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우걱우걱.
송운은 떠나오기 전 송하가 주었던 주먹밥을 꺼내 들었다. 추운 날씨 탓에 이젠 거의 돌덩이처럼 차갑고 딱딱해졌지만, 그것마저도 송운에게는 웬만한 진수성찬 못지않게 느껴졌다.
‘지켜내야지.’
자신과 식솔들을 위협한다면 무엇이 되었든 간에 송운은 설령 죽음이 다가온다고 할지언정, 맞서 싸우리라.
‘그것이 매 각주가 말했던 혈교일지라도……!’
우웅!
송운의 두 눈이 섬광처럼 번뜩이며 빛나는 순간 환성이 그 마음을 읽고 공감한다는 듯이 반응하며 몸을 떨었다.
송운은 그런 환성의 검파를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그래그래. 어쩌면 곧 많은 양의 피를 보아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그러지 않으면 더 좋을 터지만.’
언제 어디 서 얼마나 나타날지도 모르는 적에 대한 두려움은 그렇게 조금씩 희석되어가고 있었다.
환성을 달래고서 소주천 한 바퀴를 마친 송운은 또다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다시 가볼까.’
* * *
섬서성. 서안(西安).
쿵쿵! 쿵쿵쿵!
누군가 고요하던 무림맹의 정문을 두드렸다.
끼이익.
곧 굳게 닫혀있던 거대한 문이 열리며 누군가 걸어 나왔다.
“흐으암. 누구시오? 무슨 볼일이 있어서 이곳에 왔소?”
늘어지게 나오는 하품을 억지로 누르며 나온 문지기는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거의 거지꼴에 가까운 사내를 바라보자니,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거의 며칠은 못 씻은 듯한 몰골에 수염은 짧으면서도 덥수룩하게 나 있었고 그 탓에 몸에서도 냄새가 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체 이 새벽에 웬 꼴이란 말인가? 쯥.’
잠까지 깨어가며 나왔기에 문지기는 짜증이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내리누르고, 인상을 억지로 풀었다.
어떠한 연유건 무림맹을 찾아온 사람에게는 악인이 아니라면 우선은 그 누구라도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맹주의 오래된 신념 때문이었다.
자칫 잘못했다가 대충 대하였다는 사실이 상부에 보고라도 되는 날에는 그는 이 자리를 내놓아야 하는 불상사가 생길지도 몰랐다.
문지기라는 것이 제법 박봉인 일이나, 다른 일로 먹고살려면 앞날이 캄캄해졌다.
‘참자. 참아. 내가 먹여 살려야 하는 식솔만 몇이더냐? 그래. 먹고사는 게 다 이리 더러운 게지. 아이고. 보자. 무복을 걸친 것이 일반인은 아닌 것 같고……. 아무리 보아도 악인은 아닌 것 같은데…….’
한참을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던 문지기의 귓가에 중저음에 듣는 이에게 거부할 수 없는 강렬한 음성이 들려왔다.
“맹주님을 직접 뵈러 왔소만.”
겉으로 보이는 몰골과는 달리 점잖은 말투에 그것은 문지기를 깜짝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아주 간혹 일부러 무림맹의 기강을 시험하기 위해 저렇게 찾아오곤 한다는 소문이 있다.
‘혹시 일부러 저런 복장으로 온 건가? 끙……. 이거 골치 아프게 되었구만.’
그 생각이 문득 떠오르니 더욱 그의 행동은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어디에 누구신지요?”
“송씨 가문의 송운이라 하오만…….”
그랬다.
그 꾀죄죄한 꼴의 젊은 사내는 바로 송운이었다.
몇 날 며칠을 마을에 들리지도 않고 씻고 자는 것도 거의 포기하며 달려온 송운에게 멀쩡한 외관은 기대하기 힘든 것이었다.
송운은 이제 곧 문이 열리겠거니 하며 기다렸지만, 돌아온 문지기의 대답은 의문과 의심이 가득 찬 듯했다.
“송씨 가문?”
‘이런.’
송운은 그제야 아차 했다.
이곳은 섬서성이다.
아무리 몇 년 전 일이 널리 퍼지고 입소문을 탔다고 해도, 북경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그 말인즉…….
‘내 이름을 알아들을 리 없겠구나. 허어.’
가장 큰 실수였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자신이 가로막힌 적이 없었기에 이번에도 무의식중에 당연히 통과할 것으로 생각했던 탓이리라.
‘황궁만큼 엄하기로 소문난 무림맹에서 출처도 불분명한 나그네를 이리 쉽게 문을 열어줄 리는 없을 테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송운의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리되면 무림맹에 왔어도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은가?’
무림맹에서 아는 이라고 해봤자 오룡일봉이 전부인 그로서는 답답할 노릇이었다.
한참을 송운의 대답이 없자, 답답했는지 문지기가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이야기를 듣고 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맹주님을 뵈는 것은 도통 쉬운 일이 아니오. 웬만한 가문이 오더라도 며칠을 기다려도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것이란 말이오. 아무래도 길을 잘못 찾아온 듯싶으니 이만 돌아가시구려.”
하지만 이대로 돌아갈 송운은 아니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한시라도 빨리 무림맹에 이 사실을 전해야만 했다.
“맹주님께 꼭 전해야 할 말이 있소. 북경에서 온 송운이라 하면 받아주실 것이오. 부탁하오!”
한참을 그렇게 문지기와 말씨름하던 그들에게 순간 누군가의 반가운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 송 소협 아니십니까?”
송운과 문지기가 동시에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돌아봤다. 그곳에는 송운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얼굴이 보이자 이내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이게 누굽니까? 곽 소협 아닙니까?”
그와의 만남은 무황비고의 사건을 마지막으로 단 한 번도 마주할 수 없었다.
그런 그를 이런 때 마주할 줄이야!
송운 역시 그때의 고난을 함께 나누었던 동지이기에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한데, 송 소협께서 이곳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얼굴이 너무 상해 자칫하면 못 알아볼 뻔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반가운 나머지 곽철우는 몇 가지 질문을 던졌고, 송운은 그 말에 그제야 자신의 몰골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음……. 몇 날 며칠 씻지를 않았으니 정상적일 리가 없지. 허허.’
그것을 인지하고 나니, 문지기가 처음에 왜 기괴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는지도 설명이 되었다. 송운은 그래도 곽철우를 마주했다는 사실에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후우. 긴히 맹주님께 전해야 할 일이 있어 이리 섬서성까지 달려왔습니다. 한데 보시다시피 문 앞에서 곧장 막혀버렸으니 난감하던 차였지요. 곽 소협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꼼짝없이 도로 되돌아갈 처지였지 뭡니까? 하하.”
“그렇군요. 아…….”
곽철우는 송운과 문지기 사이에 묘하게 흐르는 기류를 파악한 것인지 고개를 연신 주억였다. 그런 곽철우의 반응에 속이 타는 것은 문지기였다.
‘큰일이구나!’
무림맹에서 녹을 받아 생활을 연명하는 이가, 오룡일봉 중 가장 뛰어난 실력을 지닌 곽철우를 못 알아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
문지기의 마음은 점점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과, 곽 공자님. 아시는 분이십니까? 아이고! 제가 감히 알아 뵙지 못하고 무례를 범하였습니다. 송구합니다!”
문지기는 엎드린 채 싹싹 빌기 시작했다.
하나 이 일을 어찌 그만을 탓하랴.
송운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괜찮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가 그것까지 생각하지 못한 게 어리석은 것이지요. 미리 연락이라도 주고 오는 것이 맞았거늘. 정말 전 괜찮습니다.”
“이만 들어가 보거라. 송 소협은 내가 직접 모실 터이니.”
“예, 예. 알겠습니다. 곽 공자님!”
“안으로 드시지요. 송 소협.”
第五章. 의외의 인연
송운은 무림맹의 문을 지나는 순간부터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무림맹의 내부는 무림에서 그들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도달해 있는지를 그대로 내 비추는 듯 보였다.
‘황제 폐하께서 머무시는 자금성만 한 크기까지는 결코 아니더라도 족히 그의 절반은 넘을 만하구나!’
전생에서도 단 한 번도 무림맹의 건물은 본 적이 없던 송운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참으로 어마어마한 일이지 않은가?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자금성은 온통 황금빛 물결로 뒤덮여 있다면, 이곳은 소소한 아름다움으로 웅장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신기하고 또 신기하구나. 어찌 이리도 클 수 있다는 말이냐? 하기야……. 작금의 무림에선 오대세가와 구파일방보다 더 힘이 세니 말 다 한 것이지.’
간혹 화려한 각도 물론 존재했지만.
그때, 곽철우가 송운에게 고개를 돌려 물어왔다.
“송 소협께선 무림맹의 방문은 처음이시지요?”
“예, 그런 셈이지요. 일로 인한 방문이긴 하나, 말로만 들어오던 무림맹을 직접 보게 되니 영광이지요. 한데…… 실례인 것은 알지만 맹주님은 언제쯤 뵐 수 있겠습니까? 정말 한시가 급한 일인지라…….”
송운의 말을 들은 곽철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음……. 아무래도 무림맹의 절차라는 것이 존재하여 곧바로 맹주님을 뵙는 것은 무리일 듯합니다. 대신 제가 최대한 빨리 이 소식을 접하실 수 있도록 취해두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동안은 저와 차라도 한잔 하시면서 기다리시죠.”
절차를 무시할 수 있는 법은 없다.
전시에 촌각을 다투는 급한 상황 정도가 아니라면 말이다.
송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사실 곽철우가 이 정도까지 도와준 것만 해도 송운으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이곳까지 와서 맹주도 보지 못한 채로 돌아갈 뻔하지 않았던가?
‘후우. 마음만 조급해서 앞을 보지 못했구나. 하다못해 미리 서신으로 말이라도 전했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을……. 앞으론 더더욱 신중하게 행동해야겠구나.’
“들어가시지요.”
곽철우가 향한 곳은 오귀각(俉貴閣)이었다.
‘이곳이 그 유명한 오귀각인가?’
이름 그대로 손님이 머물다 가는 곳인데, 전전대(前前代) 맹주가 굉장히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하는 곳이었다.
오귀각의 기와 끝에는 다른 곳과는 달리 끝과 끝마다 선이 곡선을 이루며 굴곡져 마치 꽃잎이 활짝 만개한 것과도 같은 모양새를 이루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색색이 정성스레 곱게 칠해진 것이 정말 나비라도 날아올 것처럼 달콤한 향이 나는 듯했다.
대다수가 오동(烏銅)빛의 수수한 건물들 사이에 유독 번쩍거리는 건축물인지라 더욱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하하. 다른 곳에 비해 조금 화려하지요?”
눈이 커다래져 구경하는 송운의 반응을 보며 당연히 그럴 만하다는 듯 곽철우가 물어왔다.
“그런 것 같군요.”
이에 송운은 조금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조금은 아닌 것 같지만……. 흐음. 전전대 맹주가 적어도 손님을 맞이하는 데는 정성을 다해야 한다고 하였다던가? 어찌 되었건 그 명성대로 어마어마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