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그럼 두 분 편히 이야기 나누셔요. 사람을 전부 물리겠습니다.”
“고맙구나. 강아.”
“에이, 새삼 뭘 이런 걸로 그러세요. 사부님. 그럼 제자는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렇게 어린아이답지 않은 넉살을 부리던 위강이 자리를 나가고 나자 양조광의 담담하지만 깊고 총기 어린 두 눈이 직설적으로 송운을 향했다. 어릴 때부터 보아왔던 그의 눈빛은 송운을 평안하게 해주는 이상한 마력이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신 겁니까?”
양조광은 천조회가 운양상단 앞마당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영 찜찜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물론 송운이 머무는 곳에 그들이 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진 모르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그의 신경을 묘하게 자극하는 듯한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토록 다급히 천조회를 보내신 데에는 필시 무슨 연유가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송운이 이곳에 머물고 있는데 굳이 그 짧은 시간에 따로 움직이고 있는 천조회를 불러들일 필요가 없었을 테니 말이다.
툭툭.
양조광의 물음에 송운이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가볍게 내리찍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음……. 뭐 어차피 너에게 상의를 하려 이리 찾아온 거니까.”
‘역시. 무언가 있으신 게 분명하구나.’
송운의 말에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는 걸 안 순간에도 양조광은 어떠한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다만 차분히 고개를 주억일 뿐이었다.
재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의 침묵을 유지하던 송운이 가볍게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좀 전에 이상한 놈들과 마주했어. 처음엔 그저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정확히 날 노렸었고……. 아무래도 강호에 무언가 큰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겠어. 그리고 그 중심이 이곳 헌현현이 될지도 모르고.”
말을 해나가는 송운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다시 보니 그의 안색이 파리했다.
“……하면 그 말씀은?”
“교토삼굴이라는 말. 너도 들어 본 적 있지?”
“예. 꾀 많은 토끼가 굴을 세 개나 가지고 있었기에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는 뜻 아닙니까?”
결국 재앙이 발생하기 전에 미리 알고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양조광은 송운이 꺼낸 말에 자신의 직감보다 어쩌면 훨씬 큰일이 생긴 것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엄습해왔다.
‘쉽사리 이런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거늘…….’
놀라는 양조광을 뒤로한 채 송운은 계속해서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말은 상의지만 거의 부탁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 말처럼 꼭 진짜가 아닐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일단 조광이 너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그저 큰일이 터지지 않고 단순히 나만을 노린 놈들이라고 하더라도 이곳이 결국 위험해질 수도 있는 거니까.”
“그럼 공자님 말씀대로 우리 쪽도 준비를 해두고 기다리면 되지 않겠습니까?”
양조광이 넌지시 제안을 해왔지만 송운이 먼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 방법 하나 가지고는 부족할지도 몰라. 어느 정도 규모인지 가늠조차 오지 않는 데다 나조차도 감당하기 어려울지도 모르니까. 그게 빙산의 일각이라면 더더욱.”
송운은 그때의 그 괴인들을 떠올렸다.
그런 놈들이 한둘도 아니고 떼거리로 무리를 이루어 쳐들어온다면?
정신이 아찔해졌다.
‘나는 그렇다 치더라도 일반인들까지 피해를 입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지.’
이런 때일수록 도움은 많을수록 좋았고, 아는 이가 많을수록 방비책이 많이 생길 터.
“나 하나 때문에 모두가 위험에 빠지는 그런 상황으로 몰아가고 싶지 않아. 그래서 생각해 본 것이 차라리 잠시 내가 떠나 있을 겸, 그 사이에 무림맹에 다녀올까 해. 만약 나를 노린 거라면 계속해서 내 뒤를 쫓을 테니까.”
하나 송운의 마음과는 달리 그 말을 다 듣고 난 양조광은 오히려 얼굴에 걱정 근심이 더욱 커지면 커졌지 절대 줄어들진 않아 보였다.
“운 공자님……. 한데 정말 놈들이 공자님을 노리는 거라면 혼자 움직이시는 건 공자님께서 더욱 위험해지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전서구를 이용하시는 것은 어떠하실는지요? 가장 발 빠른 전서구를 물색해보겠습니다.”
그의 말속에는 온통 송운의 걱정뿐이다.
‘그냥 말하지 말고 다녀올 걸 그랬나? 으음…….’
되레 자신의 말이 그의 걱정을 키운 것은 아닌지 하는 마음에 송운은 후회 아닌 후회가 밀려왔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게다가 괜히 어쭙잖은 거짓말로 그를 속이고 싶진 않았다.
이곳도 혹시 모를 상황에 최대한의 대비는 하고 있어야 한다.
‘괜히 말하지 않았다가 더 큰 위험이 발생할지도 모르는 일이야.’
송운은 양조광을 향해 그만이 가진 특유의 슬쩍 장난기 섞인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주기 위함이었다.
“전서구가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다 이름도 잘 모르는 어떤 미친놈이 부리는 수작이라고 생각해버린다면 일은 더욱 골치 아파질 거고……. 어차피 무림맹까지 가는 데 오래 걸리는 시간이 아니니까 내가 직접 가는 게 가장 확실해. 거기까지 무사히 도착만 해도 훨씬 안전해질 거야.”
“정말 확실한 게 맞습니까?”
그 말을 들은 양조광의 눈빛이 흔들렸다.
“적어도 무림맹이 나선다면 큰 피해까지는 막을 수 있을 거야.”
하나 완전히 장담할 수는 없다.
‘그들이 내 말을 믿는다는 전제하에겠지만…….’
너무 오랜 세월 드러나지 않았던 존재들이기에 믿게 하는 것 자체가 어려울지 모른다.
만일 어렵사리 믿는다고 한들 전 중원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닌, 단순히 송운만을 향한 복수나 위협이라면 움직이지 않을 가능성이 더 컸다.
“하나 이곳도 언제 위험해질지 모르니 그에 대한 방비책은 당연히 마련해 두어야겠지.”
“휴……. 알겠습니다. 그쪽은 제가 알아서 할 터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가는 길. 조심. 또 조심 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미소 짓고 있지만, 그 속에 비치는 커다란 돌덩이보다 더욱 굳건한 그의 의지를 어찌 모를까.
‘하아…….’
한참의 실랑이 아닌 실랑이가 벌어진 끝에 양조광은 그제야 체념한 듯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뱉는다.
‘부디 몸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운 공자님.’
평생을 그의 곁에서 지켜본 양조광으로서는 감히 그것을 꺾어 내릴 수가 없다. 다만 양조광이 지금부터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송운의 안전을 기원하고 또 기원하는 것뿐.
* * *
“……해서 아무래도 내일 당장 무림맹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
송운을 포함하여 총 일곱 명이 모인 방 안의 공기는 평소와는 달리 고요하고 묵직했다. 평소라면 조총이 분위기를 띄워보려 노력했겠지만, 그 역시도 오늘은 아니라고 판단했는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송운이 꺼낸 이야기는 그만큼 모여 있는 모두에게 중요한 사안이라는 것을 인지하였기 때문이리라.
송운이 밝힌 강시라는 존재가 무림의 역사상 약 오십여 년 만에 고개를 들이밀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모두를 긴장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단순히 그 이름 자체가 주는 위압감이 아니었다.
세간에 드러나지 않았던 세월 동안 얼마나 강해졌을지, 세력은 어느 정도의 규모일지 아무것도 감이 잡히질 않는다는 것이다.
무지(無知)에서 오는 공포.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게다가 왜 하필 그들이 노리고 든 것이 송운이란 말인가?
하나 그들의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가뜩이나 무거운 짐을 안고 떠나는 길이다.
그런 그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하고 싶진 않았다. 더더군다나 자신들의 생각보다 혈교라는 놈들이 별것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 아닌가?
아니, 애당초 혈교가 아닌 또 다른 괴 종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미리 겁부터 낸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터.
그 마음을 서로 읽었는지 서사가 먼저 입을 뗐다.
“이거 참……. 누가 보면 초상집인 줄 알겠습니다. 이곳 걱정은 단단히 붙들어 매시고 몸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주군.”
그의 말에 조금쯤은 마음의 짐이 덜어졌는지, 그제야 송운도 고개를 주억이며 답했다.
“고맙습니다. 서사 형님. 형님들. 조총아. 대오야. 그동안 이곳을 잘 좀 부탁드립니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나, 혹여라도 무슨 일이 있거든…….”
말이 더 길어지려는 송운에게 걱정 때문이라는 것을 잘 아는 이들이기에 그의 말을 막아섰다.
“이곳은 걱정하지 마시고 몸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주군. 주군의 걱정대로 혹여나 무슨 일이 생기거든 곧바로 무림맹으로 서신을 하겠습니다. 믿고 맡겨주십쇼. 우리가 누굽니까? 으하하!”
송운은 일부러 밝게 웃으며 자신의 손을 굳은살이 잔뜩 박인 커다란 손으로 맞잡는 대오를 향해 미안함이 잔뜩 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거 참……. 늘 형님들께 부탁만 하는 것 같아 면목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애초에 보잘 것 하나 없던 저희를 거두어 주시고 키워 주신 건 주군 아니십니까? 저희는 그저 그런 주군께 조금이나마 도움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니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맞습니다. 주군! 늘 그래왔듯 든든하게 지키고 있을 테니 먼 길 몸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쿵쿵!
늘 그래왔듯 대오의 말을 조총이 이어받으며 가슴을 주먹으로 가볍게 내리쳤다. 그런 그들의 넉살에 그제야 마음이 조금 풀린 듯 가볍게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역시 천조회를 받아들인 건 잘한 일인 것 같구나.’
믿고 맡길 수 있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 또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송운의 고개가 적돈을 향했다.
“적돈아. 미안하지만 꼭 부탁을 좀 하마.”
끄덕끄덕.
적돈은 말을 하는 대신 고개로 답을 대신했다.
“저는 동이 트는 대로 출발할 겁니다. 다들 마중은 나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모두 대비하는 데 최선을 다해주세요.”
第四章. 무림맹으로
뜬눈으로 밤새 뒤척이던 송운은 동이 트기도 전에 출발할 채비를 마쳤다.
‘환성과 옷 한 벌이라…….’
늘 그래왔듯이 그의 짐은 조촐했다.
이번엔 정말로 오랜만에 홀로 떠나는 길이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것과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조금은 설레기도 하면서 마음 한편으론 걱정도 되었다.
이곳 헌현현에서 섬서성까지 일반적으로 쉬지 않고 말을 타고 달렸을 경우에 꼬박 나흘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 거리기 때문이다. 하나 송운은 말보다 더 빠른 경공을 사용할 줄 아는 덕에 더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다.
조금씩 불안해지는 마음을 스스로를 그렇게 달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