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2화
“하하. 알겠다. 알겠어. 강이 너는 내가 도무지 이길 수가 없구나.”
“어휴. 그리 이기실 수 없으시면 제발 일 좀 줄이세요. 만날 이길 수 없다시면서 이게 도대체 몇 번째예요? 이제는 몇 번이나 이러했는지 세지도 못하겠습니다. 이러다 송웅인가 뭔가 하는 분을 뵙기도 전에 과로사 하시겠다구요.”
“강아.”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투덜대던 소년에게 좀 전과는 달리 강한 어투로 이름을 부르자, 위강이 속상하다는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을 정정했다.
“예예. 알겠습니다. 단주님. 송. 운. 공자님. 이시죠.”
그랬다.
단주라 불린 이는 다름 아닌 양조광이었다.
* * *
양조광은 송가를 떠난 후, 중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많은 현 지식을 쌓았다. 그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간 그가 얼마나 정저지와의 신세였는지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학문으로 배울 수 있는 세상과 직접 보고 배우며 느끼는 세상은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렇게 정신없이 보낸 세월이 일 년.
양조광은 더 이상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야 어딘가에 정착하여 돈을 모으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처음에 했던 고민은 하나였다.
집을 나오면서 자신이 들고나온 자금은 생각보다 많았다. 하나 그대로 손에 쥐고만 있는다면 돈은 정체한다.
전장에 맡겨 이자를 취하는 방법도 있지만 이것도 지극히 한정적이다.
하면 이것을 이제는 굴려 불려야 하는데, 그중 가장 좋은 방법으로 꼽힌 것이 바로 상단이었다. 굳이 이것이 아니어도 표국이나 전장도 있었지만, 상단에 비하면 현실성이 지극히 떨어진다.
해서 선택한 것이 상단을 꾸려 키워나가는 것이었다.
물론 상단 또한 힘들 테지만 혼자서 기반을 다져나가는 것은 표국이나 전장에 비하면 좀 더 수월하다.
처음에 그것 또한 송운의 지인이자 스승님인 송악의 지인이 하는 대별상가가 조금 마음에 걸리는 감이 없잖아 있었으나, 서로 거리가 꽤나 있는 곳이니 크게 걸릴 것은 없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해서 송운과도 가까우면서 대별상가와는 먼 곳을 찾아야 했고, 이래저래 판단하에 처음 선택했던 곳은 북경이었다.
하나, 이미 북경은 포화상태였다.
북경은 상단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그랬다.
황제가 사는 곳이다 보니 인구가 밀집되어 있고 도시 자체도 워낙 넓어 크고 작은 상단은 이미 널릴 만큼 널려있었던 것이다.
정말 규모가 큰 상단부터 시작하여 길가에서 작게 점포를 내고 타지역과의 왕래가 조금만 있어도 상단이라는 이름을 걸 만큼 흔해 빠진 상태였다.
해서 양조광이 모든 것을 고려하여 선택을 한 곳이 바로 이곳.
하북성 헌현현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이곳이라면 그리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수많은 현과 도시를 돌아다니며 그에게는 보는 눈이라는 것이 생겼고 이곳에 도착하는 순간, 양조광은 더 이상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꼈다.
첫째로 북경과 그리 멀지 않았다.
하북성이라는 곳 자체가 이미 북경과 맞닿아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둘째로 이렇다 할 큰 세력이 없었다.
모두가 북경을 지나가는 중점 정도로만 생각했지, 이곳에 자리를 내릴 생각은 딱히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북경과 아래 지역을 잇는 길이 많았다. 사방으로 많은 길이 뚫려 다른 성으로 향하기 편한 곳이 이곳 헌현현이었다.
상단을 세우리라 마음먹고 나니 양조광은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결정을 내렸으면 실행하는 것이 알맞은 순서였다.
하나 그 과정이 처음부터 쉬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아무리 큰 세력이 없다고 한들, 자금을 제법 들고 있는 이라고 한들, 이방인이 아는 인맥 하나 없이 새로운 곳에 무언가를 세운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웠다.
일 년에도 새로운 상단은 수십 개씩 나타났지만, 그중 망하는 것이 다반사인 것이 현 상황이다.
‘자리를 잡는다’라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해서 양조광은 자리를 잡아 다져나가는 동안 송운에겐 기별을 넣으면서도 언질을 넣지 않았다.
그렇게 이곳에 자리를 잡은 지도 어언 일 년.
처음과는 달리 홀로는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서류들이 그에게 올라왔고, 입소문을 타고 제법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단을 찾기 시작했다.
‘이제 슬슬 때가 되었구나.’
주변 상단들의 수많은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양조광의 뛰어난 머리로 위기를 극복하고 버티며 꿋꿋이 자리를 잡은 것이다. 덕분에 잦은 선혈을 보게 되었지만, 그마저도 기뻤다.
‘드디어 조금이나마 운 공자님께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겠어.’
양조광의 입가에 얇은 호선이 그려졌다.
내일이면 송운에게 전해질 서신에 부푼 마음을 안은 양조광이 잠자리에 들기 전 눈을 감은 채, 길고도 길었던 지난날들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 * *
“이곳이면 충분하겠구나. 여러 가지 조건도 잘 맞는 듯하고.”
양조광은 자신의 앞에 놓인 적당한 크기에 양호한 집 한 채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며칠간 찾아 헤매다 다리를 놓아주는 이의 접선을 통해 어렵게 구한 집이었다. 제법 비싼 값을 주어야 했으나 하루라도 빨리 자리를 잡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기에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크기가 그리 큰 것은 아니나 당장은 나 홀로 모든 것을 해내야 하니 이 정도도 버겁겠지.’
쓰윽.
양조광은 차근차근 쌓여있던 먼지들과 오래된 식기들을 청소해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가 운양상단을 세우고 난 후, 가장 먼저 한 일이었다.
“콜록 콜록.”
그는 먼지를 털어내며 연신 드는 기침에 제법 오랫동안 버려진 집이었다던 접선인의 말이 떠올랐다.
‘아무렴 어떠하겠느냐? 이젠 내가 잘 꾸려나가면 되는 것이지.’
그렇게 한참을 치우다 보니 생각보다 집의 규모는 컸다. 이곳을 기점으로 한동안 홀로 상단을 키워나가야 한다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으나, 흐트러지는 정신을 바로 잡았다.
돈을 조금 더 들여 사람을 구할 법도 하건만, 양조광은 그러지 않았다. 이제 막 새로운 장소에서 상단을 꾸리려는 그에게 다른 사람들은 믿을 만한 구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 그것은 이곳 지역의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크흠. 거 새로운 상단이 들어섰다 하더니 이곳인가 보구먼.”
“에이 뭐 보나 마나 뻔하지 않은가? 한두 번 망하는 걸 본 것도 아니고. 저리 큰 집에서 홀로 운영한다는 사람을 어찌 물건을 믿고 맡긴단 말인가? 분명 얼마 못 가 금방 망하겠지. 쯔쯧. 내버려 둠세.”
불쌍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들부터 불신의 눈빛까지.
어느 사람 하나 호의적으로 다가오는 이는 없었다.
사람들이 그리 말을 할수록 양 조광은 더 열심히 마을을 떠돌며 상단을 알렸다. 지나가는 이들의 한마디 한마디는 되레 양조광을 버티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하나, 그런 그에게도 상단을 자리 잡는 것도 운용하는 것도 모두 홀로 하려니 너무도 속도가 더뎠다. 더딘 것뿐만이 아니라 버겁기까지 했다.
‘후우. 역시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쯤은 알고 시작한 일이지만……. 참 힘에 겹구나.’
평생 앉아 공부만 해왔던 그에겐 금방 바닥나는 체력은 또 하나의 장애물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하기엔 너무 일렀다.
‘얼마나 했다고 벌써 무너지려 하는 것이냐? 안 된다. 조광아. 힘을 내보자 꾸나.’
그렇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달포가 지나고 또 달포가 지났다.
계절은 변했으나 상단이 변한 것은 크게 없었다.
이쯤 되니 슬슬 송운에게 받은 자금이 반 토막이 날 때가 되었다.
아니 났어도 한참 전에 났어야 했다.
양조광이 버티고 버텼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조금씩 물꼬를 트기 시작했다는 것이겠지. 그래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 분명 열심히 한 만큼 돌아오는 법이다.’
그의 말처럼 조금씩 주변의 상가에서 자신에게 물건을 맡기기 시작했다는 것이 그나마 그에게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가 열심히 일한 것이 조금씩이나마 싹을 틔우고 있었던 것이다.
양조광이 넌지시 던져준 제시가로 팔면 왠지 모르게 물건이 배로 잘 팔렸고, 손님들이 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가 슬금슬금 그의 눈썰미와 운용력을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한 때였다.
‘운 공자님께 기별을 넣어볼까?’
간혹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약해진 몸만큼 지친 마음에 송운에게 부탁을 해보려 하였으나, 이내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이 역시 자신 스스로 시작한 일이다.
힘들어 무너질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면 송운이 했던 말 한마디가 문득 떠올랐다. 자신의 힘으로 송가를 지키고 싶다는 굳은 의지가 말이다.
‘그래. 내가 지금 여기서 무너진다면 송 공자님의 얼굴을 어찌 뵙는단 말이냐? 안 된다. 힘을 내보자. 조광아.’
힘이 드는 만큼 하루의 해는 금세 졌고, 또 금방 떠올랐다.
하루하루가 고난의 연속이었다.
평생을 공부만 하던 그에게 상단의 일이란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론적인 것만 안다고 해서 실전에서 쉬운 것이 아닌 만큼 말이다.
‘충분히 공부를 했다고 했는데도 역시 실전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해서 어떻게 하면 상단을 더 크게 키울 수 있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나가던 양조광의 눈에 저잣거리에서 한 광경이 들어왔다.
바싹 마른 몸의 어린아이가 다 큰 성인 장정들에게 두들겨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도 처참하여 지나가던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으나, 늘 그래왔듯 속으로만 욕할 뿐.
누구도 쉽게 나서지 못했다.
그 연유는 이미 이 저잣거리엔 유명한 왈패들이었기 때문이다. 무공을 익힌 이들에겐 한없이 약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다.
어느 저잣거리든 뒷배를 봐준다는 명목하에 검은 손들은 상인들의 돈을 배로 뜯어가기 일쑤였고, 하루에도 몇 번씩 저런 광경이 펼쳐지곤 했다.
저 속에 끼어들기라도 한다면 뼈도 못 추릴 터.
한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그 아이가 양조광의 눈에 밟혔다.
‘아직 어린아이 이거늘……. 어찌 무를 익힌 이가 저리 악한 행동에 써먹는단 말인가?’
상황을 듣자 하니 지나가던 왈패거리들과 실수로 몸을 부딪친 것이 몰매를 맞게 된 것 같았다. 그렇게 한참을 매를 맞아 죽어가던 아이를 향해 양조광이 다가갔고, 주변에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을 무렵.
왈패거리 중 얼굴을 비롯해 몸 군데군데 많은 자상을 가진 험상궂은 이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가던 길 가시지? 본인 몸도 허약해 보이는데 괜히 나서서 험한 꼴 보게 되지 말고 말이야. 앙?”
명백한 협박이었다.
하나 양조광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곤 그들을 향해 묵직한 무언가를 던지듯 건네주었다.
짤그랑!
덥석!
우두머리는 그가 던진 주머니를 열어 슬쩍 그 안을 살폈고 제법 돈이 되어 보였는지 눈이 화등잔마냥 커졌다.