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第一章. 한기(寒氣)
휘잉-
탁.
‘이곳에 온 지 제법 시간이 지났구나.’
송운은 방 안으로 불어오는 찬 바람에 앉아있던 몸을 일으켜 조용히 창문을 닫았다. 묘정(卯正)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밖은 컴컴한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불과 몇 주야 전까지만 해도 이미 해가 뜨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이젠 진짜 겨울인가.’
송운이 두 눈을 감고 기감을 한껏 끌어 올리자 새벽을 알리는 새들의 지저귐과 바람이 부는 소리 하나하나가 그의 귓가를 울렸다. 자연과 송운 스스로가 하나로 동화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겨울 새벽 특유의 차가우면서도 포근한 그 향이 그의 코를 가득 메웠다.
한참을 반복했을까?
그 외의 복잡한 잡음은 들려오지 않았고 새벽이라 한들 세상이 너무도 고요했다. 마치 요 몇 달간의 일들이 다 하룻밤의 꿈처럼 느껴질 만큼 말이다.
게다가 더욱더 전력을 다해 들이부을 것 같았던 흑랑회가 그 일이 있고 난 후론 웬일인지 잠잠해졌기에 단단히 대비하던 송운의 마음이 조금은 풀어진 탓도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자 송운은 새삼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에 곰곰이 헌현현에 온 후의 일들을 떠올렸다.
무황비고의 일이 있고 난 후 약 이 년간 북경에서 평온한 나날들을 보냈던 것에 비하면 이곳으로 온 뒤의 그에게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마치 그동안 충분히 쉬었으니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일은 봇물 터지듯 그에게 쉴 새 없이 들이닥쳤다.
‘처음부터 쉽지 않았지.’
헌현현에 오는 길부터 험난했다.
순조로울 것이라 예상했던 길에 갑자기 나타난 흑색 복면의 사내로부터 격전을 치렀고, 그로 인해 송운은 부상을 얻고 송하는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었다.
하나, 그와의 싸움으로 인해 오랜 시간 동안 진전이 없었던 시공검에 대해 각성할 수 있었다.
그것은 변치 않는 사실이다.
송운은 그 순간의 기억과 최근 송하의 상태를 동시에 떠올렸다.
‘송하가 그 일 이후로 많이 바뀌었긴 하나…….’
매사에 활달하고 순진했던 동생의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었다는 것은 그를 비롯해 그녀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지내왔던 양조광 또한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직도 그 일에 대해서는 마음에 걸리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이미 지난 일인데다 송운의 걱정과는 달리 이미 그녀대로 잘 헤쳐나가고 있지 않은가?
그건 동생의 일이라 할지언정 자신이 섣불리 끼어들 일이 아니었다.
되레 이번 일로 인하여 정신적으로도 한층 성숙해졌다는 것을 그는 느낄 수 있었다.
‘만년 어린 아인 줄로만 알았거늘, 어느새 이리 성장하였구나. ……송하도 성장하며 겪어나갈 일인 게지.’
자신이 전생에 그리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연히 구해준 화령각이 하북성의 유일무이한 정보 집단인 화월문과의 깊은 관련이 있었고 그로 인해 생각지도 못했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비록 그 이후 흑랑회와 계속해서 더 부딪혀야 했지만, 얻은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값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날 그 자리에 있었던 이들과 화령각의 입소문을 타면서 송운이 흑랑회라는 거대한 존재와 맞섰다는 사실은 헌현현 곳곳에 퍼졌고, 운양상단은 그 덕에 더 많은 명성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화월문의 정보와 인맥 형성.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마음. 그것을 얻은 대가라면 이 정도면 후한 편이지.’
더구나 흑랑회는 운양상단에게 있어서도 그다지 반가운 존재가 아니었기에 송운은 차라리 잘 되었다는 판단이었다. 처음에 걱정하던 양조광 역시 지금에 와서는 송운과 같은 생각이었으니 두말할 것도 없었다.
거기에 운양상단의 일을 돕고, 틈틈이 송하와 위강의 수련을 봐주면서 개인 수련을 하고, 양조광과 오랫동안 나누지 못했던 학문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정말 하루가 모자라는 것 같았다. 어찌 보면 본집에 있을 때와 비슷한 것 같았지만, 그와는 확연히 달랐다.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너무 평온하여 이상하다고 여겨질 정도였지만, 막상 또다시 이런저런 일을 겪고 나니 심신이 피곤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지사가 아니던가.
‘그 짧은 기간 동안 별의별 일이 다 있었구나.’
하지만 송운은 이 상황이 싫지만은 않았다.
피곤함에 시달렸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의 얼굴에는 어느덧 즐거움의 미소가 피어오르고 있다는 것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었다.
송운은 멋쩍은 표정을 자아냈다.
‘허허. 아마도 내가 살아 있음을, 존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겠지.’
학문을 익히고 아버지가 밟았던 길을 걸으려 하고 있지만 서도 무인은 무인이다. 송운은 그 점을 스스로 잘 알고 있기에 웃음이 난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어느덧 새벽의 동이 푸르스름한 빛을 가르며 떠오르고 있었다.
* * *
탁.
“한차례 비가 오려나 봅니다.”
보던 서류를 마무리 지은 양조광이 잠시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쿠르르릉.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요란한 굉음 소리가 퍼져 울린다. 아침까지만 해도 마냥 맑을 것 같았던 하늘이 잔뜩 화라도 난 듯 거뭇거뭇한 먹구름이 끼어있었다.
“음……. 본격적인 겨울이 오기 전 마지막으로 한바탕 퍼부으려는 건가? 쉬이 물러갈 비는 아닌 듯한데.”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조용히 미소 짓고 있던 양조광이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송운을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한데…… 요즘 강이는 어떻습니까?”
“위강이 말이야?”
송운이 재차 되물었고, 곧이어 들려온 그의 대답 속에는 어딘지 모르게 서운함과 걱정이 묻어나왔다.
“예. 예전 같으면 틈만 나면 얼굴을 내비치던 녀석인데 학문을 익히는 시간이나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얼굴을 보기 힘들어서 말입니다.”
그의 말대로 이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을 위강을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마치 어미 새와 아기 새를 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둘의 사이가 좋으니 나 또한 기분이 좋구나.’
송운은 양조광을 향해 웃으며 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매일 송하와 함께 수련하느라 바쁜 거니까. 날이 갈수록 실력도 일취월장이니 조금 얼굴을 보지 못한다 해서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그래도 강이 녀석 널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 악물고 배우는 중이야.”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다행이긴 하지만……. 혹여 운 공자님께 폐를 끼칠까 걱정입니다.”
송운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곤 오늘 낮에도 함께 했던 위강의 모습을 떠올렸다.
‘참으로 대단한 아이지.’
매일 고된 수련에 양조광과 따로 학문을 공부하며 상단 일까지 모두 다 해내면서도 힘든 기색을 쉽사리 내비치지 않는다. 물론 송운은 그가 힘들어 하루쯤 쉬겠다고 하면 얼마든지 허용할 용의(用意)가 있었고 그리 일러두기까지 했었다. 그런데도 위강은 단 한 번도 수련에 빠진 적이 없었다. 간혹 송운이 자리를 비우게 되는 날이 생겨도 송하와 둘이 대련을 하며 수련을 하곤 했다. 이처럼 대강하는 법도 없었으며 무엇을 하든 독하게 달려들었고 좀처럼 포기를 몰랐다.
송운은 위강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릴 적 부모님을 잃었다 하였던가? 어쩌면…… 그 아이가 나고 자라온 환경이 그렇게 바꿔놓은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송운은 조금은 씁쓸함과 안타까운 마음이 들면서도 그런 위강이 싫지 않았다. 가르치는 입장에서 열심히 배우려 하는 아이가 미워 보일 리 없지 않은가?
그렇게 몇 달 사이 무공을 배우면서 뼈마디가 자극을 받은 것인지 조금 작다고 느꼈던 키도 쑥쑥 자라나 보통 또래의 아이들과 비슷해졌다. 게다가 송운이 한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다.
‘문에도 제법 재능을 보이면서, 무에서도 타고난 무골까진 아니나 어느 정도 기질이 보인다라……. 하기야 머리가 좋으니 이해도가 좋고, 암기력도 괜찮은 편이니 무공을 배우는 데에도 무리가 없다.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질 않았구나. 어쩌면 조광이가 인복은 참으로 타고난 것일지도……. 허허.’
이제 겨우 배운지 몇 달이 되지 않는 시간을 보냈음에도 송운이 놀랄 만큼 속도가 붙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비록 이름을 크게 날릴 정도까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양조광만큼은 지켜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충분해. 그거면 된다.’
송운은 더욱 큰 욕심을 낼 생각은 없었다.
그저 자신이 아끼는 이들이 다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 작금 그의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나도 수련을 게을리하면 아니 되겠어. 이러다간 송하나 위강에게 따라잡힐지도 모르니. 허허.’
곧바로 송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일어날게. 조광아.”
“그리하시지요.”
송운의 말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안정된 것인지 양조광은 그를 향해 웃었고, 송운은 조금은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혹여 모를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을 새겨보며 수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그래서 우리의 도움은 필요가 없다, 그 말이오?”
“그런 셈이지.”
칠흑같이 어두운 밤.
창가에서 비치는 초라한 달빛에 몸을 기댄 세 명이 토의(討議)를 나누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의견을 나누기보다는 한쪽의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운 말들이었다.
그중 통보를 받는 이의 미간이 슬쩍 찌푸려졌다.
“어째서 우리가 그 말에 동의해야 한단 말이오?”
“……기껏해야 이곳에서 사람들 피나 빨아먹으며 목숨을 연명해나가는 너희가 송운을 죽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건가? 진 회주?”
그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한 밋밋한 음성이었으나 거의 오만에 가까운 자신감을 표하며 은근슬쩍 조롱하듯 말을 던지자 그 말을 들은 진흑창의 꽉 쥔 주먹이 탁자 아래에서 부들부들 떨려왔다.
‘감히 우리 흑랑회를 조롱해?!’
그런 그의 손을 조용히 잡아 누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주 총관이었다.
그런 주 총관과 진흑창의 눈이 순간 마주쳤고 오가는 말은 없었지만, 그는 단박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의 눈빛이 간절히 말하고 있었다.
‘참으셔야 합니다. 회주님.’
진흑창도 역시 알고 있다.
‘……크으윽. 분한 것은 사실이나 확실히 우리가 나서기엔 버거운 인물이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비단 그의 무위만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