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전생-113화 (113/275)

제113화

‘호오? 이거라면…….’

족히 금 자 열 냥이 넘는 거금이었다.

게다가 걷은 세금이 아니라 우연히 얻은 돈이니 상부에 상납하지 않아도 된다. 몇 번에 걸쳐 진짜인지 확인을 마친 그는 곧 손을 들어 남은 무리를 제지시키고선 목을 다듬어 근엄한 목소리로 마치 자신이 성인군자라도 되는 듯 말을 이었다.

“얘들아 가자! 돈까지 받은 마당에 어린 애 더 패봤자 하늘에서 은자가 떨어지길 한다더냐? 금이 떨어지길 한다더냐? 클클. 오늘은 내가 크게 쏘마!”

“예이, 형님! 그렇게 합죠. 낄낄.”

“넌 오늘 운 좋은 줄 알거라. 재수가 없으려니. 카악 퉷!”

왈패거리는 마치 그 아이를 향해 더러운 똥이라도 밟은 것인 마냥 침을 뱉으며 자리를 떴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아이가 바로 지금의 위강이었다.

* * *

‘제법 똘망똘망하게 생겼구나.’

아이를 거두어 씻기고 먹이고 입히니 처음 보았을 때의 꼬질꼬질한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제법 괜찮은 외관을 지닌 이제 막 열 살에 접어든 소년이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위강이요. 위 강!”

소년의 말을 들은 양조광이 속으로 작게 놀랐다.

저잣거리에서 땟국물을 묻힌 채 뭇매를 맞고 있던 아이에게서 들릴 법한 이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이름을 가지고 있다니 놀랍구나.’

이렇게 가까스로 죽기 직전 양조광의 손에 의해 목숨을 연명하게 된 소년은 몸이 다 나은 후에도 양조광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큰 은공을 입었다며 어떻게든 자신을 따르려 했다.

“공자님 이 은혜를 대체 어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저를 거두어주세요!”

양조광은 그런 위강의 모습에 어찌해야 좋을지 난감하기만 했다.

그날의 일을 계기로 마을에서 조금씩 양조광의 평판이 오르기 시작했다. 의도치 않은 일이었으나, 위강을 구해준 일이 사람들의 입을 타고 널리 퍼지면서 상단 일에 도움이 된 것이다.

양조광은 왠지 어린아이를 이용해버린 것 같은 느낌에 찜찜하여 본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려 하였으나, 위강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

“단주님께서도 저를 버리시면 저는……. 훌쩍. 이번에야말로 참말로 길에서 다시 그놈들에게 맞아 죽을지도 모릅니다. 훌쩍.”

양조광이 마음이 약하다는 것을 일찍이 파악한 위강이 눈물을 흘리며 그를 흔들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단주님께서 혼자서 이 상단을 꾸리신다지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잡다한 일이라도 좋아요. 혼자보단 둘이 낫지 않을까요?”

라며 양조광이 버거워할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그를 도왔다.

이젠 정말 보내야 할 때라며 마음을 굳게 먹어도 그사이 정이 들어버린 것인지 위강의 맑은 눈망울을 보면 쉽지 않았다.

점점 둘이 함께하는 시간은 많아졌고 결국 고집 센 양조광도 위강의 끈질김과 순수함에 두 손 두 발 다 들고 아이를 곁에 두었다.

‘그래, 타생지연(他生之緣)이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 낯모르는 사람끼리 길에서 소매만 스쳐도 전생의 깊은 인연에 의한 것이라 하였지. 하물며 이리 이 아이와 나는 어떠한가? 이것도 하나의 인연이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납득시키며 말이다.

* * *

집안에 남게 해주면 더 이상 귀찮은 일은 생기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양조광의 오판이었다. 오히려 이후로도 위강은 끈질기게 그를 괴롭혔다.

“단주니임! 저도 일 잘할 수 있다니까요?”

“어허. 강아. 안 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애초에 직접 일을 돕게 해달라는 위강의 부탁 아닌 부탁이 있었지만, 양조광은 정말로 일을 시킬 생각은 없었다.

그저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동생처럼 거두려 했을 뿐이었다. 한데, 막무가내로 일을 시작한 위강은 그의 생각과는 달리 음식을 제외하고는 뭐든 잘 해냈다. 아니, 음식도 간단한 죽을 내거나 하는 정도는 가능했다.

자꾸 하지 말라고 하니 이제는 아예 스스로 일거리를 찾아 나선 것이다. 사실상 굳이 일을 찾으려 하지 않아도 집안 곳곳에 널리고 널린 것이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동안은 양조광 혼자 해왔던 빨래부터 시작하여 온갖 잡일들과 청소를 도맡아서 해나갔고, 눈치도 빠르면서 말은 또 어찌나 조리 있게 잘하는지 상단 일로 오는 손님들을 모시는 일까지 뭐든지 척척 이었다.

그런 위강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역시 양조광이 그를 구해주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오히려 좋게 볼 뿐이었다.

그만두라곤 하였으나, 덕분에 바깥에 나가서 일을 보는 동안에도 상단의 문을 닫아두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가끔은 위강의 나이를 잊어먹을 만큼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그중에서도 양조광을 가장 놀라게 한 것은 위강이 글도 조금 읽을 줄 안다는 사실이었다. 일반적으로 거리에 나도는 아이가 이름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특이한 아이라고 여겼거늘, 그것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양조광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한데, 강아. 대체 글은 어디서 배운 것이냐?”

그의 물음에 한참을 머뭇거리던 위강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뭐……. 그냥저냥, 눈동냥, 귀동냥으로 길거리에서 얻어 배운 것이지요. 헤헤.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에요. 겨우 글 몇 글자 읽을 줄 아는 것뿐인걸요. 한데 우리 단주님께서는 어려운 서류도 척척 처리하시지 않습니까? 저는 제대로 글을 배운 것이 아닌지라……. 도움이 되지 못해서 죄송해요.”

물음에 답하며 위강이 순식간에 축 처져 버리자, 양조광이 당황하며 성급히 그를 다독였다.

“아니다. 네게 그런 말을 들으려 물은 것이 아니니 그런 생각은 하지 말거라.”

그의 한마디에 다시 기운을 차렸지만 말이다.

“예, 단주님!”

이쯤 되니 정말 위강에서 많은 도움을 받는다는 걸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그동안 완연히 일인 체제로 운영되어오던 상단이었기에 위강이 집에 들어온 후, 양조광은 오롯이 상단 일에만 치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격도 밝고 싹싹해서인지 그와 함께 있으면 힘들었던 것조차도 잊어버릴 수 있었다.

‘참으로 영특한 아이로다. 어쩌면…… 내가 이 아이를 구해준 것이 아니라 이 아이가 날 구해준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양조광은 위강이 일을 도와줌으로 인해 분담되면서 여유가 조금 생기자, 위강에게 글을 가르치고자 마음먹었다. 그때 아쉬움을 못내 지우지 못했던 위강의 목소리와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 또한 한동안 상단의 일에 치여 학문에 소홀히 하기도 하였으니, 강이와 함께 하면 내게도 도움이 될 테지. 그렇게 된다면 일거양득이 되겠구나.’

잠시 기분이 좋아진 양조광은 또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세상만사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혹여 강이가 싫어한다면 어찌하지? 으음……. 역시 먼저 묻는 것이 순서겠구나.’

그는 위강이 집에 들어온 이후 늘 함께하게 된 저녁 식사에서 먼저 운을 띄웠다.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의사이나, 먼저 배움을 받을 이에게 묻는 것이 순서였다.

가르치려 해도 배움을 받으려 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양조광은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강아, 흠흠. 오늘부턴 남는 시간에 글을 배워보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멈칫.

열심히 밥 먹는 것에 집중하고 있던 위강이 놀란 토끼 눈이 되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순간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양조광이 특유의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위강에게 재차 물었다. 말년에 손자를 보면 이러한 기분일까 라는 생각까지 들어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제대로 글을 배워보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너도 어느 정도 기본은 떼었으니 그리 어렵진 아니할 것이다.”

“다, 단주님……. 어찌 저같이 천한 것이……. 이렇게 거두어주시는 것 만해도 감사한데…….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단주님께서 힘드시지 않게 열심히 배울게요!”

양조광의 기우와는 달리 위강은 울먹이며 좋다고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감사의 인사를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강아. 너는 천한 것이 아니란다. 어찌 같은 하늘 아래 동등이 태어난 사람에게 천함과 귀함을 논할 수 있겠느냐? 두 번 다시는 그런 말은 입에 담지 말거라. 게다가 너는 내게 많은 도움이 되고 있지 않느냐. 오히려 이리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너무 늦은 감이 있구나.”

“아닙니다. 단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렇게 시작한 글공부는 그의 생각대로 순조롭게 나아갔고, 함께 일을 처리하니 상단은 점점 더 커져 나갈 수밖에 없었다. 상단의 식솔들은 하나둘 늘어갔고, 지반을 닦아 이젠 제법 자리를 잡게 될 수 있었다.

이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훌쩍 지나갔다.

‘참으로 오랜 시간이었지. 처음 이 상단을 세웠을 때가 엊그제 같거늘…….’

회상을 마친 양조광의 얼굴에는 그저 함지 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전날 밤, 양조광이 세심히 써 내려간 서신은 무사히 송운의 손에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것을 받아본 송운을 비롯하여 천조회 모두가 그 소식에 크게 기뻐했다.

“역시 조광이는 뭐든 잘 해낼 줄 알았습니다. 설마하니 상단을 세울 줄이야……. 그 낯선 땅에서 홀로 자리를 잡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인데……. 이거 제가 너무 해준 게 없어 미안할 정도입니다.”

송운이 기쁘면서도 조금 미안했는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자, 우곤이 한마디 거들었다.

“주군. 어찌 되었건 이건 정말 잘된 일이 아닙니까? 으하하하! 이거 오늘은 아무래도 거나하게 술 한잔해야겠습니다, 그래!”

“암요! 큰형님. 자고로 축하할 일은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 아니겠습니까?”

역시나 우곤을 가장 잘 따르는 조총이 한마디 더 거들었고, 이에 모두가 신나서 환호성을 질렀다.

“끙……. 하여튼 뭐든 술 마실 거리로 만드시는 능력이 참 대단하십니다.”

물론 서사는 타박하듯 조용히 중얼거렸지만, 그 역시도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어쨌건 잘된 일이로구나. 좋은 소식이야.’

그렇지 않아도 요즘 흑야에 관해 아무것도 알아낸 것이 없어 분위기가 많이 암울했던 차에 들려온 운양상단의 이야기는 당연히 기쁠 수밖에 없었다.

마치 가뭄의 단비처럼 말이다.

순식간에 화기애애해진 분위기에 서신을 접어 내려놓은 송운이 결심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당장 조광이에게 기별을 넣어야겠습니다. 조만간 제가 한 번 그곳으로 가겠다고 말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