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꽤나 재밌는 놈이구나.’
송운이 어찌 생각하고 있건 낙월추는 지금 기분이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단순하게 결전 직전의 상황 때문은 아니었다.
호기심이었다.
만나기 전까지는 알 수가 없기에 그저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또 생각만 해오던 허상이 몇 년 만에 눈앞에 나타났다.
그뿐인가?
자신의 눈길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맞받아쳤다.
이런 일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전의 일이다.
‘어쩌면 이런 점이 주군의 흥미를 끌었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그것도 오늘이 끝이다.’
그가 이토록 자신만만해하는 건 자신 역시 무위가 결코 송운보다 뒤떨어지는 실력이 아니라고 생각했을뿐더러,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저 스무 명의 멍청한 놈들은 약을 먹고 이성을 잃어버린 지 오래된, 오롯이 전투를 위한 짐승이었다.
거기에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임무에 실패해본 적이 없는 자신과 자신의 부대원들까지 함께였다.
그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번에 일을 맡으면서도 떠나오기 전 마지막으로 독고백이 남긴 말의 의미를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다.
“최선을 다해 싸우되 죽을 것 같으면 도망쳐라. 괜히 아까운 목숨 잃기 싫으면 말이야.”
낙월추는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처음부터 송운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나, 작금은 그에게 묘한 자존심이 생긴 것은 사실이다.
이 기회에 송운을 없애고 주군인 독고백에게 당당히 인정받으리라.
다만, 그렇다고 해서 곧바로 자신이 나설 생각은 아니었다.
약을 먹인 인간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것들을 시험해 볼 좋은 기회였다.
“어디 한번 마음대로 날뛰어 보거라.”
그는 자신의 뒤에서 그르렁거리고 있는 놈들을 향해 나지막이 외쳤고 곧 그것이 윤활제라도 된 듯 미친 듯이 송운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 * *
카앙-!
촤아악! 쿠웅!
“크르르……!”
“……?!”
송운은 미친 듯이 달려드는 놈들을 향해 검을 그었으나 베일 거라는 그의 예상과는 달리 자신의 검이 맑은 공명을 내며 튕겨 나왔다.
파바밧!
“크륵!”
반면 그것은 놈들의 심기를 더욱 자극한 것인지 더욱 격렬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 어이없는 상황을 지켜보던 송운의 커다란 두 동공이 미세하게나마 흔들렸다.
‘이 대체 무슨……?’
광견처럼 득달같이 달려드는 놈들에겐 그 어떠한 초식도 절제도 없었다. 그저 눈앞의 적을 인식하는 순간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
한데 그런 놈들이 가진 속도와 힘은 상상 이상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단단하기까지 한 육체는 송운을 당혹스러움에 물들게 만들기 충분했다.
‘마치 단단한 쇳덩이와 부딪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카앙!
키기긱-!
‘역시나인가?’
혹여나 하는 마음에 다시 맞부딪혀 보았으나 결과는 여전히 똑같았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렇게 되면 그냥 휘두르는 칼질은 소용이 없다. 그저 무모한 체력 낭비일 뿐이지.’
아니, 애당초 일반적인 검이었다면 그들의 피부를 내려치는 순간 부러졌을 터다.
‘환성이기에 버티고 있는 게지.’
송운의 생각대로 계속해서 검에 내력을 실은 검기로서만이 그들의 단단한 피부를 뚫을 수 있을 것이다.
생전 한 번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일이다.
‘어찌 사람이 이럴 수 있단 말인가?’
자신에게 지금 달려들고 있는 놈들은 사람도 짐승도 아닌 그 중간의 경계에 있는 자들이다. 거기에 그 뒤에 팔짱을 낀 채 구경하고 있는 이와 수하로 보이는 놈들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임은 여지없는 사실일 터.
‘최소한 저 독사 같은 놈만 해도 나보다 한 수는 더 앞선 놈이다.’
만일 이놈들을 다 죽인다고 해도 이미 많은 힘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멀쩡히 남은 놈들을 혼자서 상대하긴 벅찰 게 불 보듯 뻔했다.
꽈악.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송운의 검을 쥐고 있던 손에 땀이 절로 배어 나왔다.
‘후우……. 우선 침착하자. 이럴수록 당황해서는 안 된다. 수입호굴 불황신이가생(雖入虎窟 不慌神而可生,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잃지 않으면 산다) 라 하였다.’
송운은 사방으로 달려드는 스무 명의 적들의 공격을 최대한 피해 가며 힘을 아껴 상대했다. 대처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머릿속에선 끊임없이 대책을 생각해내야만 했다.
혹시나 모를 또 다른 능력 때문이었다.
하나 송운의 생각과는 달리 그 외의 것은 없는 것 같았다.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야 한다.’
그리고 그때.
무언가 송운의 뇌리를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시공검!’
몇 달 전 검은 복면과 대적 끝에 어렵사리 깨달음을 얻었던 시공검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을 이미 두 번이나 위험한 상황에서 구해주던 은인과도 같은 존재다.
하나 그토록 원했던 각성을 하고 난 후에도 송운은 여전히 그것을 전혀 사용해볼 수 없었다. 워낙 광범위한데다 위험도가 높은 탓이었다.
자칫 사람을 향해 함부로 휘둘렀다가 누구든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루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저 그의 수련을 대신해주는 것은 산 주변의 거대한 돌덩어리들이 전부였을 뿐.
한데 이러한 상황이라면?
이미 사람도 무엇도 아닌 괴물로 변한 놈들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것이라면?
어차피 이미 인간의 이성을 잃은 자들이다.
저들을 사람으로 다시 돌리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지금이라도 편히 잠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송운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도다.
거기에 이것은 덤이라면 덤이라 할 수 있는 것.
‘전화위복이라 하였던가? 어쩌면 지금이 그것을 다시 시험해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구나.’
그제야 송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런 송운과 달리 찰나의 순간이나 그 모습을 본 낙월추는 의문을 가짐과 동시에 심기가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웃어?’
누가 보아도 송운에게 불리한 상황이다.
한데 그런 상황에 미소라니?
뭔가 자신의 생각과는 달리 전개가 흘러간다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순간.
후우웅.
무언가 엄청난 기의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는 송운이 있었다.
일이 벌어지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아니, 매우 짧고도 또 짧았다.
우웅.
“이……! 퍼져……!”
“크아아!”
스걱!
낙월추가 급하게 무리를 향해 소리쳤으나 이미 늦었다. 그의 육안으로도 보지 못한 사이 날카로운 음속(音速)과 함께 스무 명이 모두 처참하게 온몸이 반으로 갈렸고 송운은 어느덧 포위망을 벗어나 있었다.
“후우…… 후우……! 쿨럭쿨럭!”
엄청난 기를 소모한 뒤 송운의 숨은 깊은 기침을 토하며 제법 거칠었지만, 그보다 더 당혹감에 빠진 이는 따로 있었다. 여태껏 단단하고 자신감 넘쳤던 낙월추의 눈빛이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발 앞에 핏물조차 깔끔하게 튀어 나갔다고 생각될 만큼 방대한 거리 사이로 소름 끼치는 시신들과 그 사이로 땅마저 가뭄이 들 듯 갈라져 있었기 때문일까?
“저, 저놈이 대체……!?”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한몫했을 터나 그런 시신들 따위 수도 없이 봐왔던 낙월추다. 그를 이토록 놀랍게 만든 건 송운이 사용한 그 무공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어찌 네놈이 주군의 무공 중 하나인 시공검을 사용했단 말이냐?’
처음의 놀라움도 잠시 흔들리는 동공 속 가득 찬 혼란으로 뒤덮인 낙월추의 두 눈이 송운을 바라보던 그를 향해 다급히 물었다.
“대주님. 놈이 달아납니다. 쫓을까요?”
“허…….”
“대주님?”
하나 낙월추는 들었는지 말았는지 굳어버린 채로 한참 동안 반응이 없었고 다시 한번 되물어오자 그제야 서서히 굳어버린 입을 열었다.
“……시체는 깨끗이 소각하고 본래의 곳으로 돌아간다. 혈흔 조각 하나라도 남겨선 아니 된다.”
“하오나…….”
“지금이라도 쫓는다면 충분히 쫓을 수 있는 거리입니다.”
그의 수하들이 의문을 가득 품은 목소리로 되물었으나 낙월추의 명은 바뀌지 않았다.
‘놈이 시공검을 익힌 이상 이깟 걸로는 상대가 되지 못한다.’
여태껏 임무에 실패해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자신이 있던 임무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온몸에는 소름이 쫙 퍼져나갔다.
‘송운 이놈이 정녕 그토록 대단한 놈이란 말인가?’
처음엔 자신의 주군인 독고백의 무공인 시공검을 한낱 송운이란 놈이 시전했다는 것에 놀랐다. 그걸 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이미 놀랄 일이었다.
하나 잠자코 생각해 보니 단순히 ‘시전’했다는 의미만이 아니었다. 자신 역시 그 무공을 보았으나, 결코 배웠다고 해서 함부로 누구든 시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일 그 무공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놈이었다면 시공검을 시전하고도 무사할 리 만무하다. 그도 알다시피 시공검이라는 무공은 그것을 배운다고 해서 쉽게 행할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시공검을 사용할 만큼의 내공과 무위가 없다면 오히려 그것은 독이 되어 시전자를 향해 날아와 비참히 죽여 버린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설프게 휘둘렀다면 적어도 피를 토하고 몸의 모든 내력을 소모한 채 고통에 휘말려 서서히 죽어갔을 것이다.
한데 송운은 그게 너무도 완벽했다.
완벽하게 내상을 입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각혈을 하거나 온몸의 기력을 잃고 쓰러지지도 않았다.
그 말인즉슨…….
으득.
‘시공검을 익혔고 그만큼의 기를 가지고 다룰 줄 아는 놈이다.’
낙월추는 자신조차도 모르는 무언가의 비밀이 있다는 것에 대해 분노했다. 아마도 몇 해 전 있었던 무황비고의 사건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 분명해지는 순간이었다.
‘어찌하여 주군께서는 이런 중요한 정보를 내게 언질조차 해주지 않으셨단 말인가?’
귀마병(鬼魔兵)이라는 장벽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자칫하면 그 검 날의 끝은 곧장 자신을 향해 날아왔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송운이 조금만 더 마음을 크게 먹었더라면 수하들의 목숨을 다 잃고도 자신마저도 회복하기 힘든 중상을 입었을지도 모른다.
한참을 멍하니 있었을까.
낙월추가 곧 하늘을 향해 크게 파안대소하기 시작했고 그의 큰 웃음소리에는 원망도 그 무엇도 담겨 있지 않았다.
오롯이 즐거움이란 감정만이 가득 흘러나올 뿐.
“흐…… 흐하하하하하!”
이제야 어렴풋이 낙월추는 알 것 같았다.
왜 최선을 다 해도 죽을 것 같으면 도망치라 하였는지, 귀마병의 환약을 시험해 보고 싶다며 자신에게 주었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