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그 외에도 정세(情勢)와 수(數)에 밝고 자금을 운용하는 능력이 뛰어나 기루 안에서도 가장 높은 단계에 이르러 지금의 자리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이다.
해서 헌현현에서 그녀를 모르면 간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유명했다.
타고난 재능 때문에 어릴 때부터 수많은 남성의 시선을 받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하나 그럴수록 매영령은 마음을 쉽게 열지 않고, 도도하기로 소문난 여인이었다.
한데, 지금 그런 그녀가 한 남자로 인해 변하고 있었다.
사삭.
조용한 각주실 안.
홀로 차를 음미하고 있던 매영령의 기감에 누군가 감지되었다.
‘역시 빠르군.’
그에 대답하듯 차분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각주님. 주하입니다.”
“그래, 말한 것은 어찌 되었느냐?”
매영은 당연한 듯 그녀에게 물었고 이내 차분히 정리된 목소리로 답이 들려왔다.
“역시나 소문대로 그 무위가 뛰어난 자라 합니다. 이미 황궁에서 그 실력을 인정받아 공을 세운 몇 건의 전적이 있습니다. 일 년 전 있었던 무황비고의 사건 때에도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때, 홀로 살아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운양상단과는 어떠한 관계더냐?”
“운양상단역시 송운이란 자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단주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글동무이자, 단주 스승의 아들이라 합니다. 정확히는 하남성 평여현에 있는 송주촌에서 약 이십 년을 살다가, 지금은 북경으로 거처를 옮긴 상태입니다. 말로 풀기에는 꽤나 많은 정보이기에, 글로 한 번 더 정리해 두었습니다. 읽어보시지요.”
“흐음……. 고생했구나. 우선은 돌아가 보거라.”
“예, 각주님.”
스슥.
주하가 사라지고 또다시 홀로 남은 매영령은 그녀가 전한 서신을 차분히 살펴보았다.
‘으응?’
한데, 한 줄 특이한 사항이 있었다.
대대로 내려오는 학사가문 출신. 현재 아버지인 송악은 황궁에서 일하는 중이며, 송운 본인도 향시까지 합격한 전적이 있음.
그저 무인으로서만 알려져 당연히 무인 집안이리라 생각했던 그녀의 짐작과는 달리 학사가문이라는 말은 생소한 충격이었다.
매영령은 두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졌다.
‘아무리 봐도 학사처럼 보이진 않는데 말이지. 하긴……. 운양상단의 단주 스승의 아들이라 하였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송운의 모습을 떠올렸다.
화악.
‘뭐, 뭐야?’
매영령은 갑작스러운 홍조에 자신도 놀랐는지, 깜짝 놀랐다. 그동안 그녀는 남자는 모두 성욕에 눈이 먼, 그저 돈벌이에 불과하다며 생각하고 살아왔다. 그랬기에 더더욱 모든 일에 다른 여인들보다 냉정하게 판단하고 처리할 수 있었다.
한데, 왜?
송운을 떠올리니 얼굴이 발그레해진 것인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해서 자신 스스로를 다른 이유로 납득시켰다.
‘……뭐, 그 정도면 잘생기긴 했지.’
그녀의 말대로 분명 송운이 못난 얼굴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무리 보아도 학사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그의 모습은 칠 척 정도 되어 보이는 키에 다부진 어깨와 몸.
그리고 여린 듯하면서도 남자답게 생긴 얼굴은 제법 여인네들의 마음을 흔들기엔 충분했다.
‘너무 오랜만에 이런 남자를 봐서 이러는 거야. 정신 차리자.’
간신히 몸과 마음을 진정시키며 그렇게 또 며칠이 흘렀다. 하나, 며칠이 흘러도 송운을 떠올리면 얼굴이 발개지는 건 물론이고, 이젠 심장마저 두방망이질을 치는 것이 아닌가?
“……님? 각주님?”
“으, 응? 그래. 어디까지 했더라?”
“여기까지 하셨어요. 요즘 들어 유독 안색이 좋지 못하세요. 얼굴이 계속 발간 것이……. 어디 몸이 안 좋아지신 것 아니에요?”
앞에서 그녀와 함께 얘기하던 부관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자, 매영령은 다급히 그녀를 물렸다.
“그런가 보구나. 열도 좀 나는 것 같고…….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돌아가 보거라.”
“약이라도 지어 올릴까요?”
“아니다. 그 정도는 아니야. 혼자 있고 싶구나.”
“휴우……. 알겠습니다.”
부관을 돌려보낸 매영령은 홀로 사색에 잠겼다.
아니, 정확히는 송운을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정말 왜 이러는 거지?’
이쯤 되면 중증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젠 시든 때도 없이 그의 목소리와 얼굴이 떠올랐다.
‘스치듯 잠시 본 얼굴이 이리도 기억에 남을 수 있는 건가? 설마……. 아니겠지.’
매영령은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연모해 본 적이 없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천애 고아의 몸으로 스승의 손에 길러졌던 그녀에겐 그것만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방식이었다. 열넷의 나이에 스승조차 숨을 거두고 의지할 곳 하나 없이 살아야 했기에.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 순간, 많은 것을 포기하게 될 것이라 하셨지.’
예전 무공과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었던 스승님이 죽기 전 자신에게 남겼던 말이다.
‘그리고……. 그리해도 정녕 좋다면 놓지 말라고도 하셨지. 하지만…….’
만약 자신의 착각이라면?
만일 이것이 정녕 사랑이라 한들, 그가 받아주지 않는다면?
“주하야.”
매영령이 주하를 부르자 순식간에 자신의 곁에 나타났다. 특별한 일이 없거든 늘 자신의 곁을 맴도는 그녀였기에 가능했다.
“부르셨습니까.”
“네가 보아도 내가 연정(戀情)에 빠진 것 같니?”
“……저 또한 누군가를 사모해본 적은 없는지라……. 확신을 할 수는 없지만 요즘 각주님의 모습을 보면 이상한 점이 많긴 합니다.”
“이상한 점?”
매영령은 의아한 눈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예전에는 없던 멍하니 계시는 시간이 많이 느셨습니다. 또한 아무도 없는데 홀로 웃곤 하십니다.”
어찌 보면 정신 나간 여자처럼 보일 수도 있을 테지만, 매영령은 알 수 있었다. 송운을 떠올릴 때마다 자신이 했던 행동이라는 것을 말이다.
‘인정할 수밖에 없는 건가…… 하아.’
더 이상은 부정할 수 없었다.
결국, 그녀는 그것을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
* * *
송운을 향한 마음을 인정한 매영령은 애가 타기 시작했다.
생전 그녀가 보아왔던 남자들은 죄다 자신의 외모만을 보고 마음을 주는 것보다야 하룻밤의 정사만을 원했다.
한데, 송운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도움만을 준 채, 그대로 사라졌고 화령각에 오면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 번 다시 자신을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차라리 그랬더라면 몸이라도 내어주었을 텐데…….’
그녀는 예전이라면 상상하지도 못했을 일까지도 떠올렸다.
그러니 더더욱 송운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직접 찾아가 봐야겠어.”
결국 그녀는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하기로 결심했다.
촤락.
매영령은 자신이 가진 최고로 아름다운 옷을 입고, 가장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고혹적인 화장을 하고 향을 뿌렸다.
그렇게 그녀는 운양상단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운양상단에 도착한 매영령은 생각보다 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얼마 전 있었던 그 일을 계기로 송운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전하기 위해서 직접 온 것이라 전했기 때문이다.
‘예전의 나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일 테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를 보는 건 어려울 테니까.’
매영령은 다시 한번 자신의 옷매무새를 다듬고 설레는 마음으로 그의 방으로 향했다.
똑똑.
“운 공자님. 화령각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음? 들어오라 이르세요.”
이내 문은 열렸고, 눈앞에는 정갈한 복장으로 책을 읽고 있던 송운의 모습이 보였다. 그토록 그렸던 그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또다시 두방망이질을 치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후우……. 진정하자. 매영령.’
그러곤, 먼저 인사를 건네었다.
“오랜만이어요. 송 대협.”
하나, 그녀에게 들려온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그렇구려. 그때, 감사의 인사는 충분히 받은 것 같소만……. 여긴 어떤 일로 찾아온 것이오?”
달그락.
어느새 시녀가 내온 찻잔을 들며 말하는 송운의 냉정하리만큼 싸한 그 말은 벌써부터 매영령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어찌 보면 그에겐 자신의 존재란 그저 지나가다 구해준 여인일 뿐,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아니, 이름이라도 기억을 하고 있을까?
‘진정해. 나답지 않아.’
매영령은 마음을 다시 가다듬고 말을 이었다.
“그땐 제가 너무 경황이 없었던 터라 제대로 인사를 전하지 못한 것 같아서요.”
그러나 여전히 송운의 반응은 똑같았다.
“……각주께서 정 그리 생각한다면, 후일 화령각에 들리거든 술이나 한잔 기울이면 좋겠구려.”
매영령은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정녕 그것뿐인가요? 다른 그 무엇도 원하시지 않나요?”
“그렇소. 화령각주께선 무언가 더 필요한 것이오?”
송운의 말속에서는 그 어떠한 다른 의미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순히 정말 술 한 잔이 마시고 싶던 것이다.
결국 매영령은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정말 묻고 싶었던 말 한마디를 꺼내었다.
“휴우……. 하면 송 대협께선 그날 어째서 저를 도와주신 건가요? 그냥…… 지나가셔도 됐을 텐데요.”
입술을 꼭 깨물며 말하는 매영령의 말속에는 왠지 모를 원망이 깃들어있었다.
어찌 사람이 이리도 매정하단 말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단호한 송운의 모습에 점점 마음이 초조해졌다.
“무를 배운 이가 협을 무시할 수 없었소. 해서 도와준 것뿐. 그 어떠한 의미도 없었소만……. 오해의 소지가 있었다면 미안할 따름이오.”
송운의 대답에 매영령은 허탈감이 몰려왔다.
‘역시 별 의미가 없었던 거야. 하지만……. 여기서 그만두기엔 내 마음이 이미 너무 많이 커버렸는걸.’
짧은 순간이었지만, 처음 느껴본 감정에 기름에 불이 붙는 것처럼 빨려 들어간 감정이었다.
매영령은 입술을 꾹 깨물며 말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 볼게요.”
그날 이후, 매영령은 포기하지 않고 매일 그를 찾아왔다. 매일같이 얼굴을 보게 되면 혹시라도 자신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까 싶은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이어진 발걸음은 한동안은 도움을 받은 대가로 주변의 정세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함이라며 이유를 댔기에 송운 역시 그녀의 방문을 받아들였지만, 점점 날이 갈수록 찾아오는 일이 빈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