없었다.
흡족한 미소를 띤 제갈염이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번 너희의 임무의 주안(主眼)은 알아채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움직여 혈교의 주거지 혹은 핵(核)을 찾아내는 것이다. 혹여라도 도중에 혈교와 부딪히게 되거든 반드시 피해야 한다. 절대, 절대로 싸워선 안 될 일이다. 내 말 꼭 명심하거라.”
* * *
‘이제 남은 건 어디로 향해야 할 것인지를 정하는 것뿐인가.’
나올 만한 정보는 모조리 다 쥐어짜 낸 상태.
심지어 제갈염이 그동안 모아두었던 전 중원 각지의 정보원들에게서 들어온 소식들 역시도 송운에게 넘어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