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8화
파앙-!
둘의 대련을 마무리 짓는 마지막 한 수였다.
털썩.
정확하게 허점을 짚인 남궁장후는 맨바닥에 쓰러진 채, 송운에게 목을 내주어야 했다.
“허억……. 허억……! 제가 졌…… 습니다.”
욱신욱신.
‘분명 맞지도 않고 미미한 차이로 멈추었는데도 그 여파가 참으로 어마어마하구나. 젠장……! 결국 결과는 그때와 똑같질 않은가? 오히려 격차만 더 늘었어. 이래 봬도 남궁세가에서 손꼽히는 무인인데 꼴이 말이 아니구나. 남궁장후.’
몇 년 전.
멋모르고 달려들었던 철없던 그때와 똑같았다.
비등?
비견?
그런 건 없었다.
너무도 완벽한 송운의 완승이었다.
몸을 털고 일어난 송운이 빙그레 웃으며 남궁장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속이 쓰렸지만, 그런 송운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은 예의에 벗어나는 행동이다. 예전이었다면 그런 것 역시 상관없이 무시했을 터나 정신적으로도 많이 성숙해진 그였기에 더는 그런 무식한 행동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덥석.
남궁장후가 일어나자 송운이 곧바로 포권을 취하며 예를 갖췄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남궁 소협. 못 본 사이 실력이 일취월장하셨군요.”
진심이 가득 담긴 칭찬이었다.
하나 그런데도 남궁장후는 스스로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얼굴에는 불만이 한가득이었다.
“일취월장하면 무엇 합니까? 조금이라도 따라잡은 줄 알았는데……. 쳇. 결국 제자리걸음보다 못한 꼴이니.”
그 말은 사실이었다.
같은 시간이 주어졌음에도 더 발전한 것은 송운이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갑절로 힘들다면, 높은 곳에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은 몇 갑절은 더 어려운 법.
이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남궁장후이기에 이번 대련으로 인해 스스로에게 더욱 화만 나게 된 꼴이다.
그런 그의 생각은 바깥으로도 표출되어 목소리에서 절로 배어 나왔다. 성격이 지나치게 솔직한 탓인지 남궁장후는 그것을 억지로 감추는 법을 몰랐다.
“후……. 대체 어찌하면 형님처럼 강해질 수 있는 겁니까? 몇 년간 나도 죽어라 수련에만 매진했는데……. 이 아우는 아무리 해도 따라잡을 수가 없으니 그저 답답할 뿐이요.”
그 말을 들으니 송운 역시 씁쓸함이 마음에 걸렸다. 무인들은 서로의 약점을 감추려 하고 자신의 약함은 결코 타인에게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더라도 말이다.
‘안타깝구나. 참으로 안타까워.’
그라고 강함에 목마른 답답함을 어찌 모를까?
자신 역시도 과거에 그러한 고심과 번뇌로 체증(滯症)을 달고 산적도 있었다. 그마저도 훗날 나이가 들고서야 그 모든 것이 결국 욕기라며 내려놓아 버렸지만…….
하물며 남궁장후는 이제 약관을 막 넘은 젊은 날이 창창한 청년이 아니던가?
지금은 송운 역시도 달라졌다.
계속해서 자신을 단련시키고 또 단련시켜왔다.
전생으로부터의 기억이 없었다면, 송운 역시 다시 돌아왔어도 힘들었을 터였다.
‘……미약할지라도 도움이라도 된다면야.’
송운이 잠시간의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조언이나 권고를 할 만큼 잘난 사람은 아니지만, 한마디 건네자면 남과 비교하지 마세요. 비교하면 할수록 행우(幸祐)는 사라지고 허탈감, 허무함, 그런 텅 빈 감정만을 가져다줄 겁니다. 결국 무공이라는 것은 나 자신과의 싸움이 아니었습니까? 남궁 소협은 지금도 충분히 강합니다. 조급함은 모든 것을 망치는 법이지요. 저는 애당초 무관이 아닌 학문을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하나 그것이 어쩌면 저에겐 더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르겠군요.”
말을 마친 송운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있던 남궁장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확실히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무인을 마주치는 게 쉽지 않았으니 그것 역시 거짓은 아니지.’
짧지만 굵었던 송운의 말이 와닿은 것일까.
조용히 듣고 있던 남궁장후가 고개를 들더니 반대편 하늘을 바라보았다.
송운이 말한 내용을 이해한 것일까?
“……형님 말대로 제가 너무 성급했나 봅니다. 이거 참…… 매번 이리 신세만 지니 할 말이 없습니다. 이러니……. 아닙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그러곤 곧장 그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인 뒤 자리를 떠났다.
송운도 딱히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기고 간 말만이 송운의 머릿속에 떠다녔다.
“……감사합니다. 형님. 그리고 다음에 얼굴을 보았을 때는 말 편히 해주셨으면 합니다.”
송운은 그런 남궁장후가 싫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이야 어떠하든 지금은 아니다.
그는 변했다.
게다가 오히려 늘 서로 속으로 헐뜯고 머리를 굴려야 하는 세상 속에 살다 보니, 남궁장후 같은 성격이 되레 반갑고 고마웠다.
그래서 그가 형님이라 부르는 것도 썩 나쁘지 않아 정정하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고민하고 부딪히고 또 고민하는 것이 젊은이의 일인 것을……. 허허.’
그렇게 또 하루 새벽이 흘러가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눈을 뜬 송운은 간단히 조식을 해결한 뒤, 어딘가로 발걸음을 향했다.
“……정말 크구나.”
정술전(正述殿).
거대한 기왓장에 굴곡과 수평이 잘 어우러져 있으며, 경비가 삼엄하여 너무도 엄숙한 분위기가 나는 이곳.
바른 글을 읽고, 서술하며 익히자는 뜻을 지닌 무림맹의 거대한 서고이자 보고(寶庫)였다.
전 중원을 통틀어 이 정도 규모의 서고는 황궁이나 무당, 제갈세가가 아니면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유구한 역사가 깃든 곳이었다.
하나, 정확하게 송운이 가려 한 곳은 그곳이 아니었다.
송운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어느 한 곳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자 정술전을 훨씬 작은 크기로 축소해둔 것과도 같은 모양의 건물이 드러났다.
‘정술전에 비하면 크기가 많이 작긴 하구나.’
척.
송운이 그곳을 들어가려 하자, 지금까진 지켜만 보고 있었던 문지기들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그중에서도 송운이 들어가려는 곳은 무림맹 내부에서도 아무나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경계가 살벌한 곳이다.
게다가 낯선 얼굴이기에 그들의 반응으로선 당연한 것이다.
“잠깐 멈추시오. 누구시기에 이곳을 들어가려 하는 것이오?”
앞길을 막아서는 문지기들의 모습에 송운이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그냥은 못 들어가는군.’
송운은 그 모습에 당황하지 않고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스릉!
“뭘 하려는 것이냐!”
순간 그런 송운의 행동에 혹여나 있을지 모르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였는지 문지기들이 한껏 긴장하며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하나 송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곧바로 쥐었던 손을 펼쳤고, 곧 문지기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반짝.
차가운 암기들이 튀어나올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르게 자그맣고 동그란 모양의 금빛을 띠고 있는 패가 송운의 손끝에 들려있었기 때문이다.
어제저녁 제갈염이 그에게 필요할 것이라며 미리 내어주었던 것이다.
‘무림맹의 핵심이라 불릴 정도로 중요한 곳인 만큼 경계도 철저한 법인 게지.’
문지기들은 잠시 당황하는 표정이 얼굴에 서렸으나, 이내 정신을 차린 후 입을 열었다.
“실례하지만 소협의 이름이 어찌 됩니까?”
“송운이라 합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인 질문을 듣고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문지기의 경계 어린 시선이 거두어지는 것을 느꼈다.
“……실례했습니다. 들어가시지요.”
확인 절차를 끝내고 나서야 언제 그랬냐는 듯 제자리로 돌아갔고 송운은 곧 내부로 들어설 수 있었다.
끼이익.
쿵.
육중한 철문이 특유의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곧 쿰쿰한 특유의 책 냄새가 송운의 코끝을 찔러왔다.
‘허……! 정말 어마어마하구나.’
발을 내디딘 송운은 한동안 냄새와 함께 들어가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거대한 보고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적어도 팔 척(八 尺)은 되어 보이는 높이의 책장에 빽빽이 꽂혀 있는 책들은 그를 놀라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비록 옆으로 넓은 공간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정보만을 추리고 뽑아낸 역사의 장이지 않은가?
‘이것이 과연 무림의 가장 오랜 역사를 지켜온 무림맹의 저력인가? 허허……!’
하지만 양이 많다고 하여 중구난방으로 되어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속에는 하나하나의 순서가 존재하며 찾아보기도 손쉽게 정리가 되어있었다. 중요성의 순서대로 갑(甲), 을(乙), 병(丙), 정(丁)식으로 나누어져 이곳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게다가 먼지가 끼어있을 법도 하건만, 책들은 지나온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빛바랜 종이 상태와는 달리 겉면은 깨끗한 상태.
그것만 보았을 뿐인데도 그동안 무림맹이 얼마나 정보와 역사를 중요시하고 관리해왔는지 알 수 있었다.
‘정말 관리하는 데 열과 성의를 다하는구나. 하긴……. 어쩌면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겠지.’
역사가 존재하기에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 사람이 존재하기에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기도 했다.
송운은 고개를 돌려 천천히 서고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곳에 있는 정보만 머릿속에 죄다 긁어 넣어도 웬만한 무림의 중대사에 관한 건 모두 다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것 역시 무림맹이 세워진 직후의 일들부터겠지만.
하나, 지금은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욕심을 낼 때가 아니었다.
‘그래. 오로지 지금은 혈교다.’
애당초 이곳에 들어온 연유는 혈교에 대해 정보를 찾고 외워나가는 것이고,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다른 것은 훗날에 보아도 늦지 않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송운이 곧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잠시 두 눈을 감았다가 번쩍 떴다.
곧바로 송운은 혈교에 대한 자료들을 몽땅 뒤져나가기 시작했다. 비록 혈교가 사라진 것은 반백 년 전일이지만, 책은 역사를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좋은 정보다.
그렇게 송운은 점점 서적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 * *
한참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덧 중천에 걸렸던 해가 지평선(地平線)에 걸쳐갈 때 즈음이었다.
끼이이-
누군가가 조심스레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나 송운은 전혀 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무시를 한 것인지 모를 만큼 온통 시선은 책에 고정되어있는 상태였다.
그 인영이 천천히 송운에게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가 가까워질 무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