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놈의 배경. 인맥!’
알아본 바에 의하면 송운은 겉면으로 드러나진 않았으나, 실질적인 운양상단의 주인이자 대대로 이어온 학사 가문의 장남이다.
뿐만이던가?
‘……황실과의 인연이 닿은 것도 모자라 꽤나 큰 공을 세웠다고 했던가.’
자칫 잘못해서 섣불리 나섰다가 일이 틀어지기라도 한다면?
으득.
‘……그땐 우리 흑랑회는 풍비박산이 날것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가 내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있었다. 이자와 마주한 첫날 부회주가 맥없이 단 일격에 날아갔다.
아니 굳이 그렇게 보지 않아도 진흑창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 같은 이들이 수백이 달려들어도 생채기 하나 없이 날려버릴 놈이다.
하나 그의 무위보다 더 탐이 났던 것은 혹여나 있을 만일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흑랑회를 이끌어 온 지 어언 십여 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밑바닥부터 시작해 여기까지 오는데 만 너무도 긴 시간이 걸렸다. 한데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무너지는 꼴은 그 역시 볼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자신을 바라보며 충성을 맹세한 이들만 수십여 명이다. 오랜 세월 동안 한 무리의 우두머리로서 그의 책임감과 이성이 가까스로 조금씩 진정시키고 있었다.
‘분하지만 참아야 한다. 아니, 오히려 차라리 잘된 일이지. 우리를 대신하여줄 희생양으로 굳이 나서준다는데 내가 왈가왈부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이내 속으로 한참을 고뇌하던 진흑창이 다시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열었다.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꽤나 침착한 모습이었다.
“죽어도 뒤탈이 없을 이들로 스물이라……. 그들을 어찌 쓰려는지 물어도 되겠소? 내 그 정도 권한은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오.”
‘후우……. 다행이구나.’
진흑창의 다음 말을 걱정하던 주 총관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이런 것이라면 자신들도 알아야 할 필요성이 조금은 있는 것이니 말이다.
하나,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알 리 없는 그는 단칼에 잘라 답했다.
“그런 것도 네가 알 필요는 없다. 어차피 알지 않으려 해도 곧 알게 될 것이니. 이틀을 주마. 그 안에 모든 준비를 끝마쳐두도록.”
마지막 말을 남기고선 그는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졌다.
쭈웁.
탁!
“크으!”
눈앞에 놓여있던 독한 술을 그대로 쭉 들이켠 진흑창은 곧바로 주 총관에게 말했다.
“……기왕 준비하는 것 최대한 흑랑회와 관련이 없는 놈들로 구해야 한다. 절대로. 절대로 말이야. 알겠느냐? 혹여 일이 잘못되더라도 우리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야.”
부들부들 떨려오는 그의 목소리에는 분노로 그득했다.
“예, 예. 알겠습니다. 회주님. 일 처리에 능한 놈들이 있지 않습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오늘은 푹 쉬십시오.”
하나 그런 그의 말에 진흑창은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크흐흐. 쉰다고 쉬어질까? 술이나 더 들여오라고 해라. 기분이 아주 더럽고 또 더럽구나!”
꽤나 오랜 시간 동안 그의 옆에서 함께했다고 자부하던 주 총관이었으나, 단 한 번도 저런 표정을 본 적은 없었다.
그 때문일까.
평소라면 말릴 주총관 역시 속이 비렸는지 조용히 고개를 주억이며 밖을 향해 입을 열었다.
“술과 안주를 내오너라.”
“예.”
* * *
바깥으로 빠져나온 그는 곧바로 조용히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사사삭.
그가 도착하자 사방에서 정체 모를 인영들이 튀어나와 무릎을 꿇었다.
“오셨습니까? 대주님.”
복마검대(伏魔劍隊) 대주. 낙월추(駱越麤).
뜬금없이 나타나 흑랑회를 돕겠다고 손을 내민 자의 실명(實名)이다.
“……이틀 뒤.”
사방이 조용한 어둠으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는 크게 울릴 법도 하건만 조용히 한 사람의 귓가에만 전해질 정도로 미미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짧고 간결했지만, 그 검은 인영들은 알아들었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주억이더니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송운. 네놈이 어느 정도인지 그날이 되면 알 수 있겠지.’
그의 입가에는 비웃는 것인지 기대가 담긴 호기심인지 모를 것이 조용히 걸려 있을 뿐이었다.
* * *
“오늘따라 이상하게 서늘하구나.”
송운은 잠시간 느껴진 한기에 잠시 몸서리쳤다.
“이제 겨울이 본격적으로 온다는 뜻이 아닐까요?”
송운의 곁에서 수련을 잠시 쉬고 있던 위강이 순진무구한 눈빛을 하며 답해오자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음, 강이 네 말대로 그런 걸 수도 있겠구나.”
물론 위강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어느덧 울긋불긋하던 산들이 하나둘 옷을 벗기 시작할 무렵이니 말이다. 하나 송운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조금은 찜찜한 느낌을 쉽사리 떨칠 수가 없었다.
이미 오래전 웬만한 한기에는 끄떡도 하지 않는 송운이다. 그런 그에게 이런 기분은 좋지 않은 징조임은 틀림없었다.
‘또다시 흑랑회가 움직이려 하는 것인가?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묘한 의혹을 품으면서도 송운은 그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당했다고 생각하고 있을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놈들이 고작 두 번 밟혔다고 수그러들진 않는다. 그랬다면 세상의 모든 악인들은 이미 모조리 사라지고도 남았어야 했다.
‘썩 좋지 않아.’
한동안 잠잠하던 흑랑회다.
언제 다시 무슨 일을 꾸며도 이상하지 않을 터였다.
‘천조회에 부탁을 좀 해야겠구나. 미리 경계를 해둔다고 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
“잠시 자리 좀 비우마. 아까 하던 것마저 하고 있거라.”
“네. 사부님!”
위강의 활기찬 대답을 들은 송운은 얼굴에 그윽한 미소를 띠며 그 길로 곧장 천조회에게로 향했다.
第二章. 기습
오늘도 어김없이 홀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사색에 잠겼던 송운은 어디선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면서 잠시 가던 걸음을 멈췄다.
그와 동시에 자신을 따라오던 무언가 역시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아까부터 어렴풋이 드러나는 그 기운은 송운을 의아하게 만들고 있었다. 자신보다 조금 뒤처진 곳에서 향하는 방향이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상하군. 설마, 정녕 날 쫓는 것인가?’
송운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쾌한 기분에 기감을 끌어올리며 점차 발걸음을 빨리하기 시작한다.
사사삭. 멈칫.
사사삭. 움찔.
그러자 이번에도 역시나 기척이 또다시 점점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송운은 이로써 완전히 확신할 수 있었다.
본능적으로 이대로 가다간 위험하다는 것을 깨닫고선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한적한 공터가 있는 곳으로 돌렸다.
그리고 완전히 인가에서 멀어졌을 즈음.
‘허……!’
송운은 순간 묵직한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얼얼함이 맴돌았다. 그와 동시에 한동안 느슨해졌던 자신의 모습에 질책할 수밖에 없었다.
‘총 스물여섯……. 설마 흑랑회에서 보낸 건가?’
가장 앞에 서 있는 이와 마주했을 때부터 송운은 흑랑회를 의심했지만, 곧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니다. 애당초 그들과는 분위기부터가 다르다.’
하나 이렇게 사람을 보내올 정도로 척을 진 곳은 현재로선 흑랑회뿐이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당장 송운에게 떠오르는 집단의 이름은 없었다.
그동안 싸워왔던 이들의 이름을 다 떠올려 보았으나 그 누구도 포함되지 않았다.
송운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렇다면 결국 남은 건 흑랑회뿐인데 만일 그들이 시켰다 한들 대체 어디서 이 정도의 실력을 지닌 이들을 불러왔단 말인가? 거기다 저 뒤에 있는 놈들…….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다.’
놈의 뒤로 서 있는 이들에게서 사이한 기운을 느꼈다.
꽈악.
절로 그의 두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설마 마교인가? 그들이 벌써 움직인단 말인가?’
비록 그 일이 있은 지 몇 년이 흐른 시간이긴 하나, 그 당시 입은 그들의 피해 역시 적지 않았다. 마왕을 넷이나 잃어버린 전력손실은 앞으로 최소 몇 년간은 더 늦출 만한 것이었다. 송운이 함부로 확신을 가질 수 없었지만, 마교대전은 아직은 그때가 아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송운이 마교가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기운부터가 이미 다르다.’
직접적으로 싸워본 것은 아니나 눈앞에서 현 마교의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구천악과 마주했던 몸이다. 그 외의 다른 마왕들과 손속을 섞으면서도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다.
온몸에서 퍼져 나오는 기세는 그것과는 사뭇 다른 무언가의 존재였다.
‘게다가 눈 속에 사람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생기가 흐르는 이가 없구나.’
총 스무 명의 허공을 멍하니 바라보는 듯한 그들의 눈은 마치 악귀에게 혼을 빼앗긴 것인 마냥 공허했다.
아니, 정확하겐 눈동자에 초점이라는 것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지독하리만큼 짙은 살기만이 그들의 주변을 감싸며 돌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기운은 송운의 미간을 절로 찌푸리게 만들고 있었다.
‘적어도 마교는 저런 사술은 쓰지 않는다.’
그들 역시 불을 숭상하는 힘에 미친 자들이다.
그만큼 개개인의 힘을 중요시하는 만큼 자신의 무위를 자랑하면 자랑했지, 결단코 사술을 부려 남을 이기려 하진 않는다. 그런 면에서는 오히려 단순하다고 볼 수 있을 만큼 말이다.
‘하면 대체 어디서 온 자들이란 말인가……?’
오히려 이렇게 되니 더욱 오리무중으로 빠져버린 그때. 낙월추가 조용히 읊조렸다.
“네놈이 송운이냐?”
상당히 절제된 듯한 저음의 목소리에 송운은 잠시 실소를 내뱉으며 되물었다.
“허, 계속해서 날 쫓아온 주제에 상당히 뻔뻔하지 않소? 이미 알고 온 것이 아니던가?”
“뻔뻔하다라…….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말을 잘도 내뱉는구나.”
송운이 기가 찬다는 듯 말을 하자, 낙월추가 입가에 가소롭다는 듯 비웃음이 진득하게 걸쳤다. 낙월추의 말대로 겉으로 보기엔 누가 보아도 송운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것임은 분명해 보이는 건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서로의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이 치열하게 오갈 무렵.
순간 낙월추와 송운의 두 눈이 마주쳤다.
그의 두 눈은 여전히 웃고 있었으나 아까와는 달리 입은 무표정하기 그지없었다. 그 모습에 송운은 마치 오랫동안 굶주려 날카롭게 먹잇감을 노리는 듯 독을 잔뜩 품은 독사가 떠올랐다.
‘……쉽진 않겠군.’
아무렇지 않은 척하곤 있지만, 은은히 피어오르는 사내의 기운은 온몸을 저릿저릿하게 타고 오르고 있었다. 하나 송운은 결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