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129화 (129/275)

제129화

‘주군은 이미 다 알고 계셨다. 아니 애초부터 나도 그놈도 모두 시험해 보려 하신 것일지도 모르지. 그런 주제에 오늘로 끝이라니 하찮구나. 참으로 하찮아.’

그렇다고 이제 와 주군을 향해 욕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신은 독고백의 한낱 장난감에 불가할 테니까.

어차피 그러한 것은 낙월추에겐 애당초 상관조차 없었다. 자신도 알고 있으면서도 뜻을 받들길 원했던 것이다. 그를 따르면 재밌는 것들이 따라온다.

그랬기 때문일까.

깨닫고 난 후에 그는 배신이나 치욕감 등의 그런 감정들보다야 되레 너무도 크게 승리를 장담했던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쥐구멍이 있다면 그곳에라도 숨고 싶은 심경이구나.’

낙월추는 송운이 훑고 지나간 자리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이미 거의 모든 시체들이 정리되어가고 있었으나 마지막 남은 한 구가 조금 전 상황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몸이 절반으로 잘린 단면은 핏방울조차 남기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너무도 깔끔하고 반듯했다.

‘그런 어마어마한 무공을 사용하고도 내상만을 입고선 도망을 갔다 라……. 무서운 놈이구나. 참으로 무서운 놈이야.’

낙월추의 웃고 있던 눈이 순간 매섭게 변질되었다.

‘……이번엔 이리 보내주지만, 다음번엔 결코 쉽게 놓아주진 않을 것이다. 송운.’

함께 한지 꽤나 오래되었건만 계속해서 감정 기복이 심해지는 처음 보는 낯선 대주의 모습에 복마검대원들은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뿐이었다.

단지 자신들은 그의 명만 수행하면 되는 것이니.

그 이상으로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 * *

한참을 뛰었을까.

자신을 포위했던 무리들을 뒤로 한 채 무사히 빠져나온 송운이 기감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리며 집과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계속 전진했지만 더는 자신을 쫓는 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후우……. 쿨럭! 우욱……!”

속도를 늦추고 잠시 몸을 기대니 깊은 기침과 함께 검붉은 혈흔이 그의 손바닥을 적셨다. 강도를 조절해서 사용할 수 있다곤 하나, 사용하는 자체만으로도 이미 신체에 무리가 가는 일이다. 거기에 평소보다 훨씬 광범위한 탓에 평소보다 무리하게 기를 운용하였기에 몸 상태는 썩 좋지 못한 상태.

‘그래도 확실히 시공검을 다루는 데 훨씬 능숙해졌다. 어느 정도 내가 원하는 만큼만을 내뻗을 수 있게 되었어.’

검은 복면과 마주했을 때 끌어올렸던 그 기운과 느낌을 잊지 않고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과 달라지지 않은 점이라면 사용하면 여전히 송운 스스로 역시 내상을 입는다는 사실이나, 확실하게 사용하는 법을 몸과 머리에 익힌 것이다.

‘아니, 이 무공은 결국 어떻게 사용하든 간에 결국 자신의 내기를 갉아먹고 몸을 희생시켜 사용하는 원칙을 가지고 있는 게다.’

송운은 생각을 해나가는 와중에도 계속해서 운기조식을 해나가며 내기를 순환시켰다. 이윽고 서서히 이에 반응하는지 야생마처럼 온몸을 날뛰던 것들이 점차 안정되어나가고 있었다.

속이 뒤틀리는 것과 같은 아픔과 함께 여전히 내상으로 인한 각혈은 여전하였으나 일전에 비한다면 그 상태가 매우 좋다고 볼 수 있다.

하나 송운은 그토록 원하던 시공검을 제대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기쁨도 제대로 누릴 틈이 없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닌 듯싶지만…….’

잠시 호흡을 가다듬을 틈이 생기니 송운은 아까와는 또 다른 느낌의 아찔함에 머리가 핑 돌았기 때문이다.

‘허……. 또다시 이런 일을 겪게 될 줄이야.’

상대방은 나를 아는데 나는 상대방을 모른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끼는 이 심경은 송운을 또다시 불안함 속에 빠뜨리기엔 충분했다. 물론 과거에도 전혀 없던 일은 아니었지만 단연컨대 이 정도로 급박해 본 적은 없었다.

정확하게는 지금처럼 자신이 지켜야 할 존재가 없었기 때문이리라.

하나 지금은 아니다.

그때와는 다르게 작금 자신의 곁에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고 연인이 있다. 이 이상 잃어서도, 잃고 싶지도 않은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혹여 나를 쫓아오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푸드득!

송운은 다급히 발길을 돌려 천조회가 있는 방향으로 운양상단을 부탁한다는 전서구를 날렸다.

그러곤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대의 경공을 펼치며 어딘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지금 송운의 머릿속에는 온통 혼란스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찌하여 마인들이나 사용할 법한 것들이 돌아다닌단 말인가?’

수십 년간 정파들이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발 벗고 나서며 강호에서 무림맹이 강권(强勸)으로 자리를 다지게 되자 평화가 유지되었다.

그 속에서는 또 다른 커다란 능구렁이 한 마리가 들어앉아 있을지 모른다 해도 말이다. 그랬기에 그동안은 자그마한 소용돌이가 생길지라도 순식간에 사라지고 조용히 흐르는 거대한 강물과도 같았다.

‘비록 그 평온이 앞으로 얼마나 더 갈지는 모르겠으나…….’

본능적으로 송운은 이건 자신만의 일을 떠나 어쩌면 중원에도 커다란 악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들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이성을 잃은 듯한 병기에 가까운 자들과 그들을 부리던 놈들까지!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 하였다.’

정체를 스스로 알아내려는 대신 송운은 놈들의 특징을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머릿속에 부각시켰다. 지금 아무리 홀로 머리를 굴려본다고 한들 무언가 나올 리 만무한 일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다.

정보가 없으면 당하기 십상이다.

그 시대가 언제이건 싸움에서 힘만큼 중요시되는 것이 정보력이었다.

그랬기에 송운 역시 천조회를 만들지 않았던가.

‘당금의 천조회는 아직도 너무도 부족한 것이 많구나.’

씁쓸해지는 마음이 그를 덮쳐왔지만, 곧 송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은 그런 감상조차 젖을 시간이 없다.

‘대체 놈들은 누구였는지, 그리고 그 이상한 술수는 무엇이었는지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

파밧!

송운이 움직임이 더뎌진 발걸음에 억지로 박차를 가했다.

第三章. 교토삼굴(狡免三窟)

어딜 가도 눈에 확 뜨일 법한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미색의 여인 뒤로 그와 대조되는 단조로운 백색의 옷을 입은 인영이 무릎을 꿇으며 앉았다.

“각주님. 송 대협이 오셨다고 합니다.”

차분해 보이던 미색의 여인은 그 인영의 입에서 나온 단어에 깜짝 놀란 듯 두 눈이 화등잔만 해지며 되물었다.

멈칫.

“……송 대협께서 직접 말이니?”

간단히 차를 한잔 마시고 있던 매영령은 오래간만에 들려온 좋은 소식이었다. 하나 마냥 좋아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직감이 그녀를 강하게 강타했고 기분이 묘하게 변했다.

매영령은 조심스레 기억을 떠올렸다.

그날을 마지막으로 송운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찾아온 적이 없다. 한데 그런 그가 전서나 사람을 보내온 것도 아니고 직접 나섰다니?

‘송 대협이 직접 이곳까지 올 정도라면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건 확실해.’

매영령의 오래된 직업적인 본능이 스스로를 부추겼다.

더 이상 지체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매영령은 서둘러 송운을 모셔오라 명했다.

“어서, 어서 이곳으로 모셔오거라.”

“예. 각주님.”

그녀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얼굴에 심각함이 가득 들어찬 송운이 들어왔다.

“오랜만이어요. 송 대협.”

“급히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것이 있소.”

매영령의 표정엔 매우 반가움이 가득 들어차 있었으나 지금 송운에게는 그런 것까지 일일이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점점 그의 안색이 파리한 것이 좋지 않게 변하고 있었다.

내상을 입은 채로 무리하게 경공을 사용한 탓이다.

뒤늦게 발견한 매영령도 걱정스러운 어투로 조심히 물어왔다.

“설마, 어디 다치신 건가요?”

“별것 아니니 염려하지 않아도 되오.”

드륵.

하나 매영령은 서랍 깊숙한 곳에 들어 있던 상자를 꺼내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의 그것은 한눈에 보아도 몹시 고급스러워 보이는 각이었다. 그럼에도 매영령은 한 치의 고민도 머뭇거림도 없이 속에 있던 동그란 환으로 된 것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송운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꺼내지는 순간 화한 약재의 향이 송운의 코를 찔렀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매영령이 실소를 터뜨렸다.

“우선은 이거라도 드세요. 지금 당장 완벽하게 되진 않겠지만 내상을 치료해주는 약이에요. 안색이 파리한 게 썩 좋지 않아 보인답니다.”

“하나 매 각주, 이런 건 정말…….”

송운은 거절하려 하였으나 매영령은 끝까지 그의 손에 꼭 쥐여 주었다.

“무언가 대가를 바라는 것이 아닌, 친인으로서 드리는 것이니 어서 드세요. 그리고 분명 송 대협께서 여기까지 그 상태로 달려오셨다는 건 이 근처에서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는 거고, 우리에게도 위험이 올지도 모른다는 거니까요.”

순간 매영령의 눈빛이 번뜩인다.

참으로 각주로서 날카로운 감이다.

“후우……. 고맙소.”

결국 그녀의 눈빛과 마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내상 약을 받아든 송운은 그것을 한입에 삼켜 넣었다.

그러자 씁쓸하면서도 달콤한 듯한 애매모호한 맛이 그의 입에서 목구멍을 타고 흘러 들어간다. 그와 동시에 적잖은 타격을 받았던 내부의 상태가 서서히 호전되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니 말이 서서이지 결코 느린 속도가 아니었다.

하나, 원래도 약이라는 것과는 거리가 먼 송운이기에 단지 의아할 뿐.

그 이상의 의문은 품지 않았다.

“제법 약이 쓰구려.”

표정이 구겨진 송운을 보며 매영령이 속으로 웃었다.

‘후후. 당연하죠. 그거 보통 약은 아니라구요.’

놀라움과 의아한 마음이 드는 송운이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리자 매영령이 차분히 설명을 이었다.

“후후. 몸에 좋은 것치고 쓰지 않은 것이 있던가요? 게다가 이래 보여도 제법 효과가 좋은 약이랍니다. 아무쪼록 이제야 제 마음이 좀 놓이네요.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일 거라는 것쯤은 예상을 하고 있었어요. 그렇지 않고서야 송 대협께서 직접 절 찾으러 올 일은 없을 테니 말이에요.”

“……하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알고 있소?”

매영령의 말에 송운의 눈이 빛나며 순간 조금의 기대를 걸었다. 하나 송운의 기대와는 달리 그녀는 고개를 매몰차게 내저었다.

“제가 아무리 뛰어나다고 해도 어찌 송 대협의 마음까지 알까요? 어떤 정보를 원하세요?”

“……그 전에 사람을 좀 물려줬으면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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