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그 말에 화들짝 놀란 송운은 곧 그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백길이라 자신을 소개한 이를 자세히 바라다보니 그의 말대로 정말 백오와는 묘하게 다른 점들이 있었다.
처음엔 워낙 놀라서 보이지 않았던 그의 면모(面貌)가 자세히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확실히 백오 스님에 비해선 좀 더 덩치가 작긴 하구나 거기에 얼굴 정 중앙에 난 점도 있으니……. 허허. 이것 참. 그것 빼곤 똑같다. 똑같아. 아무리 형제라 한들 이리도 닮을 수 있단 말인가?’
송운도 사실 그때의 얼굴과 전혀 변함이 없는, 아니 어쩌면 더 어려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모습에 놀라지 않았던가.
귀신이라도 본 것마냥 말이다.
하나 그런 송운을 뒤로한 나머지 다섯 명은 그보다 더 놀라고 있었으니…….
‘송 소협과 백 소협이 아는 사이라고?’
팽후영이야 워낙 얼굴에 표시가 나지 않는 탓에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녀 역시 속으로 상당히 놀라 있었다.
자신들도 쉽사리 얼굴을 마주하기 쉽지 않은 이가 백오다. 그만큼 백오는 너무도 크나큰 존재였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송운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다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아……. 이런. 제가 실례가 많았습니다. 백오 스님과 너무도 닮으셨기에…….”
“괜찮습니다. 이런 일이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닌지라 송 시주께서 이리 사과하실 일은 아닌 듯합니다. 제겐 이미 익숙한 일이지요. 한데 송 시주께서는 제 형님과 어찌 아시는 사이이신지 빈승이 여쭈어도 괜찮겠습니까? 아미타불.”
그의 친동생이라는데 굳이 숨길 연유가 없다.
백길의 물음에 송운은 답하길 마다하지 않았다.
“백오 스님과는 약 여섯 해 전 림영에서 있었던 색마 퇴치에 함께했던 적이 있습니다. 비록 그 시간이 길진 않았으나 그때 연을 맺었지요.”
‘그때의 일이라면…… 백오 형님께서 마인 토벌에 나섰을 시기로구나.’
송운이 대답하는 내내 그의 눈을 들여다보던 백길은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빙그레 눈웃음 지었다.
그 모습만 놓고 보자면 정말 백오와 똑같아 또다시 부처님의 형상이 떠올랐다.
‘역시 형제는 형제인가?’
다만 안타까운 것은 전생에선 백오와 닮은 외모에 비해 그의 명성에 비해서 백길이라는 이의 인물은 전혀 알려진 점이 없다는 사실이다.
“한데……. 이 시간엔 다들 어인 일이십니까?”
송운의 의문 어린 시선에 가장 먼저 답한 것은 남궁장후였다. 뒤늦게 변성기가 온 것인지 그때와는 달리 목소리가 제법 굵어져 있었다.
“큼. 어찌 되었건 간에 그날 함께 전장에 나섰던 전우가 아닙니까? 이리 무림맹까지 친히 오셨다는데 가만히 있기도 뭐하고……. 마침 우리도 오래간만에 모두 모인 참이라 철우 형님의 말을 듣자마자 손님을 맞이하러 온 것이지요.”
남궁장후의 말을 뒷받침이라도 하려는 듯 양풍완이 받아쳤다.
“너무 빼지 마시고 어차피 이리된 것 다 함께 술 한잔 걸치는 건 어떻습니까?”
“하나 오늘은 이미 밤이…….”
“아직 내일 해가 뜨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습니다. 한 번쯤 술 한 잔 같이 기울이고 싶었단 말입니다. 정말 안 가실 겁니까?”
계속해서 송운이 거절의 의사를 보이니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건 의외로 남궁장후였다.
‘분명 내일이면 맹주님께 보고가 올라갈 터인데…….’
송운은 한참을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속으로 걱정이 되는 마음도 있었으나, 한편으로는 송운 역시 오래간만에 전우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를 마다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가도 괜찮은 것일지…….’
송운은 그들의 얼굴을 슬쩍 살폈다. 그러다 송운의 눈이 순간 백길과 마주쳤다. 그와 동시에 얼굴에 빙그레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은 괜찮다는 듯 말해오는 것 같았다.
‘그래. 이 기회에 이들과 친분을 다져놓는 것도 미래에 대한 하나의 방도가 될지도 모르지.’
결국 한참을 머뭇거리던 송운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음……. 오랜만에 술 한잔 걸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그런 송운을 보던 곽철우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가실 줄 알았습니다.”
* * *
사방이 어둠으로 둘러싸인 깊고 넓은 동굴 속.
초라하나마 제법 구색을 갖춘 의자 위에 앉은 이와 그의 발 앞에 조아리고 있는 이 둘이 나누는 대화가 울려 퍼졌다. 둘 모두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다랗게 내려오는 포(袍)를 걸치고 있었는데, 그 때문인지 어둠 때문인지 얼굴을 알아볼 수는 없었다.
다만 그 둘이 상하관계라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일은 어찌 처리되어가고 있느냐.”
의자 위에 앉아 있던 이의 음산하면서도 기괴한 목소리는 듣는 이를 소름 끼치게 만들었으나 상대방은 익숙하다는 듯 제법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덤덤히 대답했다.
“순서대로 착실히 진행에 옮기는 중입니다. 조만간 준비가 끝날 것 같습니다. 하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찌릿.
자신의 상관을 안심시키려 한 마지막 말이 되레 역으로 심기를 건드린 것일까?
앉아 있던 그가 붉게 물든 두 눈을 부릅뜨며 발 앞에 조아리는 이에게 쏘아붙였다. 이와 동시에 흘러나오는 살기는 그의 온몸을 에워쌌다.
“그 말인즉, 작게라도 내가 걱정해야 할 일이 있다는 말이렷다?”
덜덜덜.
참으려 애를 썼으나 마음과는 반대로 반응하는 몸을 손으로 내리찍는다. 그러곤 얼어붙은 것처럼 쉽사리 열리지 않는 입을 억지로 떼었다.
“아, 아닙니다. 그,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간신히 답하는 그의 모습을 의자에 앉은 이가 가늘고 표독스러운 눈초리로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하나 그 눈빛에 다행히 살았다는 듯 속으로 몇 번이고 가슴을 쓸어내렸는지 모른다.
“반드시 이번 기회를 우리는 잡아야 한다. 그것은 네놈이 더 잘 알 터. 더는 이 더러운 시궁창과도 같은 처지를 이어나가진 않을 것이야. 이 지긋지긋한 도피 생활은 우리의 대에서 끊는다. 그분께서 그걸 원하신다. 그리고……! 그건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콰앙-!
콰지지직.
그의 분노가 담긴 주먹에 내려 찍힌 의자는 간신히 버티고 있던 구색마저도 버려진 채 산산조각이 나야 했다.
第六章. 드러나는 음지(陰地)
달빛마저도 짙은 구름에 가려진 어두운 밤.
사락.
잔뜩 쌓여 있는 서류들 틈 사이에 파묻혀 잠 못 이루는 사내가 있었다.
‘……후우. 머리가 아프구나.’
제갈염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잠시 눈을 감았다. 평소라면 이미 침실에 들었을 시간이나, 오늘만큼은 쉬이 잠을 청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 낮 급작스럽게 올라온 서류 하나가 그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본디 매사에 조심스러운 성격인 제갈염은 처음 그 서류를 읽었을 땐 믿기지 않았다. 하나 시간이 점점 흐르면 흐를수록 그 내용만이 생각을 가득 메워왔다.
‘혈교. 그리고 강시라…….’
두 가지 이름 모두 제갈염은 익히 잘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그리고 이것에 관한 내용을 올린 이는 다름 아닌 송운이다.
송운은 무황비고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섰고, 그 속에서도 자신을 버리고 남을 살리는 길을 택했던 이다.
그가 먼저 나서지 않았더라면 무림맹은 자칫 당헌기를 비롯해 곽철우마저도 잃었을지 모른다.
‘협을 알고 진정 행할 줄 아는 자가 대체 무슨 득(得)을 얻기 위해 이런 거짓을 고해 고요히 흘러가는 중원을 뒤흔들려 한단 말인가? 그것도 홀로 그 시간에 이 무림맹까지 달려와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할수록 자신의 가설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해서 내린 결론은…….
‘그가 직접 보고 겪은 것이라면 사실일 가능성이 크다. 게다가 혈교는 이미 중원에서 잊힌 지 꽤나 오래된 집단의 이름이지 않더냐? 그런 것을 지금 와서 굳이 들쑤시고 다닐 이유 또한 없다.’
는 것이 제갈염의 또 다른 생각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부터 중원 전체에 깔려 있는 정찰조로부터 하나둘씩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포착되었다는 보고가 올라오기 시작했기에 더욱 무시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헌현현에서 이곳까지 몇 날 며칠을 달려와 가면서까지 알리려 하지 않았을 터다.
‘확실히 이것은 나 홀로 읽고 판단을 내릴 일이 아니다.’
제갈염이 두 손을 강하게 오므렸다.
툭. 투둑.
그러자 붓을 쥐고 있던 그의 오른손이 부들부들 떨려오면서 검은 먹물이 하얀 종이 위로 뚝뚝 떨어져 번져간다.
우려했던 것이 현실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것이 사실이 아니었으면 좋으련만…….’
그의 고민이 깊어갈수록 밤도 함께 깊어져만 가고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맹주님. 총군사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총군사가 말인가? 어서 들라고 하게. 아, 그리고 차를 좀 내왔으면 좋겠구먼.”
정갈하게 다려진 무복으로 갈아입던 백능은 흔쾌히 허락했다. 제갈염이 이 시간에 그를 보러 오는 일은 흔치 않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 맹주님.”
잠시 후.
들어온 제갈염의 모습에 백능은 잠시 자신의 눈이 잘못된 것인지 의심해야만 했다.
“어서 오……. 총군사? 몰골이 이게 대체……. 자네 진정 내가 아는 총군사가 맞는 겐가? 설마 다른 이는 아니겠지?”
그의 걱정 어린 시선과 목소리에 제갈염의 얼굴에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새겨졌다.
“저 맞습니다. 맹주님.”
백능이 이 정도로 기겁하는 연유는 제갈염의 옷차림새에 있었다. 자신이 아는 제갈염은 무슨 일이 있건 결코 허점을 내보이는 사내가 아니다. 한데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그의 행색은 평소와 너무도 달랐다. 거기에 한술 더해서 눈 밑을 시작으로 전체적으로 면색(面色)이 퀭했다.
‘세안이라도 하고 올 것을 그랬던가.’
늘 몸가짐을 가지런히 하고 찾아오던 그가 밤새 서재에 박혀있던 그대로 백능이 일어날 시간에 맞추어 곧장 달려온 길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오랜만에 백능의 당황한 모습을 보고 나서야 제갈염은 잠시 후회가 밀려왔으나 지금은 그럴 사사로운 사안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음. 무슨 일이 생긴 것이로구먼. 일단 앉게.”
제갈염이 먼저 말을 꺼내기도 전, 백능이 먼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예. 급히 상의할 일이 있어 이리 급하게 왔습니다. 맹주님. 이걸 좀 읽어 보시지요.”
제갈염은 짤막한 서신을 백능에게 건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