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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전생-136화 (136/275)

제136화

글을 빠르게 읽어나간 백능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자신이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상황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게……. 이게 정녕 사실이란 말인가?”

“확실한 것은 아니나 우리가 아는 송운이라면 일부로 거짓으로 고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최근 올라오는 정찰조들의 보고들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맹주님.”

갑자기 누군가에 의해 목격된 강시술.

거기에 중원 곳곳에서 어린아이들, 혹은 젊은 사내들이 조용히 사라지고 있다는 보고였다.

이는 결코 좋은 징조는 아니다.

“으음……!”

백능의 깊은 고심이 담긴 한숨이 되어 깊게 늘어졌다.

제갈염의 처음 반응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누구든 혈교를 아는 이가 이 서신을 읽는다면 답답하지 않을 수 없을 터였다.

백능이 깊은 탄식을 내뱉어냈다.

“혈교라……. 혈교! 그들이 아니라는 판단은 전혀 내릴 수 없는 것인가?”

하나 제갈염은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작금의 시대에 맹주님께서 아마 가장 잘 아실 테지요.”

“결국 그놈들이 무슨 사달을 내도 내려는가 보구려.”

백능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지자 깊게 파인 주름이 이를 따라 더욱 도드라진다.

‘참으로 오랜 세월을 평화롭게 보내긴 하였다만……. 아예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으면 더욱 좋았을 것을……. 내 대에서 또다시 그들과의 사변(事變)이 벌어지려는 것인가. 허어.’

이미 반백 년 전의 일이다.

작금, 이 평온한 세상에 혈교는 거의 완연하게 잊혔다고 해도 무리가 없는 존재들이다.

하나, 이전 시대까지만 해도 혈교는 모르는 이들이 없을 만큼 악랄하고 괴이했다.

단순히 그들 개개인이 강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시도 때도 없이 민간인 마을을 털어 어린아이들의 피를 취하고 남은 시체들로는 다시 강시를 연구하는 데 사용했으니 그 사실만으로도 악독함은 더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거기에 강시술을 완벽하게 성공하고 난 후로는 무공보다는 강시의 수로 밀어붙이는 탓에 놈들의 실체에 닿기도 전에 받은 피해 역시 만만치 않았다.

‘다시 생각해도 끔찍한 놈들이 아니던가?’

무인들은 둘째치고 죄 없는 수많은 이들이 죽어 나갈 것은 불 보듯 뻔하다.

무림맹의 맹주로서 그런 일이 또다시 반복되게 놔둘 수는 없는 일.

“애꿎은 사람들에게 피해가 생기기 전, 한시라도 바삐 대책을 마련해야 합니다. 맹주님.”

태생이 마교에서 떨어져 나온 그들의 저력은 생각과 달리 어마어마하였고, 결국 그들과의 대전 끝에 정파 모두가 힘을 합쳐 혈교를 벼랑 끝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백능 역시 그때 그 역사의 자리에 함께했었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존재들이다.

그만큼 혈교와의 싸움은 길고, 또 지독했다.

중소 문파는 물론이고 남녀노소, 일반인 가릴 것 없이 비릿한 혈향이 온 중원을 물들이던 시대.

그야말로 대전란의 시대였다.

한데 이제 와 또다시 그들과 싸움을 벌여야 한단 말인가?

“완전히 사라졌을 것이라 믿어왔거늘, 나의 덕이 부족해서인가. 하늘이 무심해서인가? ……역시 그때 더 큰 피해를 입더라도 끝까지 쫓았어야 했다.”

“맹주님…….”

“이제야 좀 잠잠해진다 싶었더니 이번엔 마교보다 더한 놈들이 움직이는구먼. 허, 허허허…….”

백능이 길고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무림맹 쪽 역시 무시 못 할 피해를 입는 바람에 끝까지 확인 사살에 임하지 못했던 것이 영 찜찜했던 그였다.

‘한데 그것이 결국 이리 탈이 날 줄이야. 허허……. 세력의 기반을 잡기 위해 그동안 숨죽여 왔던 것이라면…….’

“그래도 늘 피를 보기 바쁘던 중원이 오랜 시간 동안 평화로움 속에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너무 자책하지 마시지요.”

“혹, 총군사에게 뭔가 좋은 방도라도 있는 것인가?”

백능의 뜨거운 눈빛이 제갈염을 향했다.

그는 굳이 말로 하진 않았지만 무언가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제갈염이 총군사에 오르면서 내놓았던 계책들은 지금껏 훌륭하게 성공해왔고, 백능은 여전히 그를 최고의 군사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리라.

하나 그런 백능의 기대와는 달리 제갈염은 기운 없는 얼굴로 고개를 조심스레 내저었다.

아무리 뛰어난 머리와 계책을 지닌 그이지만 이번 일은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지피지기 백전불태라 하였다.

상대를 파고들어야 진정 이길 방도도 찾는 것이거늘 지금의 제갈염에겐 아직 이렇다 할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완전히 사라진 존재라고 생각했기에 후대에는 혈교의 존재는 ‘그저 그런 이들이 있었다.’ 정도로 내려올 뿐. 더구나 제대로 밝혀진 것도 없는 상황 속에서 함부로 확답하는 것은 제갈염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송구합니다. 맹주님. 저 역시 혈교와 직접적으로 마주해본 적이 없어 확신을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답이 아예 없는 건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알아챘으니 놈들이 완전히 활개를 치기 전에 먼저 꼬리부터 차근차근 잘라나가면 답이 보이지 않겠습니까? 이른 걱정보다는 빠른 대안을 내놓으면 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지요.”

평소와는 달리 속 시원하지 못한 제갈염의 회답(回答)에 백능은 어느 정도 예상했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쓴웃음을 내뱉는 백능의 눈이 찡그리듯 감겼다.

“역시 그런가? 허허……. 총군사 그대의 말이 맞겠지. 부디 큰 위협은 없어야 할 터인데 말일세. 또다시 죄 없고 힘없는 이들이 무기력하게 당하는 꼴을 보게 되진 않을는지, 또 얼마나 많은 무인이 희생되어야 할지……. 나는 그저 그것이 걱정되는 것뿐이니.”

연신 깊은 한숨을 감추지 못하는 백능의 모습에 제갈염 역시 속이 타는 것은 마찬가지. 그 역시 세상이 혼탁해지는 것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혼용무도(昏庸無道)한 세상이 오기 전에 막아 내는 것이 우리 무림맹이 존재하는 이유겠지요. 반드시 막아 낼 수 있게 조처하겠습니다.”

혼돈의 시대.

그것은 필히 막아야 할 공공의 적임은 분명했다.

그것이 제갈염의 말대로 지금껏 무림맹이 존재해왔던 이유였다.

순간, 감겨있던 백능의 눈이 뜨였다.

조금 전과는 달리 그의 두 눈동자 속에는 나이를 잊은 듯 보이는 강인함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다시 되돌릴 수는 없다.

그것이 무림맹이 지닌 사명.

“당연히 그러하겠지. 그게 무엇이 되었건 중원을 어지럽히려 하거든 가만히 놔두진 않을 것일세. 역시나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야. 총군사.”

“예, 맹주님. 말씀하시지요.”

“아무래도 역시 파견을 보내야겠네. 놈들의 존재를 알아챈 이상 이대로 앉아서 당할 수는 없는 법이니. 준비를 좀 부탁함세. 총군사.”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맹주님.”

말을 잇는 제갈염의 두 눈동자 역시 맑게 반짝였다.

* * *

“으음…….”

송운은 요 며칠간 느낄 수 없었던 익숙하지 않은 따스함에 눈이 번쩍 뜨였다.

하나 놀란 건 찰나의 순간일 뿐.

이내 자신이 무림맹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창밖을 바라보니 아직 동이 트지도 않은 시각.

궁금증을 가진다고 해봐도, 어차피 자신에게까지 연락이 닿으려면 아직 한참의 시간이 남았을 터.

이미 활시위를 떠난 화살이다.

걱정한다고 해서 바뀔 것은 전혀 없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오히려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듯한 효과가 생겼다.

송운은 곧 가부좌 자세를 잡았다.

“후우.”

그러곤 깊은 한숨과 함께 기를 돌리며 몸 내부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상은 이제 완전히 아문 것 같고…….’

온 정신을 운기조식에 집중하고 나니 귓가에 들려오던 미세한 소음마저도 모두 차단되었다.

며칠 만에 평안함 속에서 운공을 돌리니 더없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진행되어갔다. 그 때문인지 송운의 입가에는 어느새 만족의 미소가 슬며시 떠올랐다.

송운 자신만의 세상으로 빨려 들어가듯 무아지경으로 흘러갔고 시간은 무한정으로 흘러갈 것만 같던 그 시점.

저벅저벅.

송운의 감각에 정체 모를 발소리가 송운의 귓가를 타고 울렸다.

‘음……?’

집중이 깨진 송운은 창문을 통해 바깥을 바라보니 이글이글 빛나며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해가 중천에 떠올라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리도 흘렀단 말인가?’

오랜만에 느끼는 그 기분에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던 모양이다.

“송 소협.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 발소리는 자신의 방문 앞에 멈추었고, 송운은 대답하기보다는 곧바로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고 보인 얼굴은 뜻밖의 사람이었다.

단 한 번의 짧은 만남이었지만 송운 역시 아는 얼굴이다. 송운의 얼굴에는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총군사 제갈염? 설마하니 그가 직접 찾아올 줄이야.’

게다가 제갈염 역시 송운을 잊지 않고 있는 듯했다.

나이와 지위가 있음에도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반갑게 인사해오는 그의 모습에 송운 역시 서둘러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무림맹에서 총군사를 맡고 있는 제갈염이라 합니다. 제 기억이 맞는다면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지 않습니까?”

자신을 기억한다는 말에 송운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워낙 많은 이들이 모여 있던 자리였기에 인사는커녕 얼굴도 제대로 마주하지 못한 자신을 기억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송운은 고개를 주억였다.

“예, 맞습니다. 몇 해 전 무황비고의 일로 북경에 오셨었지요. 아직 기억하시는군요.”

그런 송운의 말에 제갈염이 사람 좋은 인상과 함께 빙그레 웃음 지었다.

“한번 본 사람은 잘 잊지 않는 편이라서 말입니다. 게다가 그때 가장 큰 활약을 해주신 분이 아닙니까? 덕분에 귀중한 인재들을 지켰지요. 그렇지 않아도 한번 찾아뵙고 싶었습니다. 한데 어찌 그 성함을 잊겠습니까?”

송운은 연신 자신을 치켜세워주는 제갈염의 말에 손을 내저었다.

“허어. 과분하신 말씀이십니다. 이러지 마세요. 총군사님. 그리고 말씀을 낮추시지요. 이러시면 제가 부담이 됩니다.”

“하하. 다음에 다시 보게 되거든 그때는 말을 편히 하도록 하지요.”

계속되는 그의 존칭에 송운은 어쩔 줄 몰랐으나 정작 본인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이 보였다. 결국 그를 설득하는 걸 포기한 송운이 화두(話頭)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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