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사사삭.
서걱.
송하의 검이 여러 개의 나뭇잎을 절반으로 갈라냈다. 팽글팽글 돌며 떨어지던 그것은 힘없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후우 후우…….”
그녀는 그것을 보고 나서야 잠시 숨을 고르려는 듯, 검을 멈추었다.
벌써 며칠째 이어지고 있는 반복적인 일상이었다.
‘……겨우 이 정도에 만족할 수 없어. 누구나 할 수 있는 수준으론 오빠에게 도움이 되지 않아.’
물론 검을 익혔다고 해서 모두가 할 수 있는 경지는 아니었으나, 그날 보았던 송운의 모습을 떠올리면 이것은 작은 점에 불과했다.
이번 일로 인해 무림이라는 세상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뼈저리게 각인된 것이다. 눈앞에서 칼끝이 자신을 향하는 데도 공포감에 온몸이 마비되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 얼마나 무기력한 모습이란 말인가?
‘내가 더 강해져야 해. 그래야 오빠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수 있어.’
그녀는 아직까지도 자신으로 인해 송운이 다치게 되었다는 것을 떨칠 수가 없었다.
‘만일 내가 도움이라도 되었더라면……. 아니 거치적거리지만이라도 않았더라면……!’
그때만이 아니었다.
벌써 몇 해 전 일이지만, 집에 화마가 들이닥쳤을 때도 송운 홀로 싸우다 팔에 상처를 입지 않았던가?
송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그 새빨갛고 앙증맞은 그 입술에선 붉은 선혈이 타고 흘러내렸으나, 그런 것 따위는 신경을 쓸 겨를도 없다는 듯 또다시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검파를 꽉 움켜쥐었다.
여름의 뜨거운 뙤약볕이 그녀를 괴롭혔지만, 힘에 겨워 지칠 때마다 그날의 광경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간 무공을 배워왔던 마음이 즐거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면 이것은 그것과는 다른 독기였다.
송하의 눈빛이 순간 빛이 났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어.’
다시 시작된 송하의 수련은 해가 지고 저녁 시간이 될 때까지도 멈출 줄을 몰랐다.
* * *
시간이 흐르면서 완전히 몸을 회복시킨 송운은 운양상단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헌현현에 처음 온 날도 느꼈으나, 운양상단에 대해 사람들의 인식은 꽤나 후했다. 이게 다 그간 양조광이 힘든 상황에서도 사람들에게 덕을 베푼 덕분이었다. 그러한 노력이 존재했기에 이 년 만에 이 정도의 위치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던 것이리라.
‘아니, 어쩌면 그것은 조광이의 인품이겠지.’
지금 운양상단에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그것들이 모두 되돌아오면서 끊임없이 계속해서 운양상단은 몸을 부풀리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몇 달 안에 헌현현에서 가장 큰 상단으로 성장할 터다.
송운의 입가에 어느새 훈훈한 미소가 걸렸다.
천조회의 일 또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얼마 전 천조회에게 온 답신을 송운은 떠올렸다.
‘아직까진 별다른 충돌 없이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다고 했지. 하북성으로 조만간 넘어온다고 하니, 그쪽도 지금은 딱히 걱정거리가 없을 테고…….’
운양상단이 커가면서 벌어들이는 돈은 꽤나 막대했다. 반 토막이 났던 자금은 지금은 그에 비할 것도 없을 만큼 불어난 상태였다.
그렇게 되면 천조회의 운용자금 또한 빠르게 지원이 될 것이다.
‘이렇게만 진행된다면야 흑야 또한 어쩌면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점점 꺼져갔던 희망의 불씨가 살아나는 듯했다.
정확히는 흑야의 목적을 알아내는 것이 가장 큰 관건이었다. 어째서 자신들을 공격했는지, 위협한 것인지 그 모든 것들을 알아내야 했다.
‘심지어는 명도의 집안과도 연관이 되어있었지 않은가?’
단지 그것만 막았을 뿐인데도, 회원장가가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그걸 생각해서라도 앞으로 어떻게 벌어질지 모르는 더 큰 화를 막기 위해서는 흑야를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急先務)였다.
장명도의 일을 떠올리자 송운의 뇌리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그래! 어쩌면 마교와 흑야가 긴밀한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급작스럽게 회원장가가 마교의 끄나풀로 몰려 멸문을 당했고, 후일에 알고 보니 그것은 마교의 은밀한 계획이라 했다. 한데, 자신이 직접 찾아 나섰을 때는 흑야와의 관련이 있었지 않은가. 비록 마교의 마기는 전혀 찾지 못했지만, 이 또한 배제하기엔 찝찝한 무언가가 있었다.
‘몇 년 전 일이라 그간 생각도 못 했던 일인데 이제야 기억이 나다니…….’
송운은 최근 들어 무언가 주어진 실마리들이 조금씩이라도 풀려나가는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슬쩍 좋아졌다.
그렇게 한참 홀로 생각에 빠져있을 그때, 송운의 곁에 며칠 전 양조광이 소개시켜 준 아이가 스쳐 지나갔다.
그는 잠시 위강을 빤히 쳐다보았다.
양조광에게 듣기론 글을 조금 읽을 줄 알아 자신이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했다. 거기에 성격도 싹싹하여 운양상단의 분위기를 띄우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데다 눈치도 빨라 원하는 것이 있으면 곧장 준비할 줄 아는 아이다.
‘볼수록 마음에 드는 아이구나.’
무엇보다 송운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이의 체구였다. 적당히 붙은 살과 근육은 생활 속에서 나온 것이지만 제법 근골이 잘 잡혀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게 그것이 자꾸만 송운의 눈에 밟혔다.
‘무공을 한번 가르쳐 볼까?’
아직 나이도 어리니 무공을 배운다면 약골이 아닌 이상에야 어느 정도의 선까지는 무리 없이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송후가 그렇듯 말이다.
‘조광이의 곁에 달라붙어 있는 아이이니, 가르쳐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운양상단이 커가는 속도에 비해 이곳엔 무사가 극히 적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영에 지장이 그다지 없는 것은 아직 운양상단이 헌현현에 한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지역 사람들의 인식이 좋으니 딱히 누군가 건드릴 생각을 못 하고 있는 것일 테지.’
하지만 그것은 너무 한정적이다.
언젠가 헌현현을 벗어나고 하북성을 벗어나 중원 곳곳으로 커나갈 것을 생각한다면 호위무사를 고용하는 건 당연지사다.
‘어차피 앞으로 그 정도에 이르려면 수년에서 십수 년은 더 걸릴 터. 그 사이에 저 아이가 무공을 익힌다면 조광이에게도 저 아이에게도 훨씬 좋겠지.’
송운은 위강에게 전해주면 좋을 만한 무공을 물색해나가기 시작했다.
‘무엇이 좋을까……. 어렵지 않으면서도 적당한 것이.’
한참 동안 머리를 굴리던 그는 문득 예전에 자신이 송후에게 가장 처음으로 가르쳤던 삼극권을 떠올렸다.
그것도 그냥 삼극권이 아니었다.
송운이 질풍무를 깨닫고 난 후, 초식의 장벽이 사라지면서 그것을 몇 단계 더 끌어올려 개편(改編)시킨 새로운 삼극검이었다.
송운은 지나가선 위강을 불러 세웠다.
* * *
“위강아. 바쁜 일이냐?”
위강은 송운의 부름에 곧장 가던 걸음을 멈추고 쪼르르 달려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아, 운 공자님. 아닙니다. 혹,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별다른 일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네게 묻고 싶은 것이 있구나.”
“예, 말씀하시지요.”
“혹시 무공을 배워볼 생각이 있는지 해서 말이다.”
“예에?”
위강은 놀랐는지 화등잔만 해진 두 눈망울을 그저 끔뻑거리며 재차 물어왔다.
“시, 실례합니다만 공자님. 무공이라 하심은……?”
“그래. 네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다.”
“아닙니다. 저는 지금 글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어요. 그것도 무공은 지체 높은 문파에서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하하. 네가 그리 생각하는 것도 이상할 것은 아니구나. 아니다. 무공이라 함은 누구든 배울 수 있으나 단지 가전(家傳)으로 내려오는 것들이 발전하고 발전하여 더욱 강함이 빛을 발하여 사람들의 인식이 그리 박힌 것뿐이지. 해서 너에게 부탁을 하고 싶구나. 조광이는 무공을 모르니 늘 곁에서 지켜주는 네가 배워두면 언젠가 꼭 도움이 될 것 같아 묻는 것이다.”
송운의 말에 위강의 눈빛이 흔들렸다.
“저, 정말 저도 무공을 배울 수 있는 건가요?”
“물론이다.”
‘단주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야……!’
한참을 고민하던 위강은 이내 결심했다는 듯 진지해진 표정으로 송운에게 말했다.
“저, 그 무공이란 것 배울게요! 잘 부탁드립니다. 운 공자님!”
송운은 위강의 모습에서 불타오르는 의지를 보았다.
‘허허. 역시.’
송운은 이미 예상하였던 모습에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양조광이라면 자다가도 껌벅 죽는 아이이니 아마 못해도 몇 년 내에 라면 일류고수까지는 성장할 것이다.
위강은 앞으로 엄청난 고통과 시련이 찾아올지도 모른 채, 해맑은 웃음을 머금었다.
第十章. 매영령(梅瑛玲)
송운이 운양상단에 온 후 어김없이 하는 하루 일과 중 하나인 주변을 거닐던 도중이었다.
‘오늘은 조금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나가볼까?’
그동안은 가까운 주변만 둘러보았던 그이기에, 슬슬 범위를 넓혀보자는 취지였다. 어찌 보면 그저 노니는 것처럼 보일 테지만 그러면서 주변의 상황을 파악하러 다니는 것이었다. 혹여 있을 흑야의 흔적도 찾을 겸 말이다.
그렇게 얼마만큼을 벗어났을까?
운양상단의 건물이 보이지 않을 때 즈음이었다.
거리가 제법 있는 곳이었으나, 주변의 소란스러움은 송운의 귓가에 고스란히 전해졌고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웬 험상궂은 사내가 한 여인을 향해 소리를 치고 있었다.
“무슨 구경거리가 생겼다고 동네방네 다 쳐다보고 있는 것이야? 저리 썩 꺼지지 못해! 내가 네년 때문에 제 명에 못 살겠구나!”
언뜻 내력을 살펴보니 여인도 꽤나 무공을 익힌 모양이나, 듣고만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사내놈이 그보다 두 수는 더 위의 고수였기 때문이다.
특히 그 우락부락한 사내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운은 기분 나쁜 느낌의 그것이었다.
‘보아하니, 사파 쪽에서 나온 놈이나 되지 싶은데……. 저리 기세등등한 표정과 기운을 내뿜는 것이 뒷전을 받으려는 모양이군. ……아니면 몸을 받으려 하거나.’
굳이 그 속내를 들여다보지 않아도 사내와 대적하고 있는 여인의 외모는 웬만한 미인들 뺨을 칠만큼 아름다웠기에 그 정도야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뛰어난 미색에 색기까지 더해지니, 마치 마공을 익혔다 한들 믿을 수 있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