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오죽하면 세간에 나도는 이야기꾼들의 입과 입 사이로는 오귀각은 손님이 화를 내러 왔다가도 아름다움에 반해 기쁜 마음으로 돌아간다고 하였다.
‘이제 보니 그 말이 틀린 말도 아닌 듯하고.’
많고 많은 방 중 한눈에 보아도 제법 커 보이는 곳으로 들어온 곽철우는 자연스럽게 곁에 있는 시녀들에게 명했다.
“여기 손님과 간단히 마실 거리를 좀 내와 주게.”
“예. 곽 공자님.”
들어간 방 안에는 꽤나 폭신거릴 것 같은 하얀 침구와 위에 놓인 적색 빛의 자수는 어딘지 모르게 잘 어울리고 있었고, 그 옆에는 커다란 탁자 위에 큼직하면서도 투박한 가구들로 가지런히 정리되어있었다.
‘생각보다 건물 외벽에 비해서 안은 그나마 깔끔한 편이군.’
그렇게 천천히 둘러보던 차.
시녀들이 내온 차와 다과를 맛볼 수 있었다.
달그락.
‘제법 맛을 잘 살려냈어.’
언제부턴가 차를 좋아하게 된 송운은 단박에 이게 무슨 차인지 알 수 있었다. 백과 함께했던 그때에도 맛보았던 차다.
“향이 아주 좋군요. 이건 육보차(六堡茶)가 아닙니까?”
송운이 단박에 차의 이름을 맞추자 이번엔 곽철우가 놀랐다.
“곧바로 알아보셨군요. 맞습니다. 손님들이 오시거든 가끔씩 내오지요.”
“주로 광서성(廣西省)에서 많이 나오는 차로 알고 있는데…… 광서와 섬서성도 서로 꽤나 먼 거리이지 않습니까? 의외로군요.”
덕분에 오랜만에 백과의 추억이 떠오른 송운은 기분이 좋아졌는지 얼굴에 싱글벙글한 미소가 가득했다.
“무림맹에 있다 보면 잘 보이기 위해서 이곳저곳에서 차가 들어오지요. 광서성도 예외는 아니니까요.”
그들의 대화는 이것이 전부였다.
약간은 어색하면서도 서먹서먹한 분위기가 둘 사이를 뱅뱅 맴돌았다.
그렇게 한참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고 있었을 때 즈음.
찻잔만 만지작거리던 곽철우가 어렵사리 먼저 화두를 꺼냈다.
“저……. 그날일 말입니다.”
그가 운을 띄우자 송운의 시선이 곽철우를 향했다.
“송 소협 덕분에 이 한목숨 건질 수 있었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진즉 제가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이 은공을 어찌 갚을 수 있을지 막막합니다.”
송운은 갑자기 자신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하는 곽철우를 향해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 실상 그가 고개를 숙였다는 사실보다 그때의 일을 꺼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송운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었다.
애당초 그에게 짐을 지워주기 위해서 한 일이 아니었기에.
“아닙니다. 곽 소협. 과한 말씀입니다. 저는 그때 당시 최상의 선택을 한 것일 뿐. 만일 제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도 모두가 함께 살았을 수도 있는 거고요. 그저 결과적으로 좋았으니 된 겁니다.”
“하나 송 소협. 저는 목숨을 빚진 것입니다. 저는 빚을 지고서는 못사는 성격이라 언젠간 반드시 갚을 생각이니 그때는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송운은 순간 단호히 말하는 그의 두 눈동자에 단단하게 어린 고집을 보고 난 후엔 더 이상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자신 역시도 그런 상황이 온다면 똑같이 했을 터이니 그것마저 자신이 막을 권한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잠시간의 대화가 끝난 후 또다시 긴 묵언의 길로 들어설 무렵.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들어 오거라.”
웬 시녀 한 명이 곽철우에게 다가왔고, 귓속말로 무언가를 말하고 조용히 사라졌다. 워낙 작은 소리인지라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만큼의 음성이었으나, 육감이 일반 무인들보다 갑절로 발달 되어있는 송운의 귓가에는 뚜렷했다.
‘후우. 다행히 총군사인 제갈염에게까지 서신이 전해진 모양이구나.’
그 말을 듣고 나니 송운은 며칠간 긴장했었던 모든 것들이 조금이나마 풀어지는 듯한 기분이 전신을 감싸고돌면서 동시에 급격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송 소협. 지금 막 서신이 총군사님 집무실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송운의 모습을 보며 조금이라도 자신이 도움이 된 것 같아 그제야 곽철우의 안면에도 활짝 미소가 피어오른다.
“더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힘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그때의 빚은 이번 일로 갚으신 걸로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하나 송운의 말에 곽철우는 기겁했다.
“이 정도 일은 제 목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어찌 이런 걸로……. 이러지 마시지요. 송 소협. 아마 늦으면 내일 오전까지 처리해서 맹주님께 보고가 될 겁니다.”
결국 송운은 정말 졌다는 듯 그의 말에 수긍해야 했다.
“하하. 거참……. 알겠습니다. 그동안 저는 며칠간 못 잔 잠이 몰려와서……. 눈을 좀 붙여야 할 듯싶습니다.”
평소라면 이 정도로는 눈도 깜짝하지 않을 송운이었으나, 이번 여정은 내상을 완벽히 치료하지 못하고 무리하게 해낸 탓이었다.
“아, 그렇게 하시지요. 연락이 오는 대로 사람을 시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자리를 비워드리죠.”
* * *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오랜만의 휴식에 푹신한 침상에 얼굴을 묻은 채 곤히 잠들었던 송운은 저 바깥에서부터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음에 평온함을 깨야만 했다.
‘무림맹이라 그런 것인가? 새벽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소리가 제법 크군. 아니지. 오히려 고요한 시간이기에 더 잘 들리는 것일지도…….’
휙휙.
축적된 피곤함을 달래던 송운이기에 잠시 마음이 언짢아졌으나 송운은 곧 마음을 달리했다.
자신 이외의 손님들이 떠드는 소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체감보다 시간은 훨씬 적게 흘러 있었다.
‘이제 겨우 사시(巳時)에 불과하니……. 그래. 밤은 많은 것들을 즐기기 좋은 시간이지.’
이곳은 무림맹이며, 찾아오는 손님들을 대접하는 오귀각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작금 무림의 중심에 서 있는 무림맹이거늘. 허어. 내 생각이 너무 짧았구나.’
하루에도 잘 보이기 위해서 오는 이,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는 이,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 등등.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거쳐 가고 머물지 상상만으로도 부족한 곳이 이곳 무림맹이지 않은가.
한데, 이상하게 점점 그 발걸음들이 송운의 방을 향해 다가왔다.
발소리가 방문 코앞까지 다가왔을 무렵.
똑똑.
‘이 시간에 무림맹에서 대체 누가 나를?’
신경을 끄려 했던 송운의 방문을 조심스레 누군가 두드렸다. 바깥에서 느껴지는 사람들의 인기척은 한두 명이 아니었다.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의 기운이 모두 송운에게 낯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설마…….’
그가 무슨 생각을 더 하기도 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송 소협 안에 계십니까?”
끼익.
그 목소리에 곧바로 문을 여니 송운의 예상대로 문 앞에는 한 번씩은 다 마주했던 얼굴들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송운은 속으로 시원스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오룡일봉!’
몇 년 만에 마주하는 그들의 얼굴에는 다들 어딘가 모르게 성숙한 느낌이 물씬 들었다. 이제야 정말 소년, 소녀의 티를 벗어내고 성인으로 거듭난 듯 보였다.
그때 비록 조금 얄궂긴 하였으나 결코 미웠던 것은 아니기에 모두의 얼굴을 보니 송운의 얼굴에도 반가움의 기색이 차오른다.
“이게 누굽니까? 모두 오랜만이군요.”
여전히 잘생긴 외모에 더욱 근육이 단단해진 남궁장후를 비롯해 그 때와 비교해 키가 제법 큰 양풍완. 당무옥. 그리고 팽후영과 곽철우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중에도 팽후영은 현재 미모가 물이 차오를 대로 차올라 성숙함의 향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이제 진정 여인이 되었구나.’
팽후영은 다른 미인형들과는 조금 달랐다.
특유의 귀여운 얼굴을 유지하면서도 은은히 드러나는 도발적인 눈빛이 그녀를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다만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거의 자라지 않은 키와 여전히 커다란 도를 메고 있다는 것인가.’
송운은 오룡일봉을 다시 한번 천천히 들여다보았다.
물론 외적인 성장도 성장이었지만 그것만이 그들의 전부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간 양면 모두 성장했구나.’
이상하게도 시공검을 완전히 익히게 된 후부터는, 내기를 굳이 끌어올리지 않아도 상대방의 기운을 살필 수 있었다.
그랬기에 그들의 상태를 알아보는 건 한층 수월했다.
양풍완과 당무옥은 성장은 했지만 여전히 남궁장후와 곽철우. 이 둘의 그늘 속에 가려져 오룡일봉 중 가장 낮은 무위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 이 역시 오룡일봉의 이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린 판단일 뿐, 둘의 무위 역시 결코 낮은 것은 아니다. 다만 베일에 가린 미지의 적이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상황이 송운의 판단을 더욱 각박하게 만든 것뿐.
그에 반해 남궁장후는 송운의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발전을 이룬 상태였다.
‘자존심이 강한 아이니 죽어라 수련에 매달렸을 테지.’
남궁세가의 자랑거리이자 든든한 기둥인 남궁장후가 강해지겠다는데 누가 도움을 주지 않을까?
많은 후원을 받으며 좋은 환경 속에서 오로지 무공 상승만을 목표로 살았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그동안 어찌 지내왔을지 남궁장후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팽 소저는 딱 예상했던 정도이고……. 역시 그때의 그것은 내가 잘못 느낀 것인가?’
아직도 잊지 못할 만큼 독특한 느낌이었지만, 송운은 더 이상 신경 쓰는 걸 그만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내가 아는 것들도 큰 틀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는 데다 그것마저 모든 게 다 틀어지지 않았더냐? 앞으로의 일만으로도 충분히 복잡하니까.’
그때, 무엇인가 송운의 눈동자에 어렸고, 그로 인해 그의 눈이 솔방울만 하게 커졌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던 송운의 눈동자 속에 꽤나 낯익은 이의 얼굴이 보인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송운은 다른 이들을 제치고 나아갔다.
“백, 백오 스님?”
“……음?”
당시 오룡일봉 중 한 명은 그 자리에 없었다.
다른 급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먼저 임무를 명받고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한데 그 남은 한 명이 일전에 만남을 가졌던 백오일 줄이야!
송운이 반갑게 백오 스님이라 외친 이가 빙그레 웃은 채 합장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미타불. 시주께서 방금 부르신 이름은 제가 아닌 친형님 되시는 분의 존함입니다. 제 형님과 아시는 분이신가 봅니다. 이런 연고가……. 이 모든 것이 부처님의 뜻이 아니겠습니까? 아미타불. 처음 뵙겠습니다. 빈승 백길(白吉)이라 합니다. 아미타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