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아직은 성인이라 부르기엔 어린 나이 열여섯.
태어나 처음으로 살기 어린 칼끝이 자신의 목을 향했고, 사람의 죽음을 목격하고, 세상의 무서움을 깨달았다.
집을 벗어나 바깥세상으로 데리고 나오면서 어느 정도 각오를 한 부분이건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갑작스러운 흑령의 등장은 송운 역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부분이고, 만일 알았다면 절대로 동행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도 당시 송하의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리던 감각이 그의 손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송하가 부디 잘 견뎌주어야 할 터인데……. 역시 괜히 데려온 것인가?’
어쩔 수 없이 떠밀려오는 자책감이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그렇게 한참을 생각에 빠졌을까?
송운은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이미 지나간 일이요, 겪어버린 일이다. 후회하지 말자.’
송운은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경험과 성장은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스스로 견뎌내야만 한다. 그걸 겪고 나면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살아가면서 세상의 밝고 좋은 면만 바라보며 살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렇기엔 사람에게 주어진 삶은 양면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
게다가 흑야와 마교라는 거대한 벽은 앞으로도 송운과 가족의 인생에 끊임없이 관여하게 될 것이다.
당하지 않으려면 강해져야 한다.
그렇다면 보지 않는 법을 가르치기보다는 맞서 싸울 수 있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할 터다.
이 역시 그녀의 운명이고 시련이리라.
‘내 동생은 그리 약하지 않을 것이야. 전생에도 꿋꿋이 버텨 살아남은 아이가 아니더냐? 송하를 믿자. 사람은 믿는 만큼 해내는 법이다.’
* * *
각자 휴식을 마치고 나온 송운과 송하는 잘 차려진 밥상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마치 온갖 산해진미가 다 모인 것 같은 상은 다리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언제 이렇게 많이 차린 거야?”
송운은 평소 그의 검소한 식단을 잘 알기에 자신과 송하를 배려하여 그가 특별히 준비한 것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중에서도 유독 송하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이 눈에 띄었다.
“정말 오랜만에 다 같이 하는 식사가 아닙니까? 더구나 오는 길 많이 힘드셨을 텐데 이럴 때일수록 든든히 챙겨 드셔야지요.”
“이거 괜히 우리가 와서 네가 고생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하. 고생이야 숙수 분들이 하시는 것이지요. 전 정말 괜찮으니 많이들 드세요.”
“그럼……. 맛있게 잘 먹겠습니다.”
송하의 말로 시작된 저녁 식사는 양조광과 송운이 주고받는 말로 시끌벅적했다. 오는 길에 있었던 일을 간략히 풀어놨음에도 이 년 만에 보는 둘의 이야기는 꽤나 길어졌다.
“……해서 그렇게 된 거야.”
“허, 이리 살아 돌아오셨으니 천만다행입니다. 괜히 저 때문에 이곳까지 오시는 바람에…….”
양조광은 이것 또한 자신의 탓이라는 듯 스스로를 책망했고, 송운은 아니라며 그를 달랬다.
“아니야. 굳이 그때가 아니었더라도, 북경에 있었다 하더라도 언제든 습격해 와도 이상하지 않을 놈들이지. 해서 천조회도 열심히 찾고는 있는데……. 쉽지가 않아. 여긴 그간, 별일 없었어?”
“예……. 아직까진 딱히 이렇다 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네. 너라도 무사했으면 됐다.”
한참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끊이지 않는 이야기 속에서 식사를 마친 송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오랜만에 기쁨의 회우를 가진 두 사람의 대화는 해가 떨어지고 달이 높게 뜰 때까지도 이어졌다.
* * *
풀썩.
길고 긴 이야기를 마친 송운은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안내받은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도착함과 동시에 힘없이 침상에 드러누웠다.
양조광과 송하의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보였으나, 막상 혼자가 되니 누적된 피로와 내상의 고통이 찾아온 것이다. 송운은 곧 몸을 일으켜 운기조식을 펼쳤고, 서서히 여기저기 날뛰던 내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러자 찌푸려졌던 그의 미간도 서서히 다시 펴졌다.
‘검은 복면의 사내……. 생각을 정리할 필요성이 있겠구나.’
그는 그간의 일들을 차근차근 머릿속으로 정리해 나갔다. 북경을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치 기다렸다는 듯 흑야와 관련 있는 이가 나타났다. 이로써 흑야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게 아니라는 생각에 확실한 근거가 생긴 것이다.
‘그동안 북경만 찾아보고선 정녕 흑야가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생각했으니……. 참으로 바보 같은 짓이었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예전에 평목단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애당초 천하 곳곳에 놈들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셨지. 그중 황궁 내부에까지 침입한 놈들이 있다고 하셨고……. 따지고 보면 북경에서만 사라진 것일 수도 있다.’
송운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어찌 이리도 중요한 사실을 그간 잊고 있었단 말인가?’
게다가 점조직으로 형성이 되어있기에, 단체적으로 움직이기보다는 소수의 인원만으로 이동하는 만큼 그 범위는 잘게 쪼개져 있을 터.
송운은 그간 북경에만 시야가 팔려 자신이 놓쳤던 것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면, 발 빠르게 움직인다면 아직 다른 지역에는 흑야의 흔적이 남아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렷다.’
그리고 그것은 작금의 상황에 그들의 꼬리를 잡아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 될 것이다. 애당초 북경부터 시작한 이유는 가장 가깝기 때문이었다.
하나, 이제는 그럴 시간이 없다.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될 수 있는 한 범위를 늘려야겠구나.’
아직 천조회에게는 조금 버거울지도 모르나, 슬 북경의 웬만한 곳은 다 뒤진 상태다. 속도를 낸다면 다른 지역에 숨어있을 흑야의 실마리를 찾아낼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친 송운은 재빨리 천조회를 향해 전서구를 띄우기 위해 서신을 작성했다. 아직은 조금 무리일 수도 있을 테지만 하북성까지 범위를 넓혀달라는 부탁을 말이다.
푸드득!
끼익-!
어둠으로 물든 창공(蒼空)에 그와 대조적인 흰 전서구 한 마리가 높게 날아올랐다.
* * *
이 년 만의 회우를 마치고 하루가 꼬박 흘렀다.
전날 밤새 운기조식을 하며 내상을 다스린 덕에 송운의 안색은 전날보다는 밝아졌으나, 여전히 양조광의 눈에는 그리 비치지 않았던 것일까?
그는 조식을 함께하는 자리에서 송운과 송하를 위해 특별히 받아온 약을 건네었다.
“운 공자님. 그리고 송하 아가씨. 내기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는 약이라 합니다. 받으시지요.”
송운이 괜찮다는 말을 내뱉으려 했지만, 그보다 양조광이 더 빨랐다.
“새벽부터 제가 직접 움직여 의원에게 받아온 것이니 제 성의, 사양 마시고 두 분 모두 어서 쭈욱 들이켜세요.”
새벽과 직접, 성의의 단어를 강조하며 말하는 그의 모습에 결국 송운이 먼저 받아들였고, 송하 역시 군말 없이 받아 마셔야 했다.
‘허허. 조광이도 가끔 이럴 때 보면 참 짓궂은 것 같기도 하고…….’
하나 어쩌겠는가?
나쁜 것도 아니고 자신들을 걱정하는 마음에 이리 챙겨주는 것인 것을…….
그러던 그때.
송운의 시야에 양조광 옆에 딱 달라붙은 어린아이 한 명이 들어왔다.
이제 열 살 하고도 두어 살이나 더 되었을까?
피부는 적당히 하얀 편에 근육과 살이 적당히 잘 붙은 체구.
무엇보다도 똘망똘망하고 선한 눈망울이 송운의 눈을 사로잡았다.
‘상단에 어린아이가 함께한단 말인가?’
송운은 의아한 마음에 조심스레 양조광에게 아이의 존재를 물었다.
“조광아, 이 아이는 누구야?”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인사드리거라. 강아. 이분이 바로 송운 공자님이시란다.”
“예. 안녕하십니까? 송운 공자님. 올해로 열두 살인 위 강이라 합니다.”
송운은 고개를 숙이며 깍듯이 존댓말로 말하는 아이의 모습에 깜짝 놀랐다. 보통의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쓸 만한 어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놀라는 그의 모습에 왜인지 모르게 뿌듯해진 양조광은 뒷말을 이었다.
“이 년 전, 저잣거리에서 인연이 닿아 거둔 아이인데, 똑똑하고 영리합니다. 이 녀석이 저를 많이 도와주어 지금의 운양상단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아, 아닙니다. 단주님! 말씀이 과하세요. 이게 다 단주님의 능력이 월등하신 덕분 아니겠습니까?”
고개를 좌우로 크게 저으며 강하게 부정함과 동시에 양조광을 크게 예찬(禮讚)하는 위강과 어쩐지 어딘가 사랑스러운 자식을 자랑하는 아비 같은 양조광의 모습에 송운은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가 그러하다면 그러한 것이다.
결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말이다.
송운은 허리를 낮추어 위강과 눈높이를 맞추고선 웃으며 아이를 향해 말했다.
“하하. 그래. 강이라 하였던가? 네 말이 옳구나.”
양조광은 자신의 편을 들어 줄 것으로 생각했던 송운마저 위강의 말에 동조해 주었고, 이에 신나서 고개를 더 끄덕이는 것이 아닌가?
“맞습니다. 맞아요!”
“우, 운 공자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닙니다.”
양조광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송운은 이상하게도 그를 더욱 놀려주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조광이는 저런 표정을 지을 때가 참 재미있단 말이야…….’
송운은 좀 전까지만 해도 얼굴에 그득했던 장난기를 지운 채, 금세 진지해진 모습으로 그를 향해 되물었다.
“흐음……. 하면 조광이 네 의견으로 저 아이가 지금 내게 대포(大砲)를 하고 있다는 건가?”
“그, 그것은 아니지만……. 하아……. 운 공자님도 참. 저를 어찌 못하게 만드시는 재능은 여전하십니다.”
“풋……!”
양조광이 포기하는 듯 한숨을 크게 내쉬자 그 모습에 송하와 위강까지 참지 못하고 더불어 모두 웃기 시작했다.
“역시 조광이 자네는 그 진지한 모습이 참으로 매력이 있어. 함께 하면 즐거울 수밖에. 내 이래서 좋아하는 거지만 말이야.”
송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즐거운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으니 이 근처를 한 바퀴 도는 것도 나쁘지 않겠구나.”
* * *
송운과 송하가 운양상단에 온 지도 어언 칠 주야가 흘렀다. 운양상단 안에 마련된 수련장이라고 하기엔 조금 작지만, 공터라 치기엔 제법 큰 그곳에서 한 여인이 열심히 검무를 펼치고 있었다.
“하앗!”
후웅!
누구보다도 빠른 그 검은 마치 바람이라도 갈라낼 듯 가볍고 경쾌한 손놀림을 따라 허공을 휘저었고, 바람에 흩날린 나뭇잎이 바닥을 향해 떨어질 때 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