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위험한 호기심이 그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넌 누구냐?”
그의 직감대로 송운은 이미 누군가 주변에 기운을 감추고 숨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흑랑회와는 복장이 달라 같은 무리인지 가늠이 되질 않아 물은 것이다.
“곧 죽을 놈이 말이 많구나.”
턱.
추능이 말을 끝내기 무섭게 송운을 향해 떨어져 있던 검들 중 하나를 자신의 손으로 쥐어 던졌다.
“무슨 짓이오?”
정확히 그것을 잡은 송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으나 추능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별안간 달려들었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다짜고짜 덤벼드는 건 똑같군.’
후웅-!
송운은 생각을 하기도 전에 검기가 실린 검이 그의 얼굴을 향해 다가오자 재빨리 피해냈다.
명백한 시비였다.
결국 송운은 그에 맞대응하기 시작했고, 서로의 검이 허공을 몇 번 갈랐다.
‘아까 그놈들과는 확실히 다르군. ……살수인가?’
내력을 갈무리해 은신해 있을 때부터 알아봤지만, 가벼운 실력은 아니었다. 게다가 검을 쓰는 방법이 살수들의 것과 비슷했다. 살수들은 보통 암기와 은신에 능할 뿐, 본디 검술이 강한 경우는 드물다.
‘자신이 검으로 상대방을 이길 수 있다는 착각을 할수록 그 자만심에 취해 허점은 더욱 늘어나겠지.’
송운은 바로 그 점을 이용했다.
채쟁!
카가가각!
송운은 몇 번 슬쩍 검으로 응수해주면서도 끊임없이 눈으론 놈의 허점을 훑었다.
그리고 순간 기분이 들뜬 추능의 복부에 자그마한 공간이 보였다.
‘찾았다.’
콰앙!
쩌저정-!
송운의 한방은 정확히 들어맞았고, 내력으로 잔뜩 둘둘 감싼 그것은 놈의 단전을 깨부쉈다.
“끄…… 끄아아악!”
그와 동시에 엄청난 고통으로 게거품을 물며 뒤집어 쓰러졌고, 사방을 뒹굴던 그는 끝내 기절하고 말았다.
“두 번 다시 죄 없는 이들을 괴롭힌다면 흑랑이고 흑견이고 다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전해라.”
송운은 유일하게 단전을 깨지 않은 놈을 향해 조용히 읊조렸고 죽은 척 쓰러져 있던 놈이 미친 듯 도망가자 지켜보던 문지기들을 향해 송운이 말했다.
“남은 놈들은 죄다 관청에 넘기도록 하세요. 다시는 못된 짓은 못할 겁니다.”
“예, 예!”
* * *
그 일이 있고 난 후, 또 며칠이 흘렀다.
“운 공자님. 손님이 드셨는데…….”
“누구인데 그리 뜸을 들이십니까?”
송운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주저하는 총관을 향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저 그것이……. 화령각주님 인지라…….”
“음…….”
송운은 그가 말한 이름을 듣고 나자, 총관이 왜 그리 머뭇거렸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우선 그녀를 들이라고 말했고, 곧 매영령이 얼굴을 드러냈다.
“……오랜만이네요. 송 대협.”
순간 보인 얼굴은 어딘지 모르게 초췌해 보였으나 그녀의 미색은 여전했고, 자신을 대협이라 칭했다.
송운은 어쩌면 다행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주억였다.
“오랜만이구려. 오늘은 어쩐 일로 이곳까지 발걸음을 한 것이오? 내 분명 두 번 다신 찾아오지 말라 했던 것 같은데 말이오.”
“우선은……. 송 대협께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예요. 덕분에 요즘은 흑랑회의 발길이 완전히 뚝 끊겼거든요. 그리고 이번엔 유혹하러 온 것도 아니니 제발 매몰차게 대하지 말아주셨으면 해요…….”
그녀의 힘없는 말투에, 송운은 더 이상 뭐라 할 수 없었다. 거기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은 틀림이 없었다.
한참을 송운이 말없이 기다리자, 매영령은 그것이 허락의 의미임을 깨닫고 마저 말을 이어나갔다.
“역시 제 생각대로 송 대협께선 인연도 없는 화령각을 위기에서 구해주고도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과 제가 한평생 거리에서 봐왔던 다른 남자들과 달리 한 여인만을 바라볼 수 있을 만큼 올곧은 사내라는 것도 잘 알았어요. 대신.”
“……대신?”
“그 크나큰 은공을 입은 몸이니, 송 대협께 도움을 드릴 기회를 주세요. 저를 안아달라거나 곁에 두어달라는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아요. 그저 화령각의 각주인 만큼, 은공을 입고도 모른 척하는 그런 사람은 되고 싶지 않으니까요.”
송운은 그런 매영령의 말을 단칼에 잘라내었다.
“그건 이미 헌현현의 정세를 많이 전해 들었기에 충분하오.”
하나, 이번에도 매영령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대신 하나의 부탁을 해왔다.
“잠시…… 주변의 모든 이들을 좀 물러주시겠어요? 매우 중요한 정보라서요.”
송운은 조금 당혹스러웠으나, 딱 한 번 더 그녀를 믿기로 하고 아예 주변의 기운을 차단시켰다.
“이제 되었소. 화령각주도 무공을 배웠으니 알 것이오. 주변이 어찌 변했는지. 하니 말해보시오.”
매영령은 주변에서 온몸에 느껴지는 기운에 안심했는지 고개를 주억이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 화령각은 그냥 기루가 아니에요.”
“그건 또 무슨 말이오?”
기루가 기루가 아니라니?
“말 그대로예요. 겉으로 보기에 화령각은 헌현현 내 최고의 기루죠. 하지만 하북성에서 가장 큰 화월문(和月門)이라는 정보 집단의 자금과 정보의 샘물이기도 하죠.”
송운은 이제껏 보인 적 없는 놀라움을 표했다.
화월문.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천조회를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송운은 각 성에서 가장 큰 정보 집단들을 조사했었다. 그런 송운인데, 화월문을 모를 리가 없었다. 화월문은 그녀의 말대로 하북성의 유일한 정보 집단이었다.
그렇게 놀라는 송운의 모습에 매영령이 다행이라는 어투로 물었다.
“송 대협께서도 이미 알고 계신 모양이네요.”
“이곳에서 있으면서 화월문을 모를 리가 없지 않소?”
“후후. 그렇다면 이야기하기가 훨씬 수월하겠네요. 송 대협께서 원하신다면 비공개 정보만을 제외하고는 총 열 번의 정보를 제공해드릴게요. 물론 기한은 정해져 있지 않아요. 후대에서 쓰시던 내일 당장 쓰시든 상관없어요. 화령각을 지키는 데 도움을 주신 분이니 말이에요.”
송운은 그녀의 말을 다 듣고 나자 깊은 고민에 빠졌다.
‘화월문의 정보를 총 열 번에 걸쳐 공으로 제공받을 수 있다라…….’
그것은 송운 본인뿐만 아니라 운양상단에게도 어마어마한 도움이 될 터다. 하지만 그렇기에 그것을 냉큼 받기엔 더욱 부담스러웠다. 혹여 또 이렇게 연줄을 만들어버린다면 그녀에게 일말의 희망이라도 남기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 것이다.
“하나 그 정도 은공에 이 정도의 보답은 너무 과한 것 같구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지금 화월문은 화령각을 통해 얻는 자금이 어마어마하죠. 하지만 그러면서도 흑랑회를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던 건 그들 또한, 이곳에선 독단적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헌현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사파이기 때문이죠. 그들과의 관계도 틀어져서 좋을 건 없거든요. 그러던 참에 송 대협께서 저희를 구해주신 것이구요.”
송운이 더 이상 말없이 조용히 있자, 매영령이 한마디 더 덧붙였다.
“제 성의를 봐서라도 이것만은 받아주세요. 제 의지만이 아닌, 이건 화월문주님의 허가 또한 받아온 것이니 확신을 드릴 수 있어요. 듣자 하니 운양상단의 본 주인이신 것 같은데……. 상단을 운용하는 데 있어서 정보는 정확하고 많을수록 도움이 될 테죠. 그리고…… 송 대협께서 걱정하시는 그런 일도 더는 없을 거고요.”
말을 잇는 그녀의 모습은 미소 짓고 있지만, 오늘따라 더욱 진중해 보였다. 오늘만큼은 여인으로서가 아니라 화령각주의 위엄이 어려 있었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그녀의 목소리와 표정에는 조금의 씁쓸함이 맴돌았다.
송운은 그중 매영령의 마지막 한마디에 뭔가 마음이 찔렸다. 자신의 생각을 정확히 들킨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내가 걱정하는 그런 일이 더는 없을 것이라 하더라도……. 이미 천조회가 있는데 굳이 그러할 필요가 있을 것인가?’
천조회의 존재였다.
이미 곧 북경을 벗어나 하북성으로 넘어오겠다는 서신을 받지 않았던가.
‘물론 작금의 천조회는 화월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이제 막 커가는 신생 정보 집단이긴 하지만…….’
송운은 잠시 감았던 눈을 떴다.
“생각할 시간이 조금 필요할 것 같소.”
매영령은 그의 반응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주억였다. 자신 역시도 아무리 은공을 입었다 한들 이 정도의 제안을 받는다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을 터다. 한 집단을 이끈다는 자리는 결코 함부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그런 가벼운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이해 못 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자리에서 곧바로 일어났다.
“후후. 역시 송 대협은 신중하시네요. 그럴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어요. 그럼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볼게요. 판단을 내리시거든 연통을 넣어주세요.”
달칵.
그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을 나갔다.
‘후우. 조광이와 상의를 좀 해보아야겠구나.’
* * *
송운은 매영령이 간 직후, 곧바로 양조광을 방으로 불렀다. 혼자서 판단을 내리기엔 조금 애매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운 공자님. 무슨 일로 부르셨는지요?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십니다.”
양조광이 하루 만에 초췌해진 송운의 얼굴에 걱정된다는 듯 물어왔다.
“아, 다름이 아니라……. 얼마 전에 내가 도와주었던 화령각주 말이야. 오늘 내게 찾아와서 도움을 주겠다고 했거든.”
“도움이라면?”
“은공에 대한 보답이라면서……. 혹시 조광이 너. 화월문이라고 알고 있어?”
송운의 물음에 양조광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였다.
“예. 헌현현에 자리를 잡고서도 화월문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하북성에서 유일한 정보 집단 아닙니까. 저뿐만이 아니라 하북성 웬만한 상단이나 표국, 문파들은 공공연히 다 알고 있는 곳이지요. 한데 그곳은 어찌……?”
“그 화월문이 화령각과 연계된 곳이라 하더라고. 정확히 말하자면……. 화령각이 화월문의 하위에 속한 곳이라고 해야 하나?”
송운의 말을 들은 양조광은 매우 놀랐다.
전혀 몰랐던 일이기 때문이다.
화월문은 이곳 최고의 정보 집단이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만큼 베일에 싸인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