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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전생-116화 (116/275)

제116화

第八章. 각성(覺醒)

익숙한 기운에 점점 밀려오는 기억은 멀리서 느꼈을 때와는 달리 코앞까지 다가오니 자신의 기억이 틀린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다. 집안에 화마가 들이닥쳤을 때, 마주쳤던 검은 복면의 인물이었다.

그때 그 절박했던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송운은 순간 가슴속 깊숙이 무언가가 끓어오르며, 그날 입었던 상처 부위가 욱신거려오는 듯했다.

“네 녀석……! 그때 그놈이로구나!”

스르릉.

“……늦군.”

송운이 소릴 외치며 검을 뽑아 들었으나, 이미 그의 검이 먼저 선두를 쳤다. 어느새 새파랗게 서린 검 날의 끝은 송하를 향해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송운의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놈!”

생전 처음 겪어보는 다른 이의 검에 이미 송하는 몸이 굳어있는 상태.

‘크윽……. 자칫하면 송하가 다친다.’

그러한 송하의 모습을 보며 재빨리 내력을 끌어올려 검의 길을 파악한 송운은 순식간에 그의 품을 향해 파고들었다.

파밧!

‘……이런.’

그 모습을 바라본 흑령이 먼저 표정을 찡그리며 몸을 빼내었다. 송운이 검을 집어넣고 주먹으로 대응해왔기 때문이다.

검은 주먹보다 날카롭지만, 사정거리가 길다.

만일 제대로 파고든다면 검이 불리한 것은 자명한 일이다.

송운은 그 점을 이용한 것이다.

“송하야! 멀리 떨어지거라! 절대로! 내 곁으로도 가까이 붙어선 안 된다!”

크게 외친 송운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이던 송하가 빠르게 뒤로 빠졌다.

파바밧!

하나, 그 모습을 그냥 바라볼 흑령이 아니었다.

그가 재차 송하를 향해 몸을 꺾자 송운이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맹렬한 기색으로 추격했다.

‘혹여 주변에 다른 조력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도 드는 생각이 송운의 뇌리를 스치자 빠르게 내력을 끌어올려 주변을 세세히 살폈다. 혹여나 놓쳤을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에 두어 번 더 확인하고 나서야 송운은 조금이라도 안도할 수 있었다.

‘그래도 마음을 놓아선 아니 된다. 상황이 좋지 않아.’

송운은 송하와의 거리가 제법 벌어졌다는 것을 확인한 후, 호흡을 가다듬으며 다시 집어 든 환성의 손잡이를 꽈악 쥐었다.

‘이번엔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 * *

송하가 자리를 옮기는 것을 기점으로 송운과 흑령의 불꽃 튀기는 대결이 시작됐다.

휘이잉-

송운과 흑령의 검이 한번 부딪힐 때마다 주변의 흙들이 하늘로 솟아올라 소용돌이쳤고, 그 커다란 나무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져나갔다.

우지끈!

그러한 둘의 접점이 계속되어 갈수록 주변은 황폐해져 갔으며 송하는 더더욱 놀라움과 걱정에 그저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큰오빠…….’

두 개의 거대한 내기가 충돌할 때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송하에게도 그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져 떨려온다.

이제 겨우 절정 고수에 접어든 송하로서는 애당초 너무도 버거운 일이었다. 해서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한데, 송운은 다르다.

강하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송운의 모습은 그녀에겐 너무도 생소했다.

여태껏 자신에게 늘 웃어주며 다정다감했던 큰 오빠가 아니었다. 거기에 연달아 터지는 두 고수가 살기를 품고 싸우는 장면을 직접 보는 것 또한 처음이었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무기력이 그녀의 온몸을 덮쳐왔다.

카아앙!

“……제법 많이 컸군.”

흑령이 검을 품 안으로 거두며 조용히 읊조렸다.

스스로의 말 대로였다.

커도 너무 컸다.

송운에게 상처를 입게 한 이후로도, 삼 년이라는 세월 동안 자신 또한 수련을 멈추지 않고 끝도 없이 노력해왔다. 해서 아무리 송운이 성장한다 한들 이번에도 역시 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 당시 도중에 평서란이 끼지만 않았더라면 이미 그때 죽어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목숨이다.

한데 더는 예전의 송운이 아니었다.

‘……나와 비슷한 경지까지 끌어올릴 줄이야. 아니, 어쩌면…….’

지이잉.

방금 전 단 한 번의 부딪힘으로 검과 검을 타고 전해진 충격은 그의 손목과 어깨에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부딪혀봤자 별일 없을 거라는 생각에 맞받아친 한 수였다.

하나, 그것은 결코 가볍게 다가오지 않았다.

흑령은 검을 쥐었던 오른쪽 손바닥을 슬쩍 눈으로 흘겼다. 서로가 대치 상황인 도중에 검을 놓칠 수 없었기에 무리를 해서라도 꽉 잡았던 그곳에선 피가 꾸역꾸역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길……!’

송운이 시공검을 사용했다는 얘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로 성장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쯤 되니 오히려 그간 자신만 홀로 정체되었던 것은 아닌지 마음이 급급해져 온다. 흑령이 홀로 무작정 계획을 감행한 이유는 자신이 성심성의껏 모시는 주군인 독고백의 계획을 자꾸만 망가뜨리는 것 같아 이번에야말로 목숨을 거둬가겠노라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한데, 지금 상황은 좋지 않았다.

목숨을 내걸지 않는다면 이길 승산은 없어 보였다.

‘큭……. 동귀어진(同歸於盡)이라도 해야 하는 것인가? 자칫하면 내가 죽을지도 모르겠군.’

흑령이 검을 오른손에서 왼손으로 바꿔 쥐었다.

송운의 실력을 진심으로 인정한 것이다.

* * *

반면, 송운은 흑령과는 달리 확실히 지난번 싸움 때와는 달라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삼 년 전 싸움에서는 거의 일방적으로 내가 방어만 하기에 급급했다. 하나, 지금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때처럼 내력을 모두 쏟아부은 것도 아니었다.

송운의 판단 아래 적당한 양만을 끌어낸 것뿐이다.

그럼에도 밀리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승산이 있다.’

다만 송운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송하의 존재였다.

그때 당시는 홀로 있었으나, 지금은 곁에 송하가 함께 있기에 되레 더욱더 긴장감이 팽창했다.

차라리 혼자라면 싸우다 맞이할지도 모르는 죽음이 두렵지 않을 테지만 자신의 작은 실수가 곧 송하의 안위로 이어진다.

‘내 손에 송하의 목숨까지 달려있다.’

꿀꺽.

그렇게 생각되니 온몸에 힘이 들어가면서 타들어 갈 듯 느껴지는 긴장감에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뭘 그리 생각하는 것이냐? 싸움 도중 한눈을 파는 버릇은 여전하구나!”

콰과광!

흑령이 잠시 멈칫한 송운을 향해 검기를 날려 왔고 그것을 피하니 그 길을 따라 애꿎은 땅만 파였다.

채쟁!

카앙!

몇 번의 검격을 더 주고받았을까?

서로 무공이 너무 강하다 보니 주변의 모든 것들이 파괴되는 것은 물론이고 양측 모두에게 부담이 가고 있었다.

‘……? 뭐지?’

한데, 그 무렵 흑령의 기운이 갑자기 극대화되기 시작했다. 설령 자신이 여기서 죽더라도 송운과 함께 괴멸하기 위해 전신의 모든 내력을 끌어올린 것이다.

“타핫!”

그러곤 곧바로 송운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와 동시에 엇비슷하게 흘러가던 흐름이 조금씩 흑령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죽음을 각오한 자의 위력은 어마어마했다.

송운 역시 그것을 감지했고, 서둘러 내력을 마저 끌어올렸다. 하나, 그때는 이미 늦었다.

카가가각-!

쩌엉!

“크윽……!”

맞받아친 대가로 송운은 그대로 내상을 입어야 했다. 그것을 추스를 틈도 없이 사정없이 흑령의 검이 휘둘려지기 시작했고, 송운은 피하는 데 급급해져 갔다.

‘이대로 정신이 흐트러지면 안 된다! 마음을 비워야 해.’

그렇게 또다시 연타로 흑령의 검이 자신의 공간의 범위 내로 들어오려던 순간.

파앗-!

송운은 갑자기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그러곤 무언가가 그의 머릿속을 차곡차곡 가득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내 사사로운 마음을 완벽히 비워내는 것. 세상이 나이고 곧 내가 세상이다. 시간은 온 세상에 존재하고 그 세상은 나와 함께한다.’

제시공존 공시존해.

마음을 비워냄으로 인하여 이 광활한 공간과 내가 하나가 되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공간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것!

즉시공간.

이것은 마치 조화경의 벽을 깨부수었을 때와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차이였다. 하나, 결국은 같은 시점에서 시작하여 그 길만 달리했다.

‘만류귀종.’

송운은 문득 그 단어가 떠올랐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같은 것이다. 다만 그것이 쪼개고 쪼개어져 흩어져 있을 뿐.

그 순간, 송운은 그토록 노력해도 잡히지 않았던 시공검에 대한 감이 몸 전체에 와 닿았다. 그동안은 전혀 몰랐던 시공검의 또 다른 비밀 또한 깨달을 수 있었다.

‘끄으윽……!’

그와 동시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자신의 몸을 비트는 것과 같은 고통이 찾아옴과 동시에 머릿속에 시공검의 마지막 구결이 스쳐 지나갔다.

자존형시 각동시괴!

‘그 뜻을 깨닫는 순간 시공간의 경계가 무너진다!’

끼이익!

송운이 검을 들어 공간을 베는 순간, 그의 마음을 읽은 것인 마냥 환성이 괴성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 소리와 함께 공간이 뒤틀리는 걸 느끼면서 동시에 물컹한 것과 단단한 무언가가 동시에 잘려 나가는 느낌이 그의 손끝에 전해졌다.

서걱!

털썩.

“오빠!”

* * *

달그락.

독고백이 찻잔을 들어 올리려던 손을 멈추었다.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흑령이 죽는 순간, 미묘하게 느껴지는 죽음의 향기를 느낀 것이다.

‘흑령이 멋대로 움직인 것인가? ……이런, 어쩔 수 없지.’

독고백은 최근 심상치 않았던 그의 행적을 기억해내고는 자신을 따르던 수하가 죽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무표정으로 들던 차를 마저 입으로 가져댔다.

그리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누군가의 기척이 느껴졌다.

“은량(隱㔀). 주군을 뵙습니다.”

직감적으로 흑령에 대한 보고일 거라는 것을 예상한 독고백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청색 복면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흑령이 당했습니다.”

이변은 없었다.

‘역시나 군. 재미없는 녀석.’

호록.

그는 자신의 예상대로 들어맞자 이미 알고 있던 일이니 더 신경 쓸 것 없다는 듯 아무런 미동도 없이 마시던 차를 마저 들이켰다.

꽈악.

‘……흑령이 죽었다는 데도 눈 하나 깜짝하질 않으시는구나. 아무리 광기와 지루함에 빠져있다지만 어찌 저리 무심하실 수가 있단 말인가?’

흑령과 딱히 이렇다 할 친분이 없는 그도 울분이 생기는데, 하물며 그 주군이라는 이가 어찌 저리 태연할 수 있는지 은량은 순간적으로 욱하는 마음이 치밀어 올랐으나, 자신은 그저 그의 많고 많은 수하 중 하나일 뿐.

감히 그에게 화를 낼 수 있는 권한 따위는 없었다.

아니 그렇게 된다면 그는 가차 없이 자신을 베어 버리리라. 주인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는 개는 필요 없으니 말이다.

그 모습을 말없이 한참을 바라보았으나 은량은 보고를 했음에도 독고백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애써 떨리는 목소리로 마저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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