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그사이 별일 없기를 바라야겠지.’
끼익.
마지막으로 방안을 정리하고선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온 송운은 순간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송하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어디가?”
조용히 물어오는 목소리와 함께 달빛에 비추어 그늘진 그녀의 모습에는 어딘지 모르게 몸서리칠 만한 서늘한 기운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게……. 잠시 볼일이 생겨서 말이다.”
송운은 그런 그녀를 향해 아차 싶었지만, 이내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괜스레 이런 무거운 마음을 동생에게까지 전하기 싫었고, 또 한편으로는 그녀가 따라온다고 할까 그것이 걱정되었기에 말을 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 송하의 얼굴을 보니 이미 다 알고 온 것 같았다.
‘역시 이런 일을 속이기엔 송하가 너무 많이 컸나?’
이번에도 송운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송하가 먼저 가로챘다.
“그래서? 무슨 볼일이기에 이 새벽에 도둑고양이마냥 떠나려 한 걸까나? 게다가 나한텐 말조차 안 하고 가려고 했고?”
송하의 질풍과도 같은 물음에 슬쩍 당혹스러운 표정이 된 송운이 말을 버벅거렸다.
‘이걸 뭐라 설명한단 말인가? 끙. 그냥 사실대로 말해야 하나?’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동생에게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그녀의 말대로 딱 도둑고양이가 담 넘어가다 걸린 심경이었다.
“어음……. 그것이 말이다. 송하야.”
잠시 고뇌에 빠졌던 송운이 조심스레 입을 떼려던 그때. 그녀는 마치 송운을 제지하듯, 고개를 삐딱하게 돌려세우며 애꿎은 돌맹이들만 발끝으로 툭툭 차기 시작했다.
“됐어. 나도 이제 어린애 아니라니까. 언제까지 어린애 취급할 거야? ……히나 다녀와.”
마지막 말을 웅얼거리는 탓에 송운이 잘 들리지 않았는지 다시 묻자 송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방금…… 뭐라 했느냐?”
“늘 그래왔듯이! 아프지 말고 건강히 다녀오란 말이야!”
송하는 마지막 한마디를 던지고선 쌩하니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보자기에 감싸진 차갑게 식어버린 다섯 개의 주먹밥만이 고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언제 이런 걸……. 설마 이걸 주려고 계속 앞에서 기다린 건가?’
피식.
자세히 보니 모양과 크기가 전부 다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평생 집에서 누군가 해주는 밥만 먹고 자라온 아이기에, 부엌에는 손도 대본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송운은 부엌에서 쪼그려 앉아 이 주먹만 한 크기로 뭉쳐놓은 밥 하나를 만들기 위해 조몰락거리며 끙끙거렸을 동생을 떠올리니 그 귀여운 모습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곤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
‘그래. 회귀 직전에 맛보았던 송하의 음식솜씨도 제법 맛있었지.’
어머니의 손맛을 닮은 것인지 확실히 송하가 해주었던 밥은 맛이 있었다. 비록 소소한 밥상이었을지언정 어릴 적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큼 말이다.
찌잉.
그 당시의 기억은 송운의 가슴 한편을 또다시 한번 쓰림의 물기를 머금게 만들었다. 회귀를 하고 난 후 마음이 흐트러지고 쓰러지고 싶어지거든 송운은 몇 번을 반복해서 기억해내고 또 기억해냈다.
‘아마, 송하가 내게 무공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지금쯤이면 이것저것 요리를 만드는 데 재미를 붙였을 수도 있겠구나.’
송운은 송하가 떠나고서도 한참을 홀로 추억을 곱씹다가 시간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고서야 그녀가 남기고 간 주먹밥을 주섬주섬 챙겨 들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별일 없을 거다. 운아. 좋게 생각하자.’
* * *
늘 화려하게 빛나는 그만의 자리인 황금 침상에 지루함을 온몸으로 내 비추고 있는 독고백의 벽을 누군가 두들겼다.
바로 낙월추였다.
무엇이 그리 좋은지 싱글싱글한 표정으로 그에게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이 낙월추. 감히 주군을 뵙습니다.”
“용케도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왔구나.”
낙월추의 말에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독고백의 새빨간 입술의 매혹적인 선을 타고 흘러나온 말은 그 어떠한 독설보다 더 독했다.
그런 반면 낙월추는 그 말에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흐르는 물처럼 맞받아쳤다. 마치 한 마리의 능구렁이처럼.
“주군께서 특별히 신경 써주신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애매모호한 답이었다.
‘……? 설마 운 동생이 당했다는 것인가?’
하나 그렇다고 보기엔 전혀 그러한 기운을 느끼지 못했다. 그럴 리 없다 여기면서도 너무도 멀쩡한 낙월추의 모습에 독고백의 두 눈썹이 순간 파르르 떨려왔다.
그것은 너무도 미세하여 정말 온 신경을 집중하지 않고서는 보이지 않을 만큼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데 내가 왜?’
어찌하여 그가 걱정된 것일까?
아니면 순수하게 자신의 흥미를 끄는 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 때문일까?
지금 그가 느끼는 감정은 너무도 낯선 것이었다.
독고백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혼동이 오는 그때.
낙월추가 먼저 말을 이었다.
“설마하니 제가 감히 주군의 장난감을 빼앗을 리 있겠습니까? 빼앗으려 해도 할 수도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주군께서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위험한 놈인 줄 알았더라면 더 꼼꼼히 준비해서 찾아갔을 텐데 말입니다. 정말 너무하십니다. 주군.”
낙월추는 서운하다는 마음이 그득 베인 음성이었지만 그런 그의 목소리와는 달리 얼굴은 여전히 웃음 짓고 있었다.
‘후우.’
독고백은 낙월추의 말을 듣고 나니 자신조차도 원인 모를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곤 순간 좀 전과는 달리 싸늘하게 식어버린 그의 눈동자가 정확히 낙월추를 향했다. 그 눈빛만으로도 상대방의 온몸을 쥐어짜 내리는 듯한 압박을 주기엔 충분했다.
“건방진 놈.”
“……크윽.”
낮고 작은 음성으로 단 한마디를 내뱉은 것뿐이었으나 그의 목소리에는 순식간에 공간을 압도시킬만한 살기가 담겨있었다. 그것을 직통으로 맞이한 낙월추는 물론이오, 이와 동시에 주변에 그를 보필하던 여인들이 하나같이 모두 얼어붙었다.
이것은 마치 북해빙궁에 겨울이 찾아온다면 이만큼 추울까? 싶을 정도였다. 이럴 때면 꼭 누군가 하나는 피를 봐야 직성이 풀리는 그였으니까.
꿀꺽.
하나 그런 그들의 걱정과는 달리 침 넘어가는 소리마저 너무도 선명하게 들리는 상황이었지만 정작 장본인인 독고백은 속으로는 낙월추의 행동이 싫지만은 않았다.
‘전에도 몇 번 이런 적이 있었지. 역시 저놈도 재미있구나.’
낙월추의 말을 해석하자면 자신의 무공인 시공검을 놈이 익혔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신에게 책망하고 있는 것이지 않은가?
자신의 수하에 숱하게 많은 이들이 있지만 낙월추처럼 직설적인 이는 극히 드물었다. 조금만 자신이 힘을 내비치어도 낙엽이 부스러지듯 나약한 존재들인 만큼 내면 깊은 곳에는 경외(敬畏)라는 마음이 박혀있는 놈들이 태반이다.
그러다 보니 자신에게 저렇게 편하게 다가오는 것은 낙월추뿐.
독고백에게 있어서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그것은 여태껏 낙월추가 그의 심기를 몇 번이나 건드리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연유였다.
이번엔 독고백이 먼저 싸늘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낙월추. 패한 주제에 뭐가 그리 즐겁기에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것이냐?”
“주군의 말씀대로 참으로 재미있는 놈 같아서 말입니다. 설마 귀마병을 그렇게 한 방에 보낼지도 몰랐던 데다 감히 주군의 시공검을 취하고도 죽지 않는 놈이 있다니!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아닙니까? 무능한 부하 주제에 스스로의 강함을 믿고 주군이 주신 귀마병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하 ……하하하하하!”
참으로 뻔뻔스러운 대답을 듣고 나서야 독고백은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그것은 오히려 주변 이들의 불안감을 더욱더 조성하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아니 애초에 그러한 사실은 관심도 없다는 듯 홀로 잡념에 빠져들었다.
‘일생이라는 것이 참으로 재미없는 것이라 여겼거늘……. 운 동생과 낙월추라……. 쿡쿡. 이거 점점 재미있구나.’
그런 독고백의 모습을 보며 낙월추가 차분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하면 소인은 이만 물러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주군.”
독고백은 낙월추가 자리를 물러나는 와중에도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듯 표정에는 연신 즐거움으로 가득 물들어있었다.
* * *
얼마 동안을 달렸을까.
‘꼬르륵.’
숨이 차오르는 것 정도는 무시하려 했으나, 이제는 한술 더 떠 뱃속까지 밥을 달라며 아우성을 쳐대고 있었다.
‘아무래도 잠시 쉬어가야 하나?’
송운은 더 지체하지 않고 속도를 줄였다.
슥슥.
그러곤 이미 제 숨을 다하고선 땅바닥에 나동 굴며 겨울잠을 자는 이들의 쉼터가 되어주고 있는 나무의 밑동을 슬쩍 닦고선 걸터앉았다.
아무리 급해도 쉴 때는 쉬어주는 것이 그의 철칙이었다. 그래야만 몸이 최상의 상태를 이어나갔으니…….
거기에 매영령이 건네주었던 내상약이 송운을 돕고 있었다.
‘약이 제대로 들은 모양이구나. 다행이야.’
만일 그녀가 준 약을 먹지 않았더라면 지금보다는 더 힘들었을 터다. 그때의 몸 상태로 쉬지 않고 무림맹으로 향한다는 건 이미 힘든 일이라는 것을 한번 겪어보았기 때문이다.
굳이 마을을 들릴 필요도 없었다.
사방은 뻥 뚫려있고, 그 고요함 속에 송운이 존재했다.
전생에도 송운은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그간의 여정에서는 누군가와 함께했기에 어쩔 수 없이 마을에 거처를 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정확하겐 그에게 삶이었고 모든 것이었다.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베게 삼으며 그렇게 살아왔던 때가 있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하게 와 닿았다.
‘그때는 이것이 전부였거늘.’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
전생의 송운은 그 원리를 철저히 따랐다.
지킬 게 없으니 편했지만, 그에 반해 너무도 외로웠던 시절이다.
다시 돌아가라 한다면 그 사무치는 외로움을 견뎌낼 수 있을까?
송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따스하다.’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과 자신을 맞이해줄 식솔들이 존재한다는 것.
그걸 마다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어머니. 아버지. 송후. 송하. 조광이. 그리고…….’
지금은 셀 수조차 없을 만큼 많은 식솔을 모두 떠올리니 마음엔 따스함이 가득 차오르고 송운의 입가엔 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