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곱게 뻗은 속눈썹과 매끄럽게 떨어지는 목선.
풍만한 가슴과 그와는 대조되는 가는 허리에 금방이라도 사내를 잡아먹을 것 같은 색기 어린 두 눈과 새빨간 입술은 보는 사내를 절로 감탄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는 문득 몇 해 전 보았던 색마가 떠올랐다.
‘뭐, 놈은 여인이 아닌 사내였지만.’
그 정도로, 만만치 않은 미색을 갖춘 여인이었다.
한참을 송운이 멀찍이 지켜보는 가운데 차마 아무도 나서지 못하자, 점점 그 사내의 언행과 목소리는 거칠어져만 갔고 여인의 표정은 그와 반대로 굳어만 갔다.
아무도 모르게 입술을 꼭 깨문 여인이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 목소리에는 달콤한 꿀처럼 묘한 달콤함이 담겨 있었다.
“조금만. 정말 조금만 더 시간을 주시면 이번엔 꼭 드리겠어요. 그러니…….”
하나 그러한 여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내가 먼저 말을 끊어내고선 자신이 할 말만을 이어나갔다.
짜악!
“이젠 지겨우니 닥치거라! 그 말만 벌써 몇 달이 걸렸는지 모르겠구나. 기다리고 있었다가 상부에게 몇 번이나 깨지고 왔다는 것을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느냐?! 이 정도의 규모를 운영하면서 돈을 내놓을 능력도 되지 않는다면 감당하지도 못할 것 화령각 따위는 내게 내놓고 이 너른 품에 와서 아양을 떨며 안겨 사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지금까지 버텨온 것을 생각하면 네년들의 행보가 괘씸하나 그리하겠다면 내 바다처럼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 주마. 크큭.”
어느 마을에나 가면 꼭 하나쯤은 있는 자릿세에 대한 논쟁이었지만, 어느새 사내의 두 눈에는 돈에 대한 욕심보다 더러운 음심으로 두 눈동자를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송운은 그 모습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뺨을 맞은 여인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자신은 비록 정파에 속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협을 멀리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눈에 저런 불한당의 모습이 곱게 보일 리 만무했다.
‘이미 이런 꼴을 당한 지 꽤 오래된 듯한데…….’
송운의 생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헌현현에 딱히 이렇다 할 큰 정도의 문파가 없는 곳이다 보니 제재를 가하는 이들도 없어 한번 횡포를 부리기 시작하면 원하는 것을 얻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놈들이었다. 이미 이곳에 자리 잡은 사파 중 가장 큰 규모를 가지고 있던 놈들인데, 일대에서 다른 음각 지대를 모두 자신들의 품으로 끌어들이면서 그 만행 또한 점점 심해져 화령각까지 손을 뻗은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화령각주가 목표였다.
그 연유를 아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화령각이라는 기루의 기녀들로 보이는 이들은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쩔쩔매며 그저 조그맣게 귓속말로 중얼거렸고, 그것은 가만히 서 있던 송운에게도 들려온 것이다.
“어디서 저런 미친놈이 우리 각주님에게 빠져서는…….”
“언니, 그럼 우리 정말로 저놈들한테 넘어가는 거여요? 흑흑……. 어쩌면 좋아? 우리 각주님…….”
“……하면 어쩌겠니? 무슨 수로 매달 배로 불어나는 자릿세를 내란 말이야? 누가 확 저놈들 혼쭐 좀 내주었으면 원이 없겠지만…….”
송운은 이쯤 되니 자신의 일이 아님에도 화가 솟구쳤다. 아무리 자릿세를 받는 것이 그들만의 관례라 한들 이것은 해도 해도 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더는 못 들어주겠군.’
송운은 결국 슬쩍 사내의 곁으로 빠르게 다가가 멀리 떨어뜨렸다.
퍼억!
“크악!”
* * *
우당탕탕!
사내는 갑작스럽게 당한 봉변에 순간적으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날을 위해 몇 달을 공을 들였다.
한데 잘 되어가던 상황에 대체 누가 감히 자신을 건드린단 말인가?
휘청거리는 몸을 일으킨 그의 눈앞에 웬 무복을 입은 청년이 떡하니 서 있었다.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덩치도 작고 잘난 건 없어 보였으나, 단지 딱 하나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었으니…….
‘검과 무복?’
그는 혹시나 이 주변을 지나가던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사람이 아닌가 하는 마음에 눈알을 굴려 가며 가슴팍을 살펴보았으나, 다행히도 그 어떠한 표식도 있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그저 혈기 왕성한 청년이 지나가다 미인이 당하고 있으니, 마치 자신이 영웅이라도 된 마냥 행동한 것이리라.
자신 또한 화령각주에게 반해 이러한 계획을 세웠던 것이 아니던가?
지금 이 상황에서 자신이 꿀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렇게 생각을 마친 사내는 얼굴에 미소를 띠우며 기세등등하게 소리를 쳤다.
아니, 치려 들었다.
주룩.
순간 자신의 코에서 무언가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곤 옷소매로 스윽 훑더니만 그것이 피라는 것을 알고 기겁한 것이다.
“코, 코피? 네 이놈! 내가 대체 누구인 줄 알고!”
하나, 그러한 자신의 호령에도 청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무표정으로 응해왔다.
“누구 이긴 누구겠느냐? 넘쳐나는 성욕을 주체 못 하고 여인들이나 괴롭히는 파렴치한이 아닌가? 적어도 내 눈에는 그리 보였는데 말이지.”
직설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집어내자 사내는 눈이 뒤집혔다.
스르릉.
“이노오옴! 내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검을 뽑아 들고선 무서운 기색으로 달려들었고, 청년의 코앞까지 다가간 순간.
그는 직감했다.
놈은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퍼억!
하나, 스스로의 직감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도 맞은 것은 청년이 아닌 자신이었다.
심지어는 보이지도 않았다.
‘이게 대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야? 호, 혼령에라도 씐 것인가?’
퍼버버벅!
퍽퍽!
그렇게 머리를 빠르게 굴리고 있는 사이 청년은 검을 뽑지도 않은 채 마저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고, 그는 온몸에 피멍이 들어 처참한 몰골이 될 때까지 맞고 또 맞아야 했다. 더 억울한 건 그렇게 맞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당연한 인과응보였지만.
“그, 그만! 제발 그, 그만 하거라! 아니 그만하시오! 으흑흑!”
“……내가 여기서 멈춘다면 앞으로 더는 저 여인들은 건들지 않을 것이라 약조하겠느냐?”
“예, 예. 그리하겠습니다! 제발 그러니…… 자비를! 컥! 쿨럭……!”
이내 그는 눈물 콧물을 있는 대로 다 짜내며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울기 시작했고, 그제야 송운은 손속을 거두어들였다.
그러자 사내는 언제 빌었냐는 듯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성치 않은 몸을 이끌고선 처량하게 저 멀리 사라져갔다.
“내, 네놈을 절대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라며 말이다.
* * *
‘가만두지 않겠다는 놈치고 무서운 놈은 못 봤지.’
송운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음? 한데…….’
송운의 오감에 수많은 시선이 느껴졌다.
주변을 둘러보자 웬 무인이 나타나면서 순식간에 정리된 상황에 어안이 벙벙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송운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
아까 그 여인이 자신에게 다가와 차분히 고개를 숙였다.
“모두를 대표해서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정말이지 큰 은공을 입었습니다. 저는 화령각의 각주 매영령(梅瑛玲)이라 해요.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희를 구해주신 대협의 존함을 여쭈어도 되겠는지요?”
“……송운이라 하오. 대협이란 말은 과하오. 딱히 감사의 인사를 받으려 나선 것은 아니니. 다만 저놈의 행실이 영, 보기 좋지 않아 그러한 것이니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그러한 송운의 말에도 여인은 좋지 않은 안색으로 말을 이었다.
“연유가 어찌 되셨건 저희를 구해주시지 않으셨나요? 전혀 낯이 익지 않은 존함과 안면이신 걸 보니 외지인이신 듯한데……. 방금 저 사내는 이 지역에서 가장 악명 높은 사파인 흑랑회(黑狼會)에 속한 이예요. 저희야 감사하지만 혹 송 대협께 폐를 끼칠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군요. 지금은 한 명이지만 놈들이 다수로 몰려온다면 송 대협이라 하신들 위험해지실지도 몰라요.”
송운은 그 말을 들으며 한숨만이 흘러나왔다.
‘후우……. 대체 악한 일을 하는 놈들은 죄다 흑이란 단어를 왜 이리 좋아하는지 도무지 모르겠구나.’
“나는 괜찮소. 혹여 놈이 복수를 위해 다시 찾아오거든 내가 있는 곳으로 오라고 일러주시오. 나는 지금 운양상단에 머물고 있소.”
말을 마친 송운은 여인들을 뒤로한 채 발걸음을 돌렸다.
“어머, 송 대협! 그냥 가시려고요?”
“술이라도 한잔 받고 가시지 않구요.”
이에 고맙다며 몸매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옷에 더욱 강조시키며 자신의 곁에 들러붙는 기녀들의 틈 속에서 송운은 눈 한번 주지 않은 채 유유히 빠져나갔다.
그렇게 일말의 지체 없이 가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모두 멍하니 쳐다만 보아야 했다.
화령각주이자 매영령이라 밝힌 여인만이 두 눈을 반짝이며 빛낼 뿐.
“운양상단에 머물고 있는 송운 대협이라……. 주하야.”
그녀가 주하라는 이름을 부르자 어디선가 어두운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예, 각주님.”
“좀 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성이 있을 것 같구나.”
“그리하겠습니다.”
스르륵.
그러곤 그녀의 말에 대답한 후, 처음 나타났던 것과 같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 * *
이 일이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문은 순식간에 입에서 입을 타고 널리 퍼졌다. 지켜본 이들의 입과 화령각에 드나들던 이들이 마치 영웅담을 펼쳐놓듯 풀어내는 얘기를 곳곳에 전했던 덕이다.
“이번에 화령각을 구해준 그 송 대협이라는 분이 운양상단 사람이시라면서?”
“정확히는 단주님의 친우이자 상관? 뭐 그런 사이라고 들었네. 하면 이거 정말 우리 헌현현에 복이 아닌가? 윗물이 맑고 아랫물 또한 맑으니, 이 어찌 대단한 일이 아닌가!”
“껄껄! 그러게 말이야. 받은 은공이 많거늘 그놈을 직접 나서 혼쭐을 내주었다고 하니 내 속이 다 시원하던 참일세.”
“드디어 우리 헌현현에도 꽃이 피려 나보이. 좋은 일이야. 잘된 일이고말고. 암!”
은연중 송운이 운양상단 사람이라는 것까지 알려지면서 상단의 위상이 또 한 번 크게 하늘을 향해 솟구쳤다.
* * *
매영령은 올해로 스물셋으로 화령각의 각주이면서 미색 또한 뛰어났다. 그날 송운이 본 색기는 어릴 적부터 타고난 그녀의 매력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